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화 에헤이 그런 걸 (1)
“이리 오시죠.”
“하하, 역시. 서울서 오신 분들이라 그런가 뭘 좀 아시는구만.”
수혁의 부름에 도지사는 껄껄 웃었다.
원내대표와도 알고 지내는, 심지어 같은 한산이씨라 단순 지인을 넘어선 친분이 있는 둘에게, 도지사라는 지위가 아주 막 특별하게 다가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딱히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정치와 접점이 없고 그쪽으론 야망도 없는 이에게 정치인이란 존재가 신기함 외에 무엇을 더 주겠나.
같은 도시 사람도 아니고.
허나 도지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발생한 오해로 인해 상당히 기꺼워하고 있었다.
“당연히 뭘 좀 알지. 근데 서울에서 와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우리가 천재라서 그런 거예요.”
물론 이현종도 기꺼워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사람도 역시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의 위명을 들어 봤구나 싶어서였다.
‘역시’ 운운하는 게 십중팔구 그렇지 않겠나?
하여간 서로 간의 작은 오해 속에서 수혁이 나섰다.
“통증이 있으신 것 같은데…… 어디에 쓸리거나 다치셨나요?”
언제나 그러하듯 수혁은 질문을 던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환자의 이모저모를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얼굴, 손이 엄청나게 까맣습니다. 손목에 줄이 간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
‘긴옷을 입고 햇빛에 자꾸 노출이 된다는 뜻이겠지.’
[다른 곳이면 모르겠지만, 제주도라면 역시 해녀일까요?]
‘도지사의 어머니가 해녀라……?’
[데이터 베이스를 뒤져보니, 얼마 전 수혁이 지나가다 본 뉴스에 제주도지사가 선서에 이를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하.’
그래, 바루다에게 듣고 나니 더더욱 기억이 분명해졌다.
제주도 감성에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고 들었다.
확실히 제주도의 자식이지 않나?
덕분에 초선인데도, 심지어 나이도 어린데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 차로 이겼던 것 같았다.
“그게…… 우리는 쓸릴…… 아…….”
아무튼, 상대가 해녀라는 걸 기억하며 물었고 답이 돌아왔다.
“음?”
아들은 수혁의 갸웃거리는 몸짓에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아들마저 알아채질 못할 만큼의 미세한 증상이 있었다.
‘이거…… 약간 어눌하지 않나?’
[아주 약간입니다. 다만 평소 발성이 어떤지 알 수 없기에 속단은 이릅니다.]
아니, 증상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했다.
사실 정확한 발음과 듣기 좋은 발성이라는 건 대단히 상대적인 얘기 아니던가.
젊고 건강한 성인도 훈련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어눌해질 수 있었다.
특히 사회적인 관계가 주로 친밀한 이들하고만 이루어진다거나, 또는 딱히 상대방에게 정확한 의사 전달이 필요치 않은 이들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할머니의 발음은 미세한 변화일 뿐이었다.
“아드님?”
“응? 아, 나 말인가?”
“아드님 아니에요?”
“어…… 맞습니다. 맞지, 아들. 하하.”
이제 갓 50이 되었을까 말까 한, 정말이지 세대교체 명분에 딱 부합했던 젊은 도지사는 이미 도지사 노릇만 수년은 한 사람처럼 호칭도 도지사만 기억하게 된 모양이었다.
물론 진료에 있어 보호자에 대한 평가는 불필요한 것이었고, 수혁은 그저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좀 어눌해지거나 하시진 않았습니까?”
“응……? 우리 어머님은 다리가 아파서 온 건데요?”
“해녀……시죠?”
“네. 그렇습니다. 아휴…… 말도 마십쇼. 저를 정말 어렵게…… 제주의 방식으로 키워 내신 훌륭한 분입니다.”
보호자는 여전히 어머니의 안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사람 모인 김에 정치적 어필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수혁은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그는 상대의 태도나 지위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뭐라는 거예요?]
‘몰라. 일단 묻고 싶은 거나 묻자.’
물론 속으로는 좀 얘기가 다른데…….
바루다와의 토의는 벌써 수년 동안 이루어져 온 일이다 보니, 겉으로는 전혀 표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님 발음은 어떻습니까. 주로 대화할 때 쓰던 말을 발음해 보시라고 하면 비교가 쉬워요.”
“어…… 네.”
그런 수혁의 얼굴은 전혀 만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비록 도지사에 비하면 아직 어리고 지위도 낮지만, 그가 쌓아 올린 전문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은 도지사가 아니라 대통령도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 아니던가.
“엄마. 배지근 해 봐.”
“배지근.”
“어……? 이번에 자리가 배지근해 해 봐.”
“이번에 자리가 배지근해.”
“어……?”
배지근이 무슨 뜻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육지 사람들은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서 오히려 이 대화에서만큼은, 수혁이나 바루다가 무언가 캐치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다만 아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진……짜 좀 이상하네……? 엄마가 배지근을 이렇게 발음하던가……?”
“어눌한 느낌이에요?”
“어…… 네. 약간.”
“그렇군.”
하여간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환자는 해녀고, 어제도 배에 들어갔으며, 나오고 나서 사타구니 근처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동시에 아주 약간의 어눌한 발음이 있다.
수혁이 이렇게 증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도지사가 말을 이었다.
“근데, 이게 다리는 어제부터 그런 거라…… 사실 여기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치료? 감압병에 대해 치료를 받은 겁니까?”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데…… 하여간 고압 챔버에 들어갔어요.”
“고압 챔버라…… 그거 서울에서는 태화에 밖에 없는 건데…… 여기도 있는 모양이죠?”
“아…… 제주도는 워낙에 다이버들이 많아서 꽤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여간, 다리에 대해서는 치료를 받았다…… 이 말씀이시군요?”
“네네.”
말이야 다리에 대한 치료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감압병에 대한 치료를 받은 셈이었다.
그 말은 곧 원인이 감압병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쯤 호전되었어야 한다는 말인데…….
“아드님. 혹시 어머님께서 다리를 원래 저십니까?”
“네? 아뇨? 해녀라는 직업이 만만한 게 아닙니다. 엄청 고돼서 아픈 몸으론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걸 왜…….”
“지금 다리를 저시잖아요.”
“어……?”
그제야 보호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환자는 원래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좀 갑갑한지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시도는 시도로 끝나고야 말았다.
어느 한쪽만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양쪽의 힘이 쭉 빠져 버려서 그랬다.
억세게 살아온 세월 동안 단련된 팔뚝이 아니었다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 했을 정도로, 다리 쪽은 힘이 아예 빠져 있었다.
“어……? 엄마?”
“내가…… 내가 이거 왜 이러냐……?”
본인도 당황할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는지, 원래도 그리 좋지 못했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어눌하게 느껴지는 발음은…… 정도로 미루어 볼 땐 전신 증상에 의한 것 같은데.’
[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딱히 머리 쪽 문제라기보다는…… 원래 사람은 전신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 법이죠.]
그런 환자를 보면서 수혁과 바루다는 나름의 추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보다 급한 건 다리야. 저건 머리와 연관이 있을까?’
[양쪽 다리입니다. 그 말은 곧 척수 질환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죠. 모르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니지, 인마. 그냥 물어본 거야. 추론을 이어 나가는 거야, 인마.’
[뭐…… 믿겠습니다. 아무튼, 척수 질환일 가능성이 큽니다. 확인하죠.]
‘좋아.’
수혁과 바루다의 수준은 이제 높다는 말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의 경지에 다다라 있기는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는 역시나 한계가 있는 법.
수혁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동시에 환자에게 다가갔다.
“할머님. 몇 가지…… 검사를 좀 해 보려고 해요. 괜찮아요?”
“그……근데, 너무 아픈데…….”
“검사하고 바로 진통제 바로 드리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이게…… 통증도 사실 중요한 단서가 되는지라…….”
“그, 그래…… 하는 수 없지게…….”
마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증까지.
보이는 단서 및 들리는 단서 모두를 실시간으로 저장하면서, 수혁은 빠르게 환자의 몸을 훑어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 얼굴, 경부, 흉부 등에는 딱히 이상이 없었다.
허나 복부를 촉진했을 때, 이상 소견이 감지되었다.
[빵빵하게 부푼 배…… 이건 방광입니다.]
‘소변을 못 봤군…….’
[이 또한 통증의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더 두면 신장이 망가질 수도 있어요. 보아하니, 어제 이곳에서 이루어진 진료에서는 단지 가벼운 감압병에 대한 고압산소 치료가 전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 말은 벌써 적어도 30시간 이상 방치되었다는 말이지. 어쩌면…… 벌써 급성 신장 병증이 나타나고 있을 수도 있겠어.’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을 향해 외쳤다.
“넬라톤! 이분 소변도 못 보고 계십니다! 할머님, 그렇죠?”
“어…… 어제부터. 안 그래도 여기가…….”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선 이거부터 빼고…….”
넬라톤, 즉 간이 소변줄은 간호사가 맡아서 꽂았다.
그러자 1리터에 가까운 소변이 콸콸 나왔다.
의료진이 보기에야 객관적으로도 방광의 정상적인 용적을 넘어가는 양이니만큼 많아 보였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소변은 의학에 문외한인 이들이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아니, 우리 어머님…….”
그제야 도지사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듯했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그냥…… 도지사 하면서도 물질 멈추지 않는 엄마 이용해서 입지나 올리려고 한 건데…….’
잘됐다고 하기는 좀 그래도, 하여간, 공교로운 시기에 아프게 되지 않았나.
감압병이 의심된다는 말에 좀 놀라긴 했지만 이제 어머니 나이도 나이니만큼 슬슬 그만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헌데…….
‘우리 엄마…… 이거 진짜 잘못되는 거 아니야?’
홀어머니.
아빠 없이 홀로 험한 물질을 하면서 자식은 서울로 유학까지 보낸 이였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얼굴과 몸에는 세월의 영향을 아득히 넘어가는 깊은 주름이 켜켜이 패여 있었다.
도지사는 이제 슬슬 도지사에서 아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다는 데 드러나기 시작했던 뿌듯함이 간절함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 됐습니다, 교수님.”
간호사가 넬라톤으로 제거한 소변을 보여 주었다.
양을 잰 수혁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좋지 못했다.
‘하반신 마비에 더해…… 소변까지. 이건 진짜 좋지 않은데……?’
[일단 신경 검사를 해 보죠.]
‘그래.’
수혁은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찬 후, 넬라톤 시술을 위해 쳐 두었던 커튼을 치우고 다시 환자에게 향했다.
어느새 얼굴엔 그늘 대신 친절해 보이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누가 뭐래도 이제 베테랑이 되지 않았나?
‘우리 아들…… 잘하네.’
이현종마저 뿌듯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경학적 검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