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미친놈들인가? (5)
수혁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처럼 신뢰감 그득한 얼굴이기도 했다.
물론 이현종이나 안대훈, 김성진과 같은 골수팬들에게는 그러한 면모조차 필요치 않았지만, 수혁을 전혀 모르거나 알기는 알아도 띄엄띄엄 알던 이들조차 마음이 동할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환자가 그랬다.
즉, 최원준 선수의 코치는 어느새 간절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되어 수혁을 마주하고 있었다.
“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수혁은 아니, 바루다는 알아차렸다.
무언가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골프를 다시 치기는 어려울 텐데요?]
‘응…… 골프 그거 돈 많이 드는 운동이라길래 그냥 설렁설렁하는 건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어제 정도에만 발견했어도 어느 정도 동조해 줄 수 있었을 터였다.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오늘 보지 않았나?
이미 오래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시절부터 골프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활용한 샷이 주된 무기로 작동하게 된, 꽤 격렬한 운동이 되고야 말았다.
“다시…… 칠 수 있을까요? 투어 프로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원준이 보조나 맞춰 줄 수 있으면 족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환자가 다시 칠 수 있겠냐는 말을 입에 담기는 했지만, 안에 담긴 바람은 달랐다.
그 저변에 적지 않은 체념과 포기가 묻어 있다는 것은 비록 마음 아픈 일이었으되, 수혁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가능성 없는 희망보다는 이게 나았으니까.
“아…… 보조를 얼마나 맞춰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둔중한 통증 정도로 경감되긴 할 겁니다. 물론, 약이 잘 맞는다는 전제하에서요. 약 쓰자마자 당장 좋아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어딥니까. 사실 진통제 먹고 자야 하는 날이 적지 않았거든요.”
“형! 그걸 여태 숨겼어?”
환자의 이어지는 말에 최원준이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환자는 그런 원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 골프, 이거 멘탈 싸움이라고.”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이거 불치병이야. 아니지. 이젠…… 아닌 거 같지만…… 하여간 방법이 없었다고.”
“거참…… 아. 교수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아니었으면 저희 형이 계속 저 모르게 아파할 뻔했습니다.”
최원준은 그런 형을, 그러니까 형 같은 존재가 된 코치를 바라보다가 이내 수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모여 있던 그의 팬들 또한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들이 있는 자리와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사이에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다.
다만 분위기는 읽을 수 있었다.
자리에 있는 이들 거의 모두가 회사 중역 또는 제일 꼭대기에 앉은 이들이다 보니,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남들 눈치를 어마어마하게 살펴 온 덕이었다.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 굴러들어온 복이잖아……?’
그 가운데 유민관도 있었다.
그는 목격했다.
주변에 있는 모두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코치가 말하는 투로 미루어 볼 때, 이 병을 고치려고 해외 센터도 간 듯한데 효과가 없었다지 않나?
그걸 그냥 이렇게 얼렁뚱땅 치료한 참이었다.
말이 되나 싶은 수준의 진료 능력이었다.
‘이건 잡아야지…… 이현종 교수님만 잡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이수혁 교수…… 이 사람은 뭘 좋아하지? 역시 돈인가?’
유민관의 눈알이 머리 굴러가는 속도에 맞춰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혁의 다리에 머물렀는데, 역시나 뭔가를 움직이는 데는 딱히 취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아픈데 움직이는 게 좋겠나?
물론 지팡이를 짚고 있을 뿐 걸어 다니는 데는 딱히 어려움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돈…… 근데 요새는 현찰을 그냥 드릴 수는 없는데……. 뭐,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유민관이 그렇게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무렵, 이현종의 매의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또 프락치 좀 동원해서 알아봤지.’
이현종 하면 비밀경찰 아니던가.
별로 쓸 일이 없을 때조차 써먹던 인간이었는데, 원장 이후로는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고 있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은 여러모로 수상쩍은 학회의 학회장이자 신생 센터의 장이었다.
그런 그가 프락치를 얼마나 더 동원하게 되었을까.
이제는 칠성 원장마저도 그의 눈과 귀가 된 지 오래였다.
-아…… 유민관. 소문이 아주 좋은 놈은 아닙니다만…… 돈 버는 데는 귀신이에요. 나름 강남 일대에서 뭐라더라? 매실? 이걸로 1타라던데요?
-매실? 병원에서 장아찌를 파나?
-아니, 센터장…… 아니, 회장님. 장아찌를…… 매실이라는 게 그…… 왜 있잖습니까. 늘어진 살 올려주고 하는 거요.
-왜 남의 얼굴을 매만지고 그래?
-하긴 하셔야겠네요. 저는 했거든요? 이게 기가 맥혀요.
-꺼져.
나름 정보를 물어다 주었음에도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이현종의 표현에 따르면 말 잘 듣는 개가 되어 있었다.
하여간, 유민관은 예전 이현종의 기준에서 보면 딱히 상종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돈은 잘 번다고 했지. 해외 센터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했고…… 병원에 가 본 놈들 말로는 동선이며 실장 교육이며 프로그램이며, 하여간 하나같이 국내 제일이라고 했고?’
오성흠이 어디서 매선(리프팅)을 했겠나.
거기서 하면 싸다는데, 당연히 거기서 했지.
그놈만 받은 게 아니라 이놈 저놈 많기도 많았다.
‘현태는 왜…… 대체 왜 한 걸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것도 아닌데…….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아직도 NEJM에 논문 하나 못 낸 거 아닐까?
이제 보니 전문의 시험도 만점이 아니고…….
‘아냐, 아니지.’
잠시 속으로 또 신현태를 갈궈 대던 이현종은 고개를 털레털레 털고는, 유민관을 탈탈 털 방도를 떠올렸다.
“아, 교수님. 하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통합진료센터…… 이거 동네방네 다 알려야겠습니다.”
유민관은 시커먼 속내도 모르고 껄껄 웃었다.
의사들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를 많이 했다 보니,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특히 공부만 많이 한 바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대학 병원 교수들 아니던가.
옆에서 조금만 우쭈쭈해 주면 진짜 그런 줄 알고 돈과 명예를 턱턱 빌려주는 그런…….
“아니, 뭐. 자네 병원이 최고지. 해외에 관심 있다며?”
“아…… 네. 사실 이따 초밥집 가서 말씀을 드릴까 말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내를 바로 드러냈다.
이현종은 예의 그 눈치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러나 막힌 혈관 뚫을 때의 그 눈빛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우리 해외 센터도 있다는 거 아나?”
“아…… 그렇습니까?”
이현종은 다 알고 있을 거면서 모른다고 시치미 툭 떼는 유민관을 보면서 속으로 후후 웃었다.
“그래, 두바이에도 있고, 싱가폴에도 있고. 빠르면 올해 여름이나 가을쯤 뉴욕 센터도 정식으로 오픈해.”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문제는 돈이야, 돈. 사실 태화에서 실험적으로 여는 거라 돈을 벌 필요는 없는데…… 아무리 통합진료센터를 비롯한 여러 센터에서 협진이나 이쪽으로 전원을 받아 치료한다고 해도, 현지 의료진 연봉이랑 체류 비용을 대는 것도 만만치가 않더라고.”
“아, 그렇죠. 아무래도…… 게다가 방금 말씀하신 곳들은 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곳들 아닙니까…….”
동시에 거기 사는 사람들이 부자기도 했다.
또 킹한민국 뷰티에 관심도 많았고.
싱가폴이나 두바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요새는 뉴욕에서도 K가 붙은 컨텐츠들이 고공 행진 중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와서 시술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제가 있다면, 원하는 사람은 훨씬 많은데 아무래도 시간과 여행 비용 등의 문제로 망설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 잠재 고객까지 다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러니까 현지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피부과 센터를 돌릴 수 있다면…….
‘미쳤다.’
벌써 돈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현종은 탐욕에 젖은 유민관을 보며 또 웃었다.
‘너 돈 많다며.’
수혁의 마수에 걸린 이상, 납치라는 말을 써도 좋을 터였다.
솔직히 말해 안대훈이나 김성진 모두 인생 전체가 납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그쪽이야 키워 줄 방향의 납치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민관은 아니었다.
‘너 납치된 거야.’
물론 이현종은 응급 질환을 주로 다루는 대가답게, 겉으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존 투자 비용도 만만치가 않아. 당연히 피부과 시술도 하긴 하는데…… 알잖아. 대학 병원 피부과는 미용 목적이 아니라 주로……. 게다가 우리 태화는 화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오히려 다 초짜야. 전에 회의 들어가니까 거기서 레이저 종류가 뭐가 있는지 공부하고 있더라고?”
“아…… 그럴 수 있죠. 미용은 오히려 로컬 원장님들한테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 거 같긴 한데…….”
“그래, 그래서 수배를 해 봤는데 태화 쪽은…… 아니, 우리는 개원을 왜 이렇게 못 해?”
“그…….”
원래 공부 잘하는 애들이 사업은 못 하는 법이었다.
때문에 유민관처럼 툭 튀는 애들이 있으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수 있었고.
“그래서 말인데.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어유, 얼마든지요.”
“센터 자문이라도 좀 해 줘. 투자……까지는 내가 말을 못 하겠고. 전에 들어 보니까 뭐 RS? 이런 얘기가 있는 거 같긴 하던데…… 에휴…… 내가 뭘 아나. 돈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무섭다니까.”
이현종의 너스레에 유민관의 눈이 탐욕에 더더욱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서, 옆에서 환자랑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던 수혁과 그런 수혁을 도깨비 보듯 하고 있던 후배도 유민관이 왜 저러나 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어…… 저는 투자도 가능합니다만?”
RS?
수익 쉐어 아닌가.
병원에서 진행하는 일이면…….
후려쳐 가지고 이거…….
‘마케팅팀 말대로구만. 슬슬 본격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데…….’
이현종도 후려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문제는 수혁이었다.
뭐 대나무같이 곧고 청렴해서 문제라는 건 아니었다.
지는 돈 쓸 생각도 없고 딱히 관심도 없으면서, 이런 일은 또 되게 좋아하지 않던가.
‘저 새끼 저거…… 환자 또 찾은 거 같은데.’
아까부터 환자랑 대화하다 말고 자꾸 응급실만 기웃거리는 걸 보니, 특이한 환자를 찾긴 찾은 모양이었다.
이럴 때 밖으로 데려나갈 수 있을까?
‘내 자식이지만…… 한두 바퀴만 돌아 버린 놈은 아니잖아…….’
지금 딱 봐도 눈알이 아예 돌아가 있었다.
일단 오늘 저녁은 여기에서 라면으로 때워야 할 거 같았다.
예약해 두었다는 초밥집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별수 있나.
‘근데 어떤 환자지?’
결국, 이현종도 미친놈이기는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