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39화 (939/1,303)

939화 동창회 (6)

“가족성 지중해열. 처음 들어 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김성진은 아까 그 순간, 그러니까 모두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자기 입만 보고 있던 순간이 더 지속되기를 바랐지만.

“지금입니다.”

수혁의 오더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수혁을 잔뜩 따라한 말투로 진단명을 읊었다.

그제야 김성진은 수혁이 늘 보던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와…… 진짜 병신같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인성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꽤 실력 괜찮은 의사들이지 않나.

가족성 지중해열이라는 진단명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어떤 퍼즐이 딱 맞는 느낌이 들었을 터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성진이 그랬거든.

이름이야 지중해열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꼭 지중해 근방에서만 생기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유병률의 차이만 있을 뿐 전 세계적으로 심심치 않게 보고되는 질환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이 질환에 대한 연구가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여간 유명한 병이었다.

“어…… 가족성 지중해열……?”

“그래. 모든 진단 기준을 통해 봤을 때, 지금으로서는 크론보다는 가족성 지중해열이 훨씬 잘 들어맞지.”

“그…… 아니, 잠깐만.”

동기 교수는 정말이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화기내과 교수라서 몰랐다고 하기엔, 가족성 지중해열 또한 대표적인 소화기계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이라서 그랬다.

입안에 돋아난 혓바늘과 환자의 젊은 나이. 그리고 남성임을 고려해 차라리 베체트(만성 염증성 질환)를 의심했었는데…….

여기서 가족성 지중해열이 나온다고?

“왜? 아닌 거 같아?”

아닌 거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맞는 거 같아서 문제였다.

‘어떻게 거기서…… 삼촌 증상이랑 다리 증상을 물어볼 생각을 했지?’

기이한 건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뜬금없이 환자랑 통화할 수 있냐도 묻는 뻔뻔함도 수상했지만, 질문의 내용보다는 훨씬 평이한 수준이었다.

대뜸 환자에게 저것부터 물었다는 건…….

‘이미 머릿속에서 감별이 어느 정도 되었다는 건데……?’

크론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병률이 지금보다 떨어지던 때에는 실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소화기 내과 교수들 거의 전원이 나아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동기 교수 또한 이전 케이스를 보면서 많이 배웠다.

개중에는 사고라도 해도 좋을 만한 실수도 있었다.

실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냥 성의가 없는 수준의 치료도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크론인지 결핵인지 모르겠다고 두 약을 같이 쓰지?

전혀 다른 기전의 약이잖아?

‘얘네도 공부를 하긴 했을 텐데…… 그래도 이런다고?’

하여간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럼에도 뭐가 딱 보이진 않았다.

원래 진단이라는 것이 그랬다.

특히 어려운 질환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짙은 안개 속을 문진과 검진 그리고 여러 검사 등을 통해 헤집고 다니다가 한 줄기 빛이 비쳐 오기 시작하면 달려가는 것, 그게 진단 과정이었다.

다행한 것은 현대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검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시야가 훅훅 밝아진다는 건데, 그것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방향성이 아예 잘못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그렇게 나온 결과가 잘못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그랬다.

결국, 시간이 필요하단 얘기였다.

‘우리도 이것저것 싹 돌리면…… 음…… 두어 달 안에는 되었을 거야.’

방향성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더랬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겠지.

유전자 검사 따위를 해 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시간만 걸릴까?

환자 상태 또한 악화되었을 터였다.

실제로 크론이나 궤양성 대장염 등의 질환이 진짜 무서운 건, 그 질환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발생하는 여러 문제 때문이 컸다.

“뭐야. 왜 말을 안 해?”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김성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얼굴을 하고 있는 김성진이 보였다.

진짜 한 대 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졌잖아, 이미.

전문가가 전문 영역에서 졌다.

그것도 심지어 소화기내과 분과 교수가 소화기 증상을 보이는 환자 진단에서 밀렸다.

물론 여기서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입에 올릴 수는 있겠지만…….

‘추하지, 좀……?’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나머지 인원들을 승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기들이 진 게 아니니까 더 빠르고 냉정하게 반응하고 있는 거긴 할 텐데…….

그럼에도 질척거리는 건 좀 그랬다.

“그……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네.”

“일리만 있어? 내기할까?”

“내기? 아니, 케이스 가지고 내기까지 하는 건 좀…….”

“우리끼리 하는 내기인데 뭐. 가면 처방 내. MEFV 돌연변이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그…….”

나올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금 저 유전자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한 번 떠올리기 전까지는 죽어도 모르겠더니, 이름을 듣고 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말 지중해열이 맞다는 추론만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 성진이 대단한데?”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유민관이 끼어들었다.

그는 어느새 호의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내는 전혀 달랐다.

뭐가 되었건 교수는 아니지 않나.

전문의를 따고 벌써 7년이 흘렀는데, 뭣도 아닌 상황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말은 곧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도 그렇고, 모이지 못한 이들 중에도 그렇고, 잘 나가기보단 못 나가는 편에 속한단 뜻이었다.

‘거기 교수들이 진짜 대단한가 본데…… 한번 엮이고 싶은데?’

허나 이현종, 이수혁.

요새 진짜 의학계를 뒤흔들고 있지 않나?

로컬 피부과 원장인 그가 술자리에서나마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면 대단한 일이라 해도 좋았다.

물론 방금 전까지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고 있긴 했지만…….

“응? 대단은 무슨. 맨날 케이스 보고 해결하는 일을 하니까 되는 거지.”

“그게 결국 의사의 정의 아니야? 환자 보고 치료하는 거?”

“그건 그렇지. 대신, 아까 얘가 했던 말처럼 딱히 시술을 배우진 않아.”

소화기내과에선 내시경을 할 줄 알게 되지 않나.

특히 대장 내시경은 소중한 밥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걸 할 줄 아냐 모르냐에 따라 페이나 대우가 달라졌다.

“뭐, 그래도 시술 배우는 과보다 안 배우는 과가 더 많지 않나?”

유민관은 붙임성 있게, 빈말로밖에 안 느껴지는 김성진의 겸양을 치우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저희 운영 시간이 30분 남았습니다. 마지막 서브 필요하신 분은 지금 담아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텔 종업원답게 친절한 말투를 쓰면서였다.

그제야 김성진은 신현태가 준 카드가 떠올랐고, 조심스레 전화를 드렸다.

“나, 잠깐만.”

다들 병원 사람들이라 전화하러 사라지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응, 김 선생. 거기는 좀 어때?”

신현태도 밖인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원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네.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근데 웬일이야?”

“약속 장소가 호텔인데…… 아무리 봐도 밥 값이 300 이상 나올 것 같아서요. 이거 결제를 해도 될지…….”

“300?”

“네.”

신현태는 잠시 당황했다.

얘네 30대 후반 아닌가?

동창회…… 호프집이나 고깃집에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도 이제야 슬슬 호텔에서 따로 사모임 잡고 하는데……?

“너 뭔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딴 소리하면 꼰대다.”

“형이 진짜 꼰대거든……?”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 낸 이현종이 시비를 걸었다.

“좋은 데 갈 수도 있죠. 저희가 더 비싼 데 온 거 아니에요?”

수혁은 시비 아닌 시비를 털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긴 했다.

이현종, 수혁과의 모임은 늘 파인 다이닝에서 이루어졌고, 그 파인 다이닝의 수준이라는 것도 점차 높아져 가더니만 요새는 인당 25만 원 정도는 들게 되지 않았나.

“그래…… 하긴. 김 선생. 결제해. 나 원장이야.”

“앗…….”

“놀라지 말고. 해.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허락이 떨어지고, 김성진은 종업원을 불렀다.

자세히 보니 유민관이 벌써 카드를 집어 들고 있었다.

다른 동기들은 김성진의 일 따위는 잊었는지 그런 유민관을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고.

“여기는 내가 계산할게.”

다른 이들은 카드 꺼내 들 생각은커녕 주머니 뒤질 기색조차 내비치고 있지 않았기에, 유민관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그때를 노려, 김성진이 기습하듯이 다가와 찔렀다.

“응? 야, 여기 비싸. 호텔 뷔페야.”

유민관은 일단 말렸다.

완전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개업의 입장에서 대학 병원 교수들 연봉은 뻔히 알지 않나.

한 끼에 300?

진짜 큰돈일 터였다.

“아, 괜찮아. 나 법카 받아서.”

“법카……?”

“동창회 간다고 하니까 주시더라고.”

“그거 그냥 저기 감튀집 가는 줄 알고 주신 거 아니야?”

“아니야. 쏘라고 하셨어. 나 안 쏘면 혼나.”

“허.”

허나 김성진은 벌써 카드를 들이밀고 있었다.

흔한 법카가 아니라, 딱 봐도 좀 좋아 보이는 카드였다.

‘진짜 총애를 받나 보네?’

유민관의 눈이 반짝였다.

해서 결제 후 따라붙어 말을 붙였다.

“성진아.”

“응?”

“너네 교수님 내가 한번 모시고 싶은데…… 골프 좋아하시나?”

“음…… 한 분은 좋아하시는데, 다른 한 분은 좀.”

“안 치셔?”

“어, 다리가 좀 불편하셔서.”

“아아. 그럼 안 되지.”

유민관은 머리를 굴렸다.

김성진이 핑계를 대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주변머리가 있던 애는 아니니까.

괜찮았다.

골프가 아니더라도 다른 아이템 역시 많았으니까.

“그럼 술은 좋아하시나?”

“그건…… 잘 모르겠네? 안 마시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좋은 데도 가시고 그러려나?”

“좋은 데? 뭔 소리야?”

“음.”

문제는 얘가 아예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따로 한번 찾아 뵐까. 환자 경과 봐서 좋아지면 못 할 것도 없잖아? 태화가 국제 진료소에서도 나름 꽤 괜찮다고 들었는데, 거기 환자들 중에 피부과 환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나한테 몰아 줄 수도 있고……’

그럼에도 마음을 굳힌 유민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중에 찾아뵙든지 할게.”

“응? 안 그래도 되는데?”

“아, 좋은 거 들고 올게.”

“좋은 거……? 우리 교수님들은 환자만 좋아해.”

“뭔 소리야 그게. 인마. 말이 되냐?”

“아니, 진짜로 어려운 케이스 들고 오면 그것만 좋아해.”

“아, 알았어. 이 새끼 이거 재밌어졌네.”

유민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환자가 귀신같이 좋아진 것을 보고는 곧장 통합진료센터로 향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두 병이나 챙기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이현종은 역정을 냈다.

“감사 인사를 하러 오면서 빈손으로 와?”

“네?”

“케이스는 어딨어! 칠성 놈이라 그런가! 아, 성진이 너는 이제 태화 놈…… 아니, 태화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거짓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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