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59화 (959/1,303)

959화 조태진 (3)

리슨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랩 비슷한 노티가 이어졌다.

‘호오…….’

[단단하진 않지만…….]

‘과감하게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확실히 태화가 만만한 병원은 아니에요. 구성원들 중에 처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혁은 지금 골프복을 입고 골프장에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데다가 최원준 선수의 은인이라는 것을 이유로 카트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하여간 어수선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괜찮았다.

언제 어디고 환자 얘기만 들으면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으니까.

‘CRP의 일관된 증가…… 이게 말로 들으니까 잡아 내는 거지, 보통은 생각도 못 해. 단순히 태화의 일원이라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럴까요?]

‘그래. 게다가 원인에 대한 탐구도 보통이 아니야. 그래, 이건……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한데, 거의 내 수준에 근접해.’

[오. 정말 시건방진…….]

‘아니라고 생각하냐?’

[아뇨. 맞긴 맞죠. 현실적으로 지금의 수혁과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의사는 없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수혁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바루다한테 무식하니 뭐니 온갖 개무시를 듣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인정을 받고 있지 않나.

감개무량했다.

“그래서 말이야. 내 생각에는 기저에 자궁경부암이 있고…… 면역 체계 교란이 일어난 결과로 일종의 자가 면역 질환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게 시작이 아닐까 싶은데. 원래 암 주변으로 염증 조직 생기는 거야 흔한 일이고.”

“네, 제가 듣기에도 그래요. 아닐 가능성도 있긴 하겠지만…… 검사해 볼 만한 근거는 충분히 될 것 같은데요?”

“오. 그럼 나 맞은 거지?”

“네? 아, 네.”

“흐하하하하.”

“저기 형. 지금 응급실 아니에요?”

“아, 어. 부적절했다, 방금.”

수혁의 마음이야 어떻건 간에 조태진도 기분이 좋았다.

응급실에서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흐하하하 웃을 정도로 그랬다.

지나가는 이들 중 몇몇이 머리 옆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기까지 했다.

‘뭐, 새끼들아. 뭐! 내가 환자 살렸다, 인마. 그리고 수혁이도 내가 맞대.’

별 상관은 없었다.

말은 부적절하네 어쩌네 하고 있었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환자를 생각해도 다행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좀 더 허비했다면, 환자는 죽었을 터였다.

‘암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사실 이미 자궁 절제술에 항암 방사선 치료까지는 해야 하는 상황이야.’

자궁경부 주변으로의 직접적인 침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주변으로 번져 버린 임파선도 걱정이었다.

전이일 터였다.

반응선 임파선염으로도 보였지만, 만약 암이라면 전이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자 이제 와서는 암이 아니란 생각을 하는 게 말이 안 돼 보였다.

“좋아, 그럼 나 설명하러 갈게.”

“네, 형. 대단하시네요. 거기서 한 사람 살리셨네.”

“흐하하하.”

“응급실…….”

“사람 살렸으면 방정 좀 떨어도 돼.”

조태진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전화를 끊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검사는 끝난 지 오래였고, 응급실로 돌아온 것도 한참 전이어서 환자는 아까 있던 자리로 옮겨 가 있었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옆에는 어느새 보호자도 와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빈 눈으로 병원 어딘가를 바라보던 남편은 조태진이 다가오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십니까, 진료를 봤던 조태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환자도 지쳐 보였지만, 보호자도 만만치 않게 지쳐 있는 듯했다.

하긴, 기약 없는 치료라는 것이 그러했다.

치료를 했는데도 고생만 하고 반응이 없다면 본인도 힘들겠지만, 옆에 있던 가족도 힘든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조태진은 그가 구원해 주는 대상이 단지 환자만이 아닐 거란 생각에,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이번에는 흐하하하 웃진 않았다.

그 또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그랬다.

얼굴에 맞게 진중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 여보. 일어나 봐.”

집중해서 듣고 있던 보호자는 급기야 환자를 깨웠다.

조태진이 입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제가…… 암이……라고요?”

암.

현대인에게 있어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이 어떠한가.

섬뜩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조태진에게조차 그러했다.

현업에 종사하는 이에게 암에 대해 대체 뭘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야 할 수 있는 말이 꽤 있긴 했지만, 여전히 난치성 질환이라는 건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아직 암이 확진된 것은 아닙니다만…… 정황상 류마티스 질환보다는 암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허나 조태진은 암도 다 같은 암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진단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가 봤을 때 환자는 아직 수술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서 치료를 진행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는 환자의 앙상한 팔뚝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칫하면 희망을 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금 서두르는 느낌마저 일었다.

“다행히 수술이 가능합니다. 이대로 더 있으셨으면 몰랐겠지만…… 아시죠? 요새는 수술로 절제할 수만 있다면 완치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

“근데 제 아내는 아픈 게…… 증상인데요? 암은 아프지 않은 거 아니에요?”

“아.”

보호자의 말에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태진은 잠시 탄식했다.

티는 내지 않았다.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라 그랬다.

확실히 암 중엔 증상이 아주 뒤늦게 나타나는 놈들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암은 통증을 일으키지 않으니, 아프면 암이 아니란 말은 너무 위험했다.

‘암성통증이라는 말이 대체 왜 있겠습니까, 아버님.’

사실 암으로 인한 통증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통증이기도 하지 않나.

초기 암이라면야 얘기가 다르겠지만, 암은 면역과 연관되어 있는 질환이다 보니 지금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을 수 있었다.

당장 조태진만 해도 류마티스 질환과 오인되어 진단이 늦어졌던 여러 암종을 벌써 몇 번이나 보아온 경험이 있었다.

“이건 암 때문에 우리 몸 안의 일정 항체들과 염증 인자들이 증가하면서 생긴 증상이라서요. 일단 환자분이 원래 이렇게까지 마르진 않았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래요. 날씬한 편이긴 했는데 이렇게 마르진 않았습니다. 근데 워낙에 고생을 해서요. 얼마나 아플지…….”

“아파서 살이 빠지는 거긴 한데…… 반드시 통증 때문에만 이렇게 되는 건 아니에요. 질환 자체가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겁니다. 암이 대표적이죠.”

“아…… 그럼 정말로…….”

“네. 아마 그쪽 병원에서도 긴가민가하다는 얘기를 했을 것 같은데요.”

“좀 이상하다고는 했습니다. 별종이라고. 근데 원래 류마티스? 그게 그럴 수 있다고…….”

그래, 이 말도 맞았다.

오죽하면 류마티스 질환을 또 다른 말로 괴질이라고 하겠나.

진짜 별 희한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았고, 이렇게나 발달한 현대 의학으로도 제대로 분류되지 않을 만큼 기이한 소견을 보이는 질환들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무슨 무슨 신드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신생 질환들이 매년 툭툭 튀어나오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질이라 해도 파고 들어가 보면 전혀 엉뚱한 원인이 있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었다.

수혁도 그러지 않았나?

-어쩌면 괴질이라는 건 없을지도 몰라요.

보다 발전을 거듭하고 나면 괴이한 질환이라는 말은 없어질 수도 있겠다고.

조태진은 지금 만큼은 그 한 자락 끝에 걸쳐 서 있는 느낌이 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별종이라니. 딱히 과학적인 언어는 아니죠.”

“하긴…… 그렇게 듣고 나니까 확실히…….”

“검사를 몇 개만 더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입원 준비를 해 오셨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제 앞으로 입원해서 검사를 진행해 보는 것도 좋고요. 어차피 통합진료센터 진료는 의뢰하면 바로 이루어지는데…… 방금 통화한 결과, 제 뜻대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일견 백척간두 끝에 서 있는 듯 위태로운 느낌도 일었다.

수혁이 평했듯, 지금 조태진이 쌓아 올린 추론은 과정이 일부 생략되어 있기에 그랬다.

허나 이제 와서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결론이 오히려 근거가 되어 부족했던 과정을 덮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수혁의 확인 또한 조태진의 자신감을 확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환자의 입원은 결정되었다.

이후로야 뭐, 일사천리였다.

조태진이 다름 아닌 혈액종양내과 교수 아닌가.

그야말로 암 검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도가 텄다고 할 수 있었다.

“별일 없었지?”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고, 이현종은 팀원을 이끌고 출근했다.

통합진료센터엔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얼굴의 신현태와 조태진이 앉아 있었다.

아니, 조태진의 얼굴은 해석하기 쉬웠다.

그는 좋았다.

복잡한 심경은 오직 신현태만의 것이었다.

“별일이…… 많았지! 제주도에서 대체 뭔 짓을 했길래 뉴스에 둘 얼굴이 나와!”

“수갑은 안 찼잖아, 그럼 됐지.”

“네, 삼촌. 저희 사람 많이 살리고 왔어요.”

“하아…….”

결과만 놓고 보면 확실히 그렇긴 했다.

하지만 사고라는 게 원래 이럴 때 오지 않나?

아무리 둘의 영향을 받아 특이해지고 있는 참이라 해도, 여전히 평범한 사람의 경계 안에 서 있는 신현태로서는 불안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 인마. 우리가 뭐 실수하는 사람들이냐?”

“아니…….”

“그보다 이제 슬슬 춘계인데, 내가 시킨 건 다 했냐? 초록이 좀 모자란 거 같은데.”

“여기서 거기로 주제가 튄다고?”

“그럼 무슨 얘기를 더 해. 내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수혁이랑 말하면 믿을 거야?”

이현종의 말에 신현태는 저도 모르게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뺀질뺀질한 얼굴.

아마 사과하라고 하면 미안하다고는 할 터였다.

진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또 환자를 보러 가겠지.

그 환자가 어디에 있는지보다는 어떤 환자인지를 중요시하면서.

다시 말해, 의료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의사들이란 뜻이었다.

세상에 이런 의사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아니, 못 믿지…….”

이미 있는데 뭐 어쩌겠나 싶기도 했다.

-잘 끝났잖아요? 한두 번은 문제 생겨도 막아 드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게다가 매사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기업가인 김다현조차 뭔가 잘못 잡수셨는지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둘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런 마당에 고작해야 신현태가 뭘 하겠나.

기껏해야 원장밖에 더 되나?

“그럼 됐고. 모인 김에 초록 검사 좀 해 보자. 전에 개수만 얘기했는데, 그거 아니야. 질도 중요해. 명색이 어? 나랑 수혁이가 있는 학회인데 아무거나 받아서야 되겠어?”

신현태는 그런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과 학회도 내면 거의 다 받아 줘, 형…….’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온당한 말이라도 지랄할 게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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