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화 오일장이에요? (2)
‘하아.’
고재현 교수는 자꾸 법과 원칙을 들먹이고 있는 이현종을 몰래 노려보았다.
세상에 태어나 나름대로 많은 일을 겪었다고 자부하는 몸이었다.
기실 제주도가 고향도 아닌데, 서울 태생에 태화 의료원 출신인 그가 여기까지 내려와 있다는 건 그만큼의 사연이 있었다는 방증 아니겠나.
허나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황당한 일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런 미친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뒷구멍으로 들어온 분. 뒤로 좀.”
“아…….”
정신을 차려 보니 또 비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정처 없이 떠돌다가 그만 선수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기, 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뒷구멍이라니!’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이게 골프의 세계에서는 꽤 큰 잘못이었다 보니 PGA 측 직원에게 한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이런 망할.’
더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병원에서 이따금 걸려 오는 전화였다.
“네. 또 왜요. 오늘 주말인 건 알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책임자가 고 교수님으로 되어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
고재현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봄의 제주 하늘은 더럽게 맑았다.
딱히 골프장에 오려고 나온 게 아니다 보니 선글라스도 없었고, 햇빛을 직빵으로 쐰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네네. 이것 참. 엄청난 일을 하셨어요?”
눈물이 주르륵 나오는 와중에도 이 양반이 비꼬는 건가 하는 찰나에, 말이 이어졌다.
“두 분이 워낙에 유명하신 분인 데다가…… 인터넷에 지금 어제자로 천재 의사의 기적 같은 진료? 뭐 이런 제목으로 뭐가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잠깐 봤는데 우리 병원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태화 의료원에 뭐 우리 병원이랑 비슷한 곳이 있는가 봅니다?”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확신범을 잡아 내는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직원 목소리가 되게 밝더라니, 그따위 일은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게 뻔했다.
“그 왜, 요새 제주도에 연예인분들 많이 내려오시지 않습니까?”
“아…… 네. 티비에서 봤습니다.”
제주도 사람 다 된 지 몇 년은 지난 마당이지만, 서울에 산다고 해서 서울 사는 그 많은 연예인들을 다 보고 사는 건 아니지 않나.
게다가 고재현 교수는 딱히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분들 중 일부가 온다더라고요. 이거 우리 병원 생긴 이래 거의 최대 이벤트가 될 거 같습니다. 두 명의의 심야 진료라니. 사람들 막 몰려오고요.”
“아니…… 왜…… 오시는 건데요?”
“아파서 오시는 분도 있고, 그냥 구경 오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막아야 하지 않아요? 구경은?”
“응급실 내에는 접근이 불가할 겁니다. 연예인 아니라 대통령도 함부로 못 들어오죠. 하지만 그 외의 공간은 막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가령 대기실이나 이런 데는요.”
“그…… 그건 그런데…….”
고재현 교수는 뜨악한 얼굴이 되어 골프 구경에 열중하고 있는 이현종과 그런 이현종을 신기한 생물 보듯 하고 있는 이수혁을 돌아보았다.
이렇게만 보면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냥 동네 한량처럼 보이는 둘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 년을 학문에 매진하다 보면 사람 인상이라는 게 좀 학구적으로 바뀌지 않던가.
멀리 갈 것 없이 본인도 예전 사진을 보다가 지금 사진을 보면 좀 놀랄 지경인데, 이 둘은 예외인지 좋게 말하면 천진해 보였다.
‘그렇게 대단해졌었나, 이 형이…… 하긴…… 괜히 월드 스타로 불리는 건 아니지.’
이런 식의 통화와 비난 그리고 사과가 몇 번 더 있고 나니 어느새 경기가 끝났다.
“어휴, 카트 따라 타서 거의 걷지도 않았는데 힘드네.”
“그러니까요. 오늘은 좀 쉴까요?”
둘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고재현은 부리나케 달려갔다가 황당한 말을 들었다.
이 새끼들이 이거, 현수막까지 붙여서 천지사방에 지랄을 쳐 놓고 뭐? 쉬어?
“그래. 쉬자고.”
이현종 너까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또 말이 이어졌다.
“네. 역시 머리를 좀 써야겠어요. 환자를 봐야죠.”
“응응, 그래. 원래 머리랑 신체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법이지. 6시간 동안 원 없이 쉬어 보자고.”
“네, 좋죠. 갈까요?”
“그래. 야, 넌 왜 그러고 서 있어. 뭐 귀신이라도 봤냐?”
아까 말도 충격이었는데, 이 말도 충격이었다.
‘쉬는 게…… 진료라고?’
약간 인생 전반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사는 의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고재현 또한 자신 정도면 꽤 좋은 의사고 또 의사가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근데 쉬는 게 진료일 정도로 적성에 잘 맞지는 않았다.
-저요? 제게는 골프가 삶이자 그 이유입니다. 골프 없는 제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요. 저는 쉴 때도 골프 생각만 합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동시에 최원준 선수가 아까 인터뷰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코치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 건지 뭔지, 오늘의 최원준은 최원준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세상에 모든 코스를 버디로 잡아낼 줄이야.
나인브릿지가 PGA 대회가 열리는 곳이니만큼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불가능한 업적을 세운 마당이었다.
‘둘이 좀 비슷하지 않나……? 나 다른 직원을 해야 했나?’
괴물들 사이에 낀 수재가 고뇌하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현종은 자기 후배를 꽤 좋아해서 그랬다.
공보의로 제주도에 갔다가 섬 규모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의료 인프라를 보고 눌러앉게 된 후부터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부 존경하고 있었다.
“야, 일단 가자고. 뭐 해? 너희 병원 갈 건데.”
때문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하여간 지금 이현종이 이렇게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현종 나름의…… 보은이랄까?
딱히 직접 신세 진 것은 없지만, 중증 명의병에 걸린 탓에 세상 모든 환자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그이지 않나.
‘의사도 별로 없는데 사명감만 가지고 환자를 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서울에 남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아무래도 서울 큰 병원에 남는 것에 비해 제주대학교 병원에 남는다는 건, 의사 개인에게 희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볼 수 있는 케이스가 한정되기에 그러했다.
그러한 미안함을, 그리고 아쉬움을 보답하기 위해 이현종은 오늘 이 한 몸 불사를 예정이었다.
“어…… 네네. 가, 가야죠.”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고재현은 경황없는 얼굴이 되어 앞으로 나섰다.
아마 이현종의 마음을 얼마간 알았다 해도 반응이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세상 어떤 놈이 이딴 식으로 보은을 한단 말인가.
“야, 여기 원래 이렇게 막히냐……? 무슨 차가 이렇게 많아……?”
“아뇨. 이럴 리가 없는데요? 평일 출퇴근 시간도 아니고…… 아, 설마.”
그렇게 출발한 차량은 어느새 제주대학교 병원 인근에 도착했다.
굳이 인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도착까지 대략 3킬로미터 정도를 남겨 놓고 주차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랬다.
“오는 거 맞소?”
바깥도 난리가 나긴 했지만, 병원 안쪽도 난리였다.
도지사를 비롯해서 힘이 있거나 진짜 급하고 절박한 환자들은 시간을 맞춰 온 게 아니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랬다.
“그…… 올 겁니다.”
“전화해 보세요.”
“제가 오늘 전화만 거의 열 통 넘게 했습니다.”
“지금 10분 정도 남았는데 안 오잖아요.”
도지사의 푸시를 받은 직원은 네네 하고 나서는 전화기를 들었다.
“네?”
“어디쯤이세요? 여기 지금 난리 났습니다. 환자 거의 수백 명은 왔어요.”
“네……? 수백 명이요? 6시간 본다고 했는데.”
“그…… 아휴. 아무튼, 어디세요.”
“3킬로 남았는데 도통 차가 안 빠져서…….”
“3킬로? 어느 쪽이요?”
“제주시 방면이요. 왜요?”
“제가…… 앰뷸런스 보내겠습니다.”
“그, 그래도 되나?”
“환자 보려고 의사 부르는 목적으로 쏘는 건데 되겠죠, 그럼.”
3킬로미터란 말에 직원은 망설임 없이 결론을 내렸다.
절대로 제시간에 못 온다고.
지금 진짜, 주차장도 난리 아닌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오징어 사세요, 땅콩 있어요.”
게다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주변 섬과 도서 지역을 도는 만물상들마저 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마당에 3킬로?
그건 거의 영겁에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좋았다.
왜애앵!
해서 곧장 앰뷸런스부터 출동시켰고, 덕분에 이현종과 수혁 그리고 고재현은 차를 갓길에 버려 두다시피 한 채 병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부터 봐 주시오!”
병원 밖, 그러니까 주차장이 있는 곳은 혼돈 그 자체였으나 안쪽은 놀랍게도 나름의 질서가 잡혀 있었다.
“줄을 서십시오, 줄을. 번호표도 아까 나눠 드렸잖습니까.”
중후한 목소리, 인자한 미소, 그러나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희한한 인상의 소유자인 안대훈 덕분이었다.
그는 김성진과 더불어 제주대학교까지 마수를 뻗쳤던 수혁교의 위세를 이용해 레지던트와 의대생을 동원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심지어 수혁과 다니면서 이런 식의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쌓여 있었다.
“오…….”
“역시 대훈이.”
“이게 칭찬할 일인가요?”
“그럼 뭘 칭찬해.”
“우리 대훈이가 최고죠.”
“그…… 아무튼, 그럼 진료 보시는 겁니까?”
차례로 늘어선 환자를 보는 건 나름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끝에서 고재현이 이렇게 묻자 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근데 교수님들.”
그런 둘에게, 오늘 종일 전화만 받아야 했던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도지사님 어머님부터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지랄. 순서대로 봐.”
이현종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급히 봐 달라는 말.
남들은 바보라서 줄 서서 기다리나?
도지사?
도지사가 아니라 왕도 안 될 일이었다.
“저분이에요?”
허나 그런 이현종과는 달리 수혁은 관심을 보였다.
왜냐?
바루다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저 할머니.]
‘어떻게 이상한데?’
[적어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바다와 깊이 관련된 증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심각할 수 있을까?’
[나이만 유추해 봐도 가벼운 상세로 보이진 않는군요.]
‘음. 지금 앞에 선 분은…….’
[진단이 안 되었을 뿐 증상은 심해 보이지 않아요. 답답하겠지만 응급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바루다의 논리정연한 말에 넘어간 수혁은 할머니 한 분을 가리켰고,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죠.”
“어…… 수혁이가 본다면 나도 찬성.”
이현종은 이유 없이 찬성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첫 번째 환자는 도지사의 어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