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37화 (937/1,303)

937화 동창회 (4)

‘어차피 내가 너희 접대하고 하는 게…… 나중에 내 부탁 무시 못 하게 하려는 거밖에 더 있냐.’

유민관은 안타깝다는 눈으로 방금 자신의 말에 의해 입을 다물게 된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단순히 이 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옛날엔 교수들…… 끗발 날렸지.’

실제로 의대에서 교수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성공이지 않았나?

허나 요 몇 년 사이, 안 그래도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배금주의가 폭발해 버린 상황이었다.

세상 모든 가치가 돈에 의해 평가받고 있는 지금에 와서 교수?

당장 대학 병원에 있는 교수들 중 강남에 아파트 있는 레지던트를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나마 부탁할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데…… 얘네는 좀 다른 거 같긴 하고……?’

유민관은 우연히 학회에서 봤던 이현종을 떠올렸다.

대개의 교수가 그러하듯, 자기 과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그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냥 자기가 최고라는 믿음이 너무 잘 느껴졌다.

재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막상 자기 몸을 맡기게 되었을 때는 역시 이현종 같은 인간이 좋지 않겠나.

“지금. 이 타이밍이에요.”

유민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채 김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유민관이 조용히 해 보라는 말을 한 탓에 진짜로 조용해진 덕분도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김성진은 진짜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수혁이 말을 안 해 줘서 그랬다.

여기서 ‘나도 몰루’ 이러면 어떻게 될까.

‘시발…… 상상도 하기 싫다.’

김성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방금 수혁이 읊어 준 말을 그대로 옮겼다.

물론 말투도 싹 복사한 채였다.

“주사제를 써야지. 살리실산이나…… 스테로이드. 레티노이드도 겸하면 더할 나위 없을 거고…… 아인훔에 대한 치료법은 이미 정립된 지 오래인데, 왜 다들 처음 듣는 듯한 얼굴이야? 술이 과했나?”

뒤에는 살짝 덧붙여 봤다.

김성진이 아무리 착한 사람이고, 이 자리에 대한 기대는커녕 견뎌야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짜증 나는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지 않았겠나.

그걸 좀 풀기 위함이었다.

“굿. 잘하는데요? 그렇게 긁는 겁니다.”

말해 놓고 나서야 수혁도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후회했는데…….

이게 웬걸?

도리어 칭찬이 돌아왔다.

“이제 슬슬 이 자리에 성격 제일 더럽고 자존심만 센 애들이 덤벼들 텐데…… 걱정 마세요. 저 오늘 한가할 거 같으니까.”

그러곤 영문을 모르겠는 말도 들려왔다.

덤빈다고?

지금 막 환자를 해결해 준 참인데?

“와……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응. 여기서 더 늦었으면 수술해야 했을 텐데…… 다행히 그렇게 늦지는 않았어. 통증 조절하면서 국소 치료만 하면 돼. 근데 경험 없는 사람이 하면 판단이 잘 안 되니까, 이 치료에 대해서는 우리 센터에 보내도 돼.”

의문을 풀기도 전에, 수혁은 자연스레 조언을 더해 나갔다.

김성진이 수혁처럼 바루다와 몰래 대화하는 데 익숙해진 마당이었다면 별 어려움 없이 고민을 이어 나갔을 테지만, 그는 일반인이지 않나.

게다가 유민관은 거물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놈이다 보니, 맞상대하는 것만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 명함 있어?”

“있겠어?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나 지금 성진이랑 대화 중인데?”

“어…….”

유민관은 끼어드는 동기 하나를 또다시 침묵시키곤 김성진을 바라보았다.

명함이 없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이지 않나.

게다가 신생 센터이고.

아예 교수들 명함도 없을 수 있었다.

있다 한들 굳이 김성진 같은 서자에게 명함을 따로 파 줄까?

펠로우나 임상 강사는 어차피 있다가 갈 놈인데?

“명함…… 여기.”

허나 김성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명함을 내밀었다.

빳빳한 것이 새로 뽑은 모양인데, 꽤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았다.

재질이나 디자인 등이 근본이 넘쳤다.

-너네는 나가면 영업 사원이야. 통합진료센터 어필할 기회 있으면 구라 쳐서라도 어필하고 어려운 환자 물어와야 해. 봐서 알겠지만 사실 구라도 아니야. 여기 오면 무조건 진단이 된다고는 못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한다고 볼 수 있잖아. 그치? 안 그래?

이건 딱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것은 아니긴 했다.

이현종은 진짜로 영업 사원처럼 뛰길 원해서 이걸 만들어 주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하여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느낌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거기서 꽤 대우를 받는 모양이네……?’

태화도 칠성을 싫어하지만, 그것보다 칠성이 태화를 싫어하는 정도가 훨씬 심해서 더 그랬다.

태화야 원래부터 칠성 위에 있던 곳이지만 칠성은 이제 태화를 따라잡고 종래에는 역전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헌데 칠성 사람이 태화에 가서 대우를 잘 받고 있을 수도 있다니.

이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단지 편견이 아니라 실제로도 이 두 병원 사이를 오가던 이들이 병원에 남게 되기는커녕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던 것을 많이 보기도 했으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 명함 이쁘네. 이쪽으로 연락 주면 될까?”

“응. 따로 예약해도 되는데, 나한테 하면 빠르지.”

“좋네. 고마워. 내가 이거 꼭 은혜 갚을게.”

“응? 아니, 뭐…… 별로 어려운 케이스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의사가 환자 보는 게 당연하지.”

“너 진짜 여전하구나. 그래도 은혜는 갚을게. 하하.”

유민관은 역시 공부 잘하던 놈이라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껄껄 웃었다.

뭐가 되었건 로컬에 나와 있는 입장에서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좋지 않겠나.

그냥저냥 하는 작은 병원 원장이라면 몰라도 그는 사업가를 표방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대범하게 넘길 줄 알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이 그렇다고 작은 마음이 넓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뭐가 되었건 간에 앞에서는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 새끼 봐라……?’

연기력이 꽤 좋은 편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다 속아 넘어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민관이라는 물주가 퍽 대단한 물주긴 하지만, 공짜로 골프 치는 거 말고는 딱히 뭐가 없지 않나.

허나 이런 걸 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원내 정치를 통해 위로 올라가고픈 사람들이 그랬다.

‘접대 골프 치면 이게 얼마나 플러스인데…….’

이제는 대개 불법으로 막히고 있다지만, 교수 레벨에서 적극적으로 찾으면 또 찾을 수 있는 게 제약회사 접대 골프였다.

하지만 로컬 원장이 와서, 진또배기 접대 골프를 쳐 주는 건 귀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걸로 원내 정치 줄 꽉 잡고 올라가는 동기 입장에서 유민관의 태도 변화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신경이 쓰였다.

“아…… 역시 케이스 많이 보는 과라 다르네.”

그렇다고 대놓고 시비를 털지는 못했다.

적어도 처음처럼은 못 했다.

지금 까면 실력 있는 의사 앞에서 질투하는 거밖에 더 되나?

그게 병신 같아 보인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응? 아니, 뭐…… 공부 많이 시키니까. 교수님들도 워낙 똑똑하시고.”

해서 은근슬쩍 시비를 털었다.

“그래, 그렇구나. 근데 전문과 수련받는 거만큼 배울 수 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 적어도 감염내과 분야는 확실히…… 나 임상강사 노릇 할 때보다 더 심도 있게 배우고 있어.”

김성진에게는 별 타격이 없었다.

멘탈 흔들기?

이게?

‘너…… 이현종 교수님이랑 한번 입씨름해 봐라. 뒈진다, 인마.’

멘탈을 흔들 만한 말은 이현종만 했지만, 이수혁 교수님도 만만치 않지 않던가.

“그래……?”

“어, 그런데? 너 뭐 궁금한 거 있어? 케이스 막히는 거 있으면 줘 봐. 내가 바로 알려 줄게. 돌팔이가 환자 죽이는 거 진짜 안타깝거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새꺄. 넌 딱 목소리 하나만 들어도 돌팔이인데 어디 김성진 선생한테 시비냐. 일로 와. 센터로 와!”

별생각 없이 있다가 초반부 대화를 따라 읽은 김성진은 하아 하고는 동기를 바라보았다.

동기는 이미 칠성에서 임용받은 사람이었다.

유민관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사실상 제일 잘 나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니어 교수들 제외하면 앞에서 쓴소리는커녕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할 만한 말 따위도 못 들어 보지 않았을까?

“어…….”

그래서 그럴까.

어버버하고 있었다.

유민관을 비롯한 다른 동기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는 얼굴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비 털던 놈이 갑자기 반격에 당한 참 아닌가.

나만 아니면 돼 가 여기서 딱 드러나는 듯했다.

“너…… 너…….”

하여간 동기는 벼락 맞은 얼굴로 한참을 어버버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봐야 의미 있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뭐 해요? 쏘아붙여야지!”

그런 와중에도 수혁은 종알거리고 있었다.

-죽여라!

바루다도 폭주 중이었다.

이미 수혁의 가난했던 시절에 동화된 지 오래다 보니 그랬다.

다시 말하자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증기기관차 신세가 되어 있다 이 말이었다.

“케이스 생각이 안 나나? 의사가 되어 가지고, 어려운 케이스 정도는 해결은 못 해도 숙지는 하고 있어야지. 뭐 하는 거야?”

김성진은 이게 맞나 싶었지만.

교수가 까라는데 까야지 않나.

안국태처럼 자기한테 지랄하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그것도 미운 놈한테 지랄하는 거다 보니 별 불만도 생기지 않았다.

안국태랑 비교하는 거 자체가 실례인 교수들이었다.

“어…… 너, 잠깐만 기다려 봐. 너…… 이 씨.”

동기는 이제 분을 참지 못하고, 아까 꺼냈던 패드를 통해 병원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진료의 편의성 및 신속성을 위해 상급 병원들이 쓰는 전자의무기록차트는 외부에서 기록 확인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으니.

태화도 가능했다.

아선도 그랬고.

하여간, 그렇게 차트를 뒤지던 동기 녀석은 옳거니 하는 얼굴로 케이스 하나를 불러냈다.

‘이거…… 내가 오전에 회의에 올렸는데도 답이 안 나온 거야. 이수혁…… 그 괴물 같은 교수면 또 모르겠지만…….’

사실 동기가 너무 아랫것이라 모르는 것일 뿐, 칠성의 수뇌부는 이현종의 마수에 떨어진 지 오래지 않나?

그렇다 보니 어려운 케이스는 자연스레 수혁과 이현종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그쪽 실력은 잘 알았다.

다만, 김성진은 그 정도가 절대 못될 거라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케이스 어때.”

“27세 남자…… 설사를 주소로 내원?”

“그래. 소화기 환자인데. 소화기는 내과 중에서도 메이저잖아.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김성진은 답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놈 말이 맞기도 했지만, 지금 결정권은 그가 들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랬다.

“고. 이미 살짝 알겠는데요?”

수혁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수혁은 시원스레 고를 외쳤다.

‘대체 뭘까.’

감도 안 잡히는데 알겠다니.

김성진은 수혁을 다시금 존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려 줄게.”

시건방진 말을 해 대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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