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화 동창회 (1)
3월.
일반 회사원들이야 이미 1월에 송년회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끝났겠지만, 대학 병원에 재직하고 있는 이들은 반쯤은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이때가 오히려 모임이 꽃피는 시기였다.
“나? 나야 뭐…… 학회 가서 만나면 되지. 어차피 다들 원로라 뭐 시키지도 않나. 나 정도는 되어야 통합진료학회장 같은 거 하지. 그리고…… 솔직히 동창 놈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물론 이현종과 같은 이들은 학회 때 만나면 되기는 했다.
괜히 학회에서 알럼나이(동창회) 모임을 만들어 두고 했겠나.
심지어 어떤 학회는 골프 대회도 따로 열어 주기도 했다.
“난 골프 대회가 기대가 돼.”
“형 요새 잘 치지도 않잖아. 개망신당하는 거 아냐?”
“뭐가 되었건 경치 좋은데 공짜로 가서 돌면 그게 좋은 거지. 맛있는 것도 먹고. 대낮에 맥주 마시면서 잔디 밟으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아냐.”
“아…… 진상 부리러 가는구나…….”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칠 생각 없이 깽판만 칠 거면 또 골프장만큼 좋은 곳도 없긴 했다.
솔직히 말해서 운동이라고는 잘해 본 적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의사들이 골프에는 또 목숨을 거는 편이지 않나?
근데 옆에서 막 시비 걸고 놀리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날까.
하지만 상대가 이현종이라면?
싸움이 벌어질 수도 없었다.
‘아휴…….’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수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혁아, 너는 애들 좀 보니? 군의관이나 공보의 간 애들도 이제 2년 차라 시간 좀 날 텐데?”
“아…… 네. 근데 골프 치자고 해서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저녁때나 가려나.”
“아…… 골프.”
신현태는 저도 모르게 수혁의 다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유, 나 좀 봐. 이거 상처 될 텐데.’
허나 수혁은 딱히 걱정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김선웅 교수 오라고 해.”
이현종이었다.
“응? 갑자기?”
“그 새끼 수술하고 제대로 후속 조치가 안 되니까 얘가 골프를 못 치잖아. 그거 솔직히 왼 다리만 고정하면 되는 건데. 그거 수술이 어려워?”
쉬울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신경이 나간 건데 그걸 이만치라도 해낸 게 어마어마한 것 같은데……?
‘일단 신경이 나갔는데 근육량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한 게 대단한 거 아닌가……?’
신현태는 저도 모르게 다양한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이 새끼! 어딨어!”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
이현종이 벌써 소리를 마구 지르더니만 밖으로 나가 버렸거든.
아마 수술방 아니면 외래 또는 연구실로 갔을 텐데…….
‘수술방에 있기를 빈다, 김 교수.’
연구실에서 쉬고 있는 상황이라면 오늘 하루 일진이 꽤나 사납게 될 터였다.
하여간, 신현태는 따라나서진 않았다.
원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일이 너무 바쁘지 않나.
원래 원장단쯤 되면, 그러니까 경영진에 들어가면 밑에서는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은 법이었다.
심지어 태화 바이오 그룹에서 병원을 작정하고 키워 주고 있어서 신현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금 같은 시간이 나서 수혁이 보러 왔는데 왜 이현종을 따라가겠나.
“아, 근데 김성진 선생님은 오늘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수혁은 그런 신현태에게서 고개를 돌려 김성진을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김성진 얼굴이 꽤 어두워 보였다.
동창회 나간다는데 왜 저러나 하고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김성진은 커리어가 어마어마하게 꼬인 마당 아닌가.
애초에 안국태 밑으로 들어갈 때부터 동기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는데, 심지어 거기서 나와서 전혀 생뚱맞은 센터에, 그것도 적으로 통하는 태화로 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걱정입니다.”
“걱정은 무슨.”
신현태도 그런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이 비슷한 고통을 겪은 건 아니었다.
꿀 빤 세대라는 말을 들으면 열 받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세대보다는 교수 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나.
심지어 신현태는 나름 금수저 출신이다 보니 그걸로 인해 이득을 보진 못했더라도, 적어도 억울한 일을 겪어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이현종이 겪었으나 그는 공감 능력이 살짝 떨어지는 편이었고, 신현태는 그걸 옆에서 보며 어렵겠다는 느낌을 습득한 바 있었다.
“일단 이거 가져가.”
게다가 김성진은 어쩐지 마음이 좀 쓰이는 사람이었다.
일단 칠성을 버리고 태화로 왔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나?
심지어 인성으로 이현종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게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약간 나랑 닮았어.’
애초에 감염내과를 선택했었다는 것도 그랬다.
사실 감염병이라는 게…… 개발도상국의 질환이지 않나.
대한민국은 누가 뭐래도 선진국이었고, 심지어 그중에서도 감염병 대처에 유리한 인프라가 월등한 편이었다.
즉 뜰 일이 적은 과라는 얘기였는데…….
‘그냥 소신 지원을 한 거겠지.’
그게 자기한테 맞고, 또 누군가는 감염병 환자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터였다.
쥐뿔도 없는 사람이 사명감으로 뭔가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니, 이건…….”
도와주고 싶어진다, 이 말이었다.
김성진은 신현태가 건네준 카드를 보면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너무…….”
“괜찮아. 사장급으로 주시는데, 시간 없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 내가 누구 접대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가서 다 사 버려.”
“아…… 감사합니다.”
“너 개인카드라고 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돈 많아 보이면 뭐라고 못하더라고? 뒤에서야 말 좀 나올 텐데, 김 선생이 그런 거 신경 쓸 위치는 아니니까 괜찮지.”
“네, 정말 감사합니다.”
놀란 기색은 곧 감동이 되었다.
칠성에 있을 땐 이 비슷한 일조차 없지 않았나.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펠로우 시작할 때 안국태의 명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야만 했다.
-앞으로 회식비 모자라면 네가 그거로 채우는 거다. 대신 내가 너 교수 자리는 책임져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감언이설에 속아서 그랬다.
아니, 속은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안국태가 사람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그럼 오늘은 좀 일찍 가요. 어차피 특별한 환자도 없고. 미용실이라도 들렀다 가시면 좋을 거 같은데. 옷도 좀 사시고.”
이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사람이 누굴까.
특히 돈 때문에 고생했던 사람이 누굴까.
다름 아닌 이수혁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남는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절대적으로 돈이 많아서라기엔, 상대적으로 시간이 없어서 그렇긴 하지만, 하여간 마음만은 부자였다.
“아니, 교수님까지…… 게다가 이건 개인카드잖습니까. 이건 너무…….”
“에헤이. 받으세요. 제일 좋은 미용실 가셔서 머리하시고 옷도 새 옷으로 입고 가세요. 아마 아빠가 들었으면 우리 대통합진료센터 어쩌구 하면서 거지같이 하고 가면 죽인다고 했을걸요.”
“어…… 그건 맞지. 자기는 옷 진짜 못 입으면서…….”
“애초에 사복이 골프복밖에 없지 않아요?”
“어…… 같이 다니기엔 상당히 부끄러운 사람이지. 그나마 학회 때가 제일 나아. 정장 입으니까.”
김성진은 두 교수의 성화에, 그것도 보통 교수가 아니라 하나는 원장이고 다른 하나는 부센터장의 성화에, 카드 두 장을 받아 들고 조기 퇴근을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오후 회진을 3시에 서둘러 돌아 버린 덕이었다.
‘진짜 이런 센터가 있을까…….’
안국태 그 새끼는 자기는 안 오면서 환자들한테 불만 안 나오게 하라는 말만 해 대지 않았나.
때문에 혼자 레지던트들 데리고 밤이고 새벽이고 또 따로 계속 돌아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원까지 했는데 지정의, 그러니까 교수 얼굴 한번 못 보고 있는 환자들 불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근데 여기는 교수가 백업하겠다고 나가라고 했더랬다.
실력?
그건 얘기할 것도 없었다.
‘환자…… 오늘 수술이지?’
EGPA로 오인되어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만 하고 있던 환자는 제대로 된 진단이 되자마자 신경외과로 인계되었다.
약을 쓰면서 안에 박힌 기생충과 알,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뇌 병변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어느 정도의 후유증은 남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의 뇌는 또 적응을 잘하기 때문에 심하진 않을 터였다.
스테로이드를 쓰다가 안 돼서 본격적인 면역억제제까지 썼다면 예후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긴 한데…….
‘사고 칠 뻔한 것도 다 막아 주고.’
김성진은 충성심을 넘어 일정 부분 안대훈과 닮은 감정까지 느끼며 병원을 나섰다.
병원 밖으로 나왔는데 낮이라니.
당황스러웠다.
하여간, 그는 택시를 타고 교수들이 시킨 대로 했다.
일단 백화점에 가서 좋아 보이는 옷을 사고, 그걸로 갈아입고는 역시나 추천해 준 미용실로 가서 머리도 자르고 드라이도 했다.
‘사람이 좀 달라 보이긴 하네.’
방금 전까지는 거지 같더니, 지금은 그래도 강남 아파트에서 나온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돈을 쓰면 달라지는 거란 생각을 하면서, 동창회장으로 향했다.
김성진이 전역하고 안국태 밑에서 구른 게 5년이나 되지 않았나.
다른 말로 하면 펠로우 안 한 동기들은 전문의로 본격적으로 돈을 번 지 벌써 6년째란 얘기였다.
개중엔 개원해서 제법 성공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동창회 장소도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메리어트로 가 주세요.”
“네에.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안전벨트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십 명이 오는 자리를 호텔로 잡다니.
‘이걸 쏘면…… 수백만 원은 나오는 거 아닌가?’
김성진은 신현태 얼굴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긁을 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였다.
하여간 시간 맞춰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몇몇이 와 있었다.
벌써 교수로 임용받은 동기도 있고, 잘 나가는 원장이 된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김성진을 보면서 퍽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오…… 어떻게 일찍 왔어?”
“그러니까. 거기 안 빡세?”
“펠로우인데?”
“야야. 임상강사야.”
“그래? 거기서도 그래도 임상강사로 받아 줬구나? 의외네. 태화에서 칠성 사람을.”
딱히 호의적인 놀라움은 아니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늦게 왔으면 진짜 노예로 인식되었겠구나.’
뭘 모르는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칠성 애들이니 그럴 수도 있긴 했다.
태화, 그중에서도 제일 열심히 가르쳐 주는 두 교수의 밑에 있어 봐야 배운다는 게 뭔지도 알게 될 텐데.
‘흐유.’
김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다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었다.
안국태 밑에 있을 때는 정말 노예였다 보니 이런 모임 따위는 생각지도 못 했어서 그랬다.
주말엔 학회 아니면 안국태 따라 골프장 모셔다주고, 서브 캐디 노릇 하고…….
“아, 맞아. 통합진료센터라는 데가 근데…… 뭐 배울 만한 게 있긴 하냐? 전문성이 좀 떨어지는 거 아냐?”
여느 동창회가 그렇듯 술이 몇 순배 돌자, 잘 나가는 사람들부터 주변인들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말이 안부지, 듣기에 따라선 시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