소설리스트

A.I. 닥터-924화 (924/1,303)

924화 치프 우하윤 (3)

“아, 내가 주책이지.”

다행히 조태진은 눈앞에 수혁이 있지 않은 이상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수혁의 향내가 조금 풍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우하윤이 있지 않나.

물론 우하윤은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재원이라 여러 교수들이 이뻐하고, 또 될 수 있으면 펠로우로 꼬시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수혁 바라기인 조태진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MRI 찍었나?”

“아, 아뇨. 센터 쪽에서 찍을 수 있다고 해서 지금 가셨습니다.”

“센터?”

센터라.

태화 의료원은 정말로 큰 병원이다 보니 안에 센터가 여럿 있었다.

심지어 최근 김다현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다이어트 센터까지 열린 마당이었다.

허나 조태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곳은 단 하나였다.

“네, 통합진료센터입니다.”

“갈까.”

“네?”

생각해 보니까 수혁이를 본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미국 갔다 오더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피차 바쁜 몸인 데다가 3월이라 정신이 없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서 이런 기회가 왔군, 그래.’

이렇게 자연스레 갈 수 있다면 가는 게 맞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었다.

‘뭔 소리시지……? MRI 찍는 걸 왜 가……?’

그에 반해 하윤을 비롯한 레지던트 군단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체 왜 가지 싶어서 그랬다.

간다고 검사가 더 잘되나?

그럴 리는 없었다.

검사는 기계와 방사선사, 그리고 환자가 하는 거니까.

의사가 있으면?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었다.

“어…… 가네요?”

“말도 안 듣고 가시잖아. 가야지. 아마…….”

“아마?”

“뭐, 아냐.”

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조태진은 병동을 벗어나 걷고 있었다.

평소보다 회진도 일찍 왔겠다, 수혁이 얼굴이나 보고 올 생각에 숫제 달리고 있었다.

그럼 레지던트들은 어째야 할까.

같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짓을 할 이유는 하나 뿐이지.’

하윤도 나름 팬클럽 부회장이지 않았나.

지금은 이게 팬클럽인지 아니면 종교 단체인지 모를 정도로 변모하긴 했지만…….

하여간, 그 중추 중 하나가 바로 조태진이었다.

심지어 이 양반은 종교 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도 백 프로 수혁이를 보러 가고 있을 터였다.

다다다다-

그래서 그럴까.

어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어어.”

“환자 안 좋나 보다.”

“비켜, 비켜!”

다시 말해 교수와 레지던트 넷까지 해서 총 5명의 의사가 달리고 있었다.

혈종 병동과 통합진료센터는 아예 다른 건물에 있어서 그 건물을 잇는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시간대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들은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보니 사람이 꽤 많았는데, 그들은 이 이른 시간부터 내달리는 의사들을 피해 양옆으로 서 있었다.

“으아아아!”

조태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달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몫이었다.

‘망할.’

특히 하윤이 그랬다.

아무 일 없이 달리는데 사람들이 비켜 주니까 너무 부끄러웠다.

‘근데…… 나도 얼굴 직접 뵌 지는 꽤 된 것 같긴 하네…….’

방어기제일까?

뇌가 알아서 돌았다.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태우다시피 하다 보니, 이렇게 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요새 운동도 잘 못 하니까…… 전력 질주 좀 하는 게 건강에 좋을지도?’

뒤따르던 레지던트 셋은 그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마지못해 뛰던 그들의 치프가 갑자기 최선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윤은 그나마 운동을 해 온 데 반해 나머지 애들은 몸이 곯아서 그랬다.

“야, 뭔 일 났나.”

“뭐죠?”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저런 건 알 수가 없죠…….”

그 광경을 센터에 선 두 의사, 그러니까 이현종과 이수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들짐승 같은 게 달려오나 싶었더랬다.

조태진이 덩치가 좀 크지 않던가.

게다가 사람이 병원에서 저렇게 뛸 일이 있나 싶었다.

환자가 안 좋으면 뛰기도 하는데, 슬프게도 의사들도 몸이 그렇게 좋진 못해서 뛰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 그랬다.

“어…… 저거 태진이 아닌가……?”

“형이 왜……?”

“아픈가?”

“아픈 사람이 저렇게 뛸 수 있나요?”

“안 되지.”

“그럼 뭐지.”

둘은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그러니까 3월 1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바탕 회진을 돌지 않았나.

지금 당장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티 타임이나 가지면 그만이었다.

“어, 수혁아!”

“네, 형. 어디 아파서 오신 거예요?”

“어…… 어, 그러고 보니.”

“잉? 진짜로 아픈 데가 있어요?”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가, 가슴이 좀 아팠어.”

“아.”

그런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이에게 이런 드립이라니.

“아.”

“아.”

같이 있던 이현종도 뒤따르던 하윤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를 외쳤다.

심지어 저 멀리 서 있던 안대훈과 김성진도 입 모양으로 ‘아’를 했다.

“아무튼, 우리 환자 왔는데 같이 볼까?”

“좋죠.”

하지만 환자가 있다는 소리에 수혁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또 어마어마하게 협진 요청이 쌓여 있긴 할 터였다.

하지만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않나?

당장 할 일이 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환자가 있으면 본다.

어려운 환자라면, 더더욱 본다.

이것이야말로 수혁의 사고회로라고 보면 되었다.

위이잉.

MRI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검사 아닌가.

부위가 흉부와 경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검사 중이었다.

나온 영상도 별로 없었다.

하여간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방사선사가 한숨을 쉬었다.

-센터로 갈 수 있나? 월급 올려주고…… 환자는 여기보다 적을 거야. 어차피 돌아가면서 기계 돌려야 할 테니까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센터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지.

-사람들은 어떠신데요?

-음…….

-왜…… 망설이시죠?

-조, 좋은 사람들이야.

윗놈 생각을 하면서였다.

좋은 사람들이 아닌 건 아니었다.

막말로 센터장이랑 부센터장이 저 정도로 별말 없이 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하지만…….

“아 좀 비켜 봐.”

“벽에 붙어라, 벽에!”

“저 지금 사람 사이에 낑겨 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검사실로 그냥 들어오는 건…….

게다가 이번엔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심지어 밖에 서 있던 안대훈이나 김성진도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미친놈들.

여기가 무슨 연회장이냐.

“잠시만요. 버튼이 안 보여.”

“아, 네네. 죄송합니다.”

“네, 좀만 더…….”

“네.”

“네.”

다행인 것은 염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비켜 주기는 했다.

문제는 나갈 생각은 없다는 건데, 그 정도는 감안해야 했다.

어쩔 수가 없잖아?

위이잉.

일단 기계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영상도 잘 넘어오고 있었고.

그사이, 각자 자리를 잡은 의료진들은 환자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태진이었지만, 그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부주교.’

아니, 종교적인 배려가 있다고 해야 할까?

딱히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배려한다는 게 좀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하여간, 그는 이 케이스를 발견한 사람이 하윤이라는 것을 수혁이 알게끔 해 주었다.

‘으아…… 떨린다.’

하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뭐가 되었건 꿈이 이쪽에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남고 싶다.

이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오…… 그래? 그럼 직접 보고 문진했더니 그런 문제 목록이 보였단 얘기네?”

“네. 그렇죠.”

“좋아. 아주 좋아. 그런 근거로 혈관염을 의심했다, 이거지?”

“네.”

“흐음…… 어디 볼까.”

“네.”

다행히 수혁도 좋아했다.

나름 근거가 탄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영상을 통해 입증만 되면 될 일이었다.

“넘어온다.”

다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중에서 영상을 제일 잘 보는 게 수혁이지 않나.

그는 거의 뭐 영상의학과 전문의나 다름없을 정도로 뛰어난 판독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일단 쇄골하 동맥의 협착이 있고…… 동맥벽이 두꺼워. 아주 두꺼운데…….”

[확실히 대혈관 혈관염일 가능성이 매우 크겠군요.]

수혁은 영상이 넘어오는 족족 판독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바루다의 도움이 없이도 어느 정도는 되는데, 지금은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아주 정확한 판독이 가능했다.

그는 그 외에도 대동맥궁, 우측 총경동맥 등이 두꺼워져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목부터 어깨 그리고 허리 부근까지 아플 만한 소견을 보이고 있단 얘기였다.

“혈관염이 맞아.”

“아!”

수혁의 입에서 컨펌이 떨어지는 순간, 하윤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대학 병원에서 수련받고 있는, 그중에서도 내과 의사인지라 얼굴만은 침착했지만 방금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희열이었음을 부정할 만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다만 수혁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다 보니 그 감정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 않나?

다름 아닌 아까 환자 볼 때 하윤 본인이 지었던 그 얼굴이었다.

‘왜……?’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혈관염이 괜히 생겼을 리가 없는데…….”

“아.”

아까의 ‘아’와 지금의 ‘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 괜히 생겼을 리가 없었다.

암 환자였다고 해서 혈관염이 생기나?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언가의 결과로 나타났을 터였다.

혹 감염이라면 큰일이었다.

이 정도 범위의 감염을 일으켰다면, 환자는 살기 어려웠다.

“자가 면역 질환 계열일 텐데…….”

다행히 수혁의 말에 따르면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다행인가?

이런 생각이 뒤따랐다.

“잠깐.”

“네?”

“지금 여기…… 골수에…… 골수에서 좀 섬유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있으려니, 수혁이 혈관과 전혀 다른 지점을 짚었다.

골수.

즉 뼈의 안쪽을 짚었다.

그제야 다른 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혁이 방금 본 것과 정확히 같은 양상의 변화를 확인했다.

확실히, 환자의 골수는 섬유화가 일어나 있었다.

이걸 보려고 찍은 영상이 아니다 보니 정확지는 않았지만 듣고 보니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화가 현저했다.

“이게 왜…….”

“아, 설마.”

다른 이들이 ‘대체 왜?’를 떠올리는 동안, 조태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는 무언가 다른 의견을 듣기 위해, 그러니까 희망을 듣길 원하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허나 수혁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수혁아 너도…… MDS 떠올리고 있는 거야?”

“네. 골수 이형성 증후군일 가능성이 큽니다.”

“드물게…… 이게 혈관염을 일으키긴 하지. 다른 가능성은……?”

“아까 하윤이 말을 들어 보니까 류마티스 질환의 다른 소견을 보이고 있진 않더라고요. 물론 검사를 해 보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영상에서 이 정도로 명확하게 보일 정도면 서둘러 골수 검사부터 해 보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좋지 않은데…….”

“그래도 지금 진단된 게 다행이죠. 더 지체했으면 전환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지. 그래, 고맙다, 수혁아.”

“아뇨. 하윤이가 잘 캐치했어요.”

“그것도 그렇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