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동창회 (2)
‘하아.’
김성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몰랐던 게 아니어서 그랬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사실 의사 집단이 어느 정도 이런 부분이 있지 않던가.
늘 정해진 트랙 위를 달리던 사람들이다 보니, 거기서 내려가거나 다른 길로 가거나 좀 느려지는 느낌이 있으면 백안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너 그래도 감염내과에서 몇 년 있었지?”
“4년이야. 작년에 진영이 전임받을 때…… 3년 차라고 들었어.”
그런 의미에서 김성진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학생 때의 김성진은 모범생이었던 데다가, 졸업 성적도 좋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2등 졸업이 내과라니.
당시로써도 파격이었다.
소위 인기과라고 하는 건 이리저리 돌기 마련이었다.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었다가, 정재영(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이었다가, 또는 영원불패의 정형외과라든지 하는 과들.
허나 내과나 산부인과 소아과 등의 주요 과들이 인기과에서 내려앉게 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난 사람 생명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거기에서 의미를 찾았어.
그렇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이런저런 자리에서 질문들을 받아야만 했다.
넌 대체 왜 내과에 가냐고.
솔직히 말해서 칠성 병원이 3대 메이저 병원으로 뽑히고 있긴 하지만, 내과는 아선이나 특히 태화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여간 당시만 해도 어렸던 김성진은 지금 생각해 보면 반발이 예상되는 답을 해 버렸더랬다.
생명 다루는 일.
고귀하고도 숭고한 일 아닌가.
-야, 누군 의사 아니냐?
-저만 잘났지.
-그럴 거면 흉부외과를 가든가.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고깝게 보던 몇몇의 입을 통해, 김성진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말 그대로 흩날리게 된 것은 김성진의 평소 모습이 워낙에 성실해서였기도 했거니와, 내과 의사가 된 후로 보여 준 모습 또한 생명 다루는 의사에 부합했기에 그랬다.
-야, 김성진 감염내과로 밀렸다던데?
-응……? 왜? 심장내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우리 병원 알잖아. 시키면 가야지. 감염내과가 특히 안국태 그 인간 때문에 펠로우 1년 이상 버티는 사람이 없으니까 매년 충원이니까.
-아…… 근데 어떻게 그 인간은 그런 인간인데 또 힘은 있지?
-위에…… 싸바싸바 장난 아니잖아. 게다가 줄타기 미쳐가지고……. 그 뒤만 따르면 차기 원장단 눈 밖에 날 일은 없다고 하더라.
그러다 김성진이 안국태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다시 뒷말이 슬금슬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단순히 흩날리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안국태 밑에 들어간 이상 파멸은 정해져 있기에 그랬다.
다들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3년, 4년이 되어 갈 때쯤에는 저 새끼 독하다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좋은 교수 밑에서 보내는 펠로우, 임상 강사 시절도 돌이켜 보면 지옥으로 표현되기 일쑤지 않나?
“그래, 4년이나 있었는데 거길 나오냐.”
“아깝지 않았어?”
“이제 커리어 다시 쌓는 거잖아.”
“문제는 그 커리어가…… 인정이 되나? 말은 도는 거 같은데, 딱히 그 비슷한 센터도 없던데, 다른 병원은. 일단 우리 병원은 없어. 내가 회의 들어가서 알아.”
근데 하필 안국태였다.
칠성 알럼나이, 즉 동창회에는 이유 불문하고 학계에 남은 사람들은 다 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외를 두는 게 안국태 밑에 있던 이들이었다.
너무 혹독하게 당했다는 걸 알기에 봐주는 것이었다.
애초에 시달리느라 지쳐서 학계에 남은 사람도 거의 없긴 했다.
그걸 4년을 견디다니.
대단하단 생각보단 미련하단 생각이 들었다.
“으음.”
하여간, 이제 모두가 김성진을 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답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들 여전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안부를 빙자한, 걱정을 빙자한 무례한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나야 뭐…… 만족하고 있어. 많이 배우고 있어.”
나름 꾸미고 왔음에도 이 지경이었다.
김성진은 수혁과 신현태 둘에게 감사를 표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별 소용은 없었다.
“배워?”
“하긴 케이스는 많겠지.”
“근데 무슨 시술 같은 걸 배울 수도 없는 거고…….”
“케이스 많이 접하는 건 응급실도 그렇지 않나……?”
“협진을 보는 거니까 응급실하고는 다르지. 근데 그게 나와서도 쓸모가 있나?”
일단 동기들의 생각이 틀어져 있어서 그랬다.
이들은 무조건 김성진이 해당 센터에 남지 못할 거라 여기고 있었다.
문제는 김성진도 얼마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나가게 될 거…… 제대로 배우고 나갈 생각인데…… 그런 얘기 하면 더 비웃게 생겼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어쩌면 하는 기대도 있어서 그랬다.
와서 보니 교수들이 진짜 좋은 사람들 아닌가.
“응…… 근데 뭐 진짜 천재들이셔서. 많이 배우고 있어.”
“어어. 야, 민관이 왔다.”
“뭐? 야아…… 진짜 때깔이 다르네.”
해서 억지웃음을 지어 가며 답을 하고 있으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게 관심이 훅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유민관.
4등 졸업자로, 김성진이 피부과가 아닌 다른 과를 택한 덕에 피부과로 들어가게 된 사람이었다.
그럼 고마워해야 할 거 같은데, 오히려 고까워하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미안, 미안. 나 가평에서 오느라. 아 길이 엄청 막히네.”
“가평? 거기는 왜 갔어?”
“아아. 골프 치고 왔어.”
“응? 오늘 수요일인데? 어떻게 골프를 쳐?”
“부원장님들이 수고해 주시는 날이지. 하하.”
“와…….”
하여간, 지금은 김성진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잔뜩 으스대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런 곳이 더없이 익숙한지 망설이는 구석이 하나 없었다.
‘옷도 좋아 보이긴 하네…….’
김성진이 명품이니 뭐니 하는 걸 알겠나.
그런 김성진이 보기에도 좋아 보인단 생각이 들 정도로 유민관의 행색은 으리으리했다.
우선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부터가 번쩍였는데, 적어도 몇백은 넘어 보였다.
물론 김성진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금통 시계면 몇천을 호가할 터였다.
“나 때문에 대화 끊긴 거 아니야?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유민관은 자연스레 중심에 앉고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본래 대학에 남은 이들은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이기에, 개원가에 있는 사람들을 동네 병원 사람 취급하는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유민관은 강남에서 거의 제일 잘 나가는 피부과 원장인 동시에 프랜차이즈 병원 대표 원장이었다.
이쯤 되면 의사가 아니라 아주 잘 나가는 사업가라고 봐야 하기에, 모두들 그 앞에 앉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니, 뭐 별 얘기 안 했는데.”
“하여간, 가평? 거기 골프장 뭐가 있지?”
실제로 떨어지는 콩고물이 좀 있기도 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유민관은 종종 큰 대학 병원에 남은, 그러니까 전임을 받았거나 혹은 그럴 것 같은 동기들을 데리고 회원제 골프장을 쏘곤 했다.
유민관 입장에서도 큰 병원 교수들을 알고 있으면 예약이니 뭐니 편해서 그랬다.
“아…… 아난티.”
“아난티? 거기…… 거기도 샀어?”
“어? 어어. 뭐…… 매주 치니까, 나는. 주말에는 예약 어렵다고 하던데 평일은 상관없다고 해서 샀지.”
“와…… 얼마냐, 그런 데는?”
“그냥 뭐. 얼마더라? 2억인가? 너네는 살 필요 없어. 내가 데리고 가면 되잖아. 원래 골프장 회원권은 사는 게 아냐. 회원권 있는 친구가 있으면 돼.”
회원권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 근교에 있는 회원제 골프장 회원권을 모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단하다, 진짜.”
“대단하기는, 운이 좋았지.”
“그게 운이냐?”
“아무튼…… 아, 성진이. 넌 어떻게 지내냐? 안국태 교수님 품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들었는데?”
그런 유민관의 비위를 맞추기 원하는 동기들이 꽤 있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마침 유민관이 오기 전에 김성진을 까고 있기도 했겠다, 관심이 다시 그쪽으로 쏠리자 다들 최선을 다해 김성진의 근황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정작 김성진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그랬다.
“아, 얘 태화 갔잖아.”
“통합진료센터라고, 최근에 생긴 센터 있는데…… 거기 갔어.”
“교수님 두 분인가? 작은 센터라던데.”
유민관도 사실 대강은 알고 있었다.
골프를 치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기 마련이라 그랬다.
동기들이 딱히 사업 상대도 아니니 뭔 얘기를 하겠나.
좋게 말하면 신변잡기고, 나쁘게 말하면 가십거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중엔 잘 안된 동기들 얘기도 당연히 있었고,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김성진이었다.
“본인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 않나? 어때?”
하여간 유민관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김성진은 아까와 달리 스스로 좀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암만 바깥에 억지로 관심을 끊었다 해도 유민관의 소식만큼은 어떻게든 들려와서 그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몇 번 같이 골프장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
따로 연습장에 나갈 정도로 시간도 없는 데다가, 같이 나간 안국태가 타수 늘어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바람에 보조 캐디 역할이나 했기에 더더욱 비참했더랬다.
-그래? 나갈 거면 너 정도로 돈 벌어야지. 진짜 성공했구나?
전형적인 강약약강인 안국태는 돈 많은 유민관을 제자가 아닌 대표로 대했다.
-야! 넌 채 하나도 못 고르냐?
문제는 그 자리에서 김성진은 노예로 취급했다는 점이었다.
“그…… 잘…… 지내지, 뭐.”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때 기억이 딱 나면서, 아찔해지는 느낌이 일었다.
겨우겨우 답을 하고 보니, 어느새 유민관은 다른 이들과 얘기 중이었다.
주로 골프, 주식, 채권 등 돈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김성진이 알기로 저 중에 돈 없는 애들도 있는데, 그냥 끼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괜히 왔나.’
그냥 병원에 남아서 형제님 아니, 안대훈과 공부나 더 할 걸 그랬나 싶은 순간, 유민관이 솔깃해지는 소리를 꺼냈다.
“아, 맞다. 우리 교수님들.”
와인도 이것저것 아는 척하면서 시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다.
붉어진 얼굴이 된 그는 짐짓 고민이라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병원에 외국인들도 많이 오잖아.”
일단 자랑으로 시작했다.
“요새는 아프리카 부자들도 오는데…… 주로는 출신이 아프리카고 지내는 건 두바이에서 지내는 사람들이거든?”
“어어. 근데?”
“야…… 대단하다.”
당연하게도 아부들이 뒤를 이었다.
“그중에 좀 골 아픈 환자가 하나 있어.”
“진상이야?”
“아니 아니, 진상이면 어차피 우린 대응팀이 있으니까 문제는 아니지. 그게 아니라 치료 자체는 안면 거상이랑 레이저 받으러 왔는데 발가락에 이상한 병변이 있어.”
“아, 그래?”
“그래서 오늘 여기 오는 김에 니들한테 물어보려고 했지.”
유민관은 김성진을 의도적으로 더 무시하는 만큼 사진을 이른바 교수 딱지 받은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었다.
물론 김성진도 고개를 최대한 틀어 사진을 봤다.
‘모르겠네?’
여기서 알면 일반 역전이란 생각을 하면서였는데, 허사였다.
괜찮았다.
‘핫라인…… 지금 시간이면 교수님은 병원에 계신다…….’
그는 대통합진료센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