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25화 (925/1,303)

925화 치프 우하윤 (4)

골수 이형성 증후군.

쉽게 말해 골수에서 정상적인 세포가 아닌 다른 세포를 만들거나, 또는 제대로 못 만들게 된다는 뜻인데…….

면역 억제 등의 이유로 인해 드물게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물론 그보다는 그냥 우연히 생기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하윤은 그 질환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살짝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 아닌가?

“혈관염은 워낙에 드문 합병증이다 보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네.”

하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조태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괜히 하는 소리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빨리 진단되었으니까.

오늘부터 치프인 하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러니까요. 운이 좋았어요. 이걸 단서로 진단되는 경우는 드물 거예요. 좀 그렇긴 한데, 굳이 쓰려면 케이스 리포트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기를 수혁이 살려 줘?

하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난 척이 패시브로 발동되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케이스를 진단한 걸 꽤나 뿌듯해하고 있단 얘기였다.

‘이수혁 교수님이 남 기 살려 주려고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지.’

게다가 수혁이지 않나.

차라리 이현종이 입바른 소리를 한다면 모를까…….

수혁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안대훈이 들으면 불경하니 어쩌니 하겠지만, 수혁은 솔직히 잘난 척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윤이가 의심해서 데려온 거야. 처방도 내고.”

“와…… 하윤이 진짜 많이 늘었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무조건 진짜라고 봐야 했다.

“아…….”

덕분에 하윤은 감격에 찬 얼굴로 둘을 바라보다가, 이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두 교수님 덕분입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뭐 너 정도면…….”

“그래, 더 노력해서 대훈이처럼 되자.”

“수혁아, 그게 듣기에 따라서는…….”

“네? 왜요?”

“아니…….”

그뿐만 아니라 나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화가 잘된 덕에 정진하겠다고도 했다.

반응은 달랐다.

당연하다는 듯이 달랐다.

아마 목소리가 아니라 문자로 타이핑해도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그때, 대훈이 손을 들었다.

한껏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였다.

“아이고, 미안하다.”

조태진은 황급히 사과했고, 그걸 보던 안대훈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장난친 겁니다! 장난! 이수혁 교수님께서 누군가에게 저처럼 되라고 하셨는데 기분이 나쁠 수가 있겠습니까! 하윤아, 정말 노력해서 나처럼 되려무나.”

그러곤 하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윤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 얼마간은 안대훈처럼 되고 싶은 것도 맞긴 맞았다.

그의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력과 그로 인해 얻어 낸 성과…….

이건 진짜 멋지지 않나?

‘그렇다고 머리털까지 다 빠져 가며 하긴 싫은데…….’

아버지 우창윤도 탈모 때문에 고민이지만, 안대훈과 비교하면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풍성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안대훈은 대머리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홈마(홈페이지 운영자)잖아…….’

쉬는 날이면 대전차포를 연상케 하는 카메라를 들고서 수혁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더랬다.

심지어 따로 돈까지 써서 고용한 촬영 감독도 있다고 들었다.

태화 의료원쯤 되면 레지던트라 해도 다른 계열사 5, 6년 차 월급을 받기 때문에 절대적인 양이 적진 않은데, 그럼에도 쪼들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 인생도 살고 싶은데…… 통합진료센터 가면 그게 안 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 센터에 있는 사람들, 이거 순 미친놈들뿐이었다.

이현종도 남들 퇴직할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사랑을 이루지 않았나.

이수혁?

저 교수님이 누굴 만날 수나 있을까?

고개가 절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일단 만날 만한 뭔가가 있어야지.

병원 인테리어 수준으로 들러붙어 있는데, 뭔…….

“기왕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만나서 진단도 내린 거…… 당장 결과 나올 것도 아닌데 밥이나 먹지.”

하윤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대화는 얼마간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나갈 생각 없이 비좁은 곳에서 종알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방사선사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실을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은 이현종이었다.

-주변을 좀 살펴야지. 센터장이면 사람 다룰 줄도 알아야 해.

당연하게도 스스로 익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이기자 교수에게 한 소리 들어서 그랬다.

“아, 그럴까요?”

“그래. 카페로 가지. 거기 요새 브런치 메뉴 나오기 시작했는데, 맛이 괜찮더라고.”

“브런……치요?”

나머지 일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대화에 빠져 있어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뭐가 되었건 좁긴 좁아서 그랬다.

그 와중에 조태진이 시계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 브런치.”

“그러기엔 너무 아침 아닐까요? 카페 제가 알기로 8시에 열긴 하던데…… 보통 이런 메뉴는 시간이 좀.”

“어, 내가 가면 주던데?”

“아.”

조태진은 더 캐묻는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짓을 했을지 대강 짐작이 가서 그랬다.

‘수혁이 사 준답시고 갔겠지…….’

근데 시간이 안 됐다고 안 판다고 했을 테고…….

자식새끼 끔찍하게 위하는 노인네가 거기서 어떻게 나갔을까.

아마 카페 사장도 이쯤 되면 은혜를 저버리고 싶어졌을 터였다.

그 사람이 수년 전에 쓰러졌을 때 살려 준 게 이현종이긴 한데…….

이현종은 그럴 때 은혜 갚기를 종용하는 편이거든.

오늘도 그랬다.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다, 이현종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음식을 내왔다.

“맛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종은 수프와 빵 그리고 여러 샌드위치를 권했다.

맛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먹는 걸 하도 좋아해서 젊은 나이에 심근경생까지 왔던 사장 아닌가.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그만큼 요리를 맛있게 잘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이 된 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조태진은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말마따나 오늘 우연히 회진을 일찍 왔는데, 예상과는 달리 애들이 사고는커녕 홈런을 쳐서 기분도 좋고, 또 수혁이도 보게 되지 않았나.

“네?”

그때, 이현종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느낄 수 있었다.

이 양반이 뭔가 수작질을 부리려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러니까 따로 밥 먹자고 했던 모든 행동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다 잊고 있었는데…….

‘좋지 않은데……?’

뭘까.

뭐지?

“곧 4월이지.”

“네? 3월 2일인데요, 오늘?”

3월이 이제 막 됐는데 4월?

4월…….

대개의 사람들은 벚꽃놀이 등의 좋은 일만 떠올리겠지만, 학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4월은 꽤 바쁜 달이었다.

춘계 학회가 있으니까.

“통합진료학회도 춘계 학회를 열 생각이거든. 1회야, 1회.”

“저번에도 학회 열지 않았……었나요?”

“추계였지. 춘계는 처음이잖아. 모름지기 춘계가 진짜인 법이지. 가을엔 사람들이 적게 오잖아.”

“그…….”

그때 꽤나 성대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칠성 병원 원장님도 와서 코가 꿰였던 거로 기억하는뎁쇼……?

조태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필 수프를 입에 딱 넣자마자 대화가 시작되어서 더더욱 그랬다.

이게 다 노림수일 터였다.

허술해 보이지만, 본인이 원할 때는 얼마든지 치밀해질 수 있는 인간이 이현종이니까.

“성대하게 열어야지. 1회니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조태진 교수님이 혈액암 학회에서 이사도 맡으시고 경험이 많으시잖아.”

“네, 그렇……죠.”

“우리 학회에서도 이사 아니었나?”

“그건 그런데…….”

“무슨 이사였지?”

“그건 저도 잘 기억이.”

“우리가 이렇다니까. 진료 보는 건 최고인데 학회 일에는 젬병이야. 그래서 도움이 좀 필요한데.”

그제야 다른 이들 또한 이 오찬 모임이 왜 갑자기 결정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미친…….’

[이현종…… 역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위인이군요.]

이현종에게 수혁은 아직 애고, 또 괜히 이런 거 알려 주었다간 모자란 사회성으로 인해 사고라도 칠까 봐 숨기는 편이었다.

때문에 수혁은 화들짝 놀라 버렸다.

대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놀라운 솜씨…… 과연…… 대부님…….’

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둘이 이러고 있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여기서 이렇게 드리프트를 돈다고……?’

놀라고만 있을 틈도 없었다.

“그럼, 조 교수는 우리 일 좀 돕도록 해 줘. 장소는 호텔 인터콘티넨탈 빌려놨으니까 그냥 학회 대행사 컨택이랑 초록 10개만 받아 오면 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하기에는 너무 많지 않나요……?”

“혈액암 학회에서는 초록 20개도 받아오는 거로 아는데?”

“거긴……!”

학회 회원 수 자체가 몇 배는 차이 나지 않는가!

발끈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현종이 수혁에게 말해서 그랬다.

“너네 형이 한다고 하네. 감사합니다 해라.”

“아, 네. 감사합니다.”

“하아…….”

“왜 안 하려고? 수혁이 상처 주려고?”

“아니, 아닙니다…… 합니다…….”

“더 기쁘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네, 기쁘게 합니다. 하하하!”

그렇게 조태진은 마수에 떨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한테 일이 안 떨어진 건 다행인데…… 아니, 왜 우리를 쳐다보십니까, 교수님.’

이제 이현종은 레지던트들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샌드위치와 음식 등을 보고 있었다.

커피까지 쪽쪽 빨고 있었는데, 인당 적어도 12,000원 이상은 먹은 셈인데…….

툭.

툭-

뒤늦게 먹던 걸 내려놓아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하윤이, 지은이, 준수. 너네 3년 차지.”

그중에서도 연차가 높은 애들은 어김없이 지목되었다.

“네, 교수님.”

“네.”

“네…….”

“너네도 초록 하나씩만 내자. 하윤이는 오늘 이거 케이스로 해도 되고…… 어차피 전문의 시험 보려면 논문 내야 되잖아. 초록 내는 사람은 논문 작성까지 우리가 한큐에 도와준다. 꼭 우리한테 낸 초록 아니어도 돼. 원래 쓰던 거 막혔으면 그거 뚫어 줄 거니까. 나랑 수혁이가 논문 쓰는 기계인 건 알지?”

“어…… 정말요?”

“그래.”

똥 씹은 표정이 되려다 말았다.

초록 내고, 학회 발표까지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건 맞았다.

맞기는 한데…… 논문 작성에 비할 바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두 명에게 인상적인 초록을 내고, 연구 계획서까지 들이밀면……?’

더군다나 하윤은 애초에 센터에 들어가고 싶었던 상황.

이제 개꿀이었다.

“저, 교수님.”

그때, 조태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왜?”

“저도 논문 작성해 주십니까? 아니, 아니. 농담입니다. 농담…….”

그러곤 매섭게 노려보는 이현종의 눈빛에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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