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화 춘계 (1)
4월.
꽃피는 3월엔 그나마 꽃샘추위라도 있지만 4월은 그런 것도 없지 않나.
날씨도 좋겠다, 황사도 지나갔겠다,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행락객들로 거리가 넘쳐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병원 사람들에게는 예외였다.
“야, 야. 너 이번에 초록 냈냐?”
“냈지.”
“강의 준비는……?”
“하다 보니까 초록이랑 다른 내용 됐어. 망했다, 진짜…… 시바…….”
교수들에게도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학회 발표이지 않나.
전문가들 앞에서 해당 지식에 대해 떠들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레지던트들에게는 부담이 아니라 약간 징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빅 3 병원들은 좀 똘똘하다 싶으면 2년 차부터 거의 무조건 발표를 시키는 편이다 보니 분위기가 더더욱 무거웠다.
“근데 정형외과 쪽은 좀 쉽지 않냐?”
“쉬워? 새꺄, 쉬워?”
“아니…… 내과처럼 병이 많진 않잖아.”
“교과서로 처맞아 볼래?”
“오우. 그거 교과서였냐? 만만치 않게 두껍네…….”
“쉽다는 말은 저기 이비인후과한테 가서 해라. 딱 봐도 교과서 우리 절반이네.”
과를 막론하고 그랬다.
모든 과가 약속이라도 한 듯 4월에 학회를 열어서 그랬다.
“미쳤나. 우리는 상·하권으로 나뉘어서 그렇거든?”
“오우, 그렇네. 미안. 아니, 미안하다니까……!”
의국은 각 과가 따로 자리하고 있지만, 암센터 당직실엔 많은 과가 모여 있는 형태였다.
사실 과별로 별관이나 본관 등에 당직실이 있고, 그쪽이 당연하게도 시설은 예전 것이라도 살기엔 쾌적하겠지만…….
말이 당직실이지, 꼭 당직인 사람들만 거기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특히 당직과 무관하게 수술이 늦게 끝날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다음날 출근 시간이 늦춰질 리 없는 외과계 레지던트들은 레지던트라는 말마따나 병원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즉 3, 4년 차가 자리하고 있는 본인과 당직실보다는 많은 이들이 부대끼지만 딱히 높은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이런 전체 당직실이 마음만은 더 편할 수 있다, 이 말이었다.
“아…… 어쩌지. 춘계…… 사람 개많던데…….”
“일부러 레지던트 발표만 따라다니면서 조지는 교수들도 있다던데.”
“그거 학회 차원에서 장려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왜? 미친놈들 아니야?”
“미친놈들 맞지. 근데 원래 미친놈들이 병원에 많이 남지 않냐?”
“어…… 부정은 못 하겠네.”
처음엔 분명 학회 발표에 대한 토론 또는 조언을 구하는 자리였지만, 어느새 윗사람들의 뒷담화나 까는 자리로 변모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수급에게 병원이라는 곳은 삶의 터전이요, 삶의 이유인고로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겠지만, 레지던트들에게 병원은 그냥 일터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도 좋게 말해 주는 거고, 본인 스스로가 노예라 인지하는 경우도 엄청 많았다.
“어휴…… 교수놈들…….”
“뭐 하나 가르쳐 주는 게 그렇게 대수냐?”
“야…… 너네는 가르쳐 주냐? 내 선생님은 솔직히 말해서 치프샘이야.”
“아……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아. 교수님은 약간…… 혼내는 사람 느낌이랄까……?”
“티칭 마인드 있는 스탭이 뭐 얼마나 되겠냐. 아니, 가르쳐 주는 건 없으면서 혼내는 건 존나 혼낸다니까? 아니, 뭘 가르쳐 주고 혼내라고.”
“그래도 내과 계열은 좀 낫지. 수술과는…… 시발 뭐 하는지 잘 보이지도 않아. 머리통으로 존나 가린다니까?”
“아…… 맞아. 나도 학생 때 들어가고 나서, 드라마에서 나오는 수술 참관 장면 다 구라인 걸 알게 됐지.”
“뭘 알면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는 걸로 지금 뭐 하는 갑다 이런 식으로 알 텐데…… 하오.”
뒷담화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한창 떠들고 있던 레지던트들 눈에 이상한 장면이 하나 들어왔다.
이럴 때마다 앞장섰으면 앞장섰지, 절대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던 한 놈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
당연하게도 한 명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덩달아 다른 이들의 시선 또한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야, 근데 너는 왜 조용해.”
“그러니까. 너도 내과 아니야? 너도 학회 발표 한다고 툴툴거렸던 거 같은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된 이는, 통합진료센터에 초록 하나를 내기로 했던 레지던트였다.
박영배.
올해 2년 차가 된 그는 우하윤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우하윤은 그를 그저 심복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하여간, 우하윤과 같은 센터에 들어가기 위해 나름의 애를 쓰고 있었다.
“어…… 그게.”
물론 지금 침묵하고 있게 된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딱 네 줄 썼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초록이 완성되고 강의 파일까지 만들어지더니…… 방금 이메일로 논문이 왔거든……?’
이수혁.
우하윤의 동경의 대상.
옆에서 면밀히 살펴본 결과, 딱히 이성의 감정으로 대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절망이었다.
저런 사람조차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랑 사귀려고 저런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수혁은 괴물 그 자체였다.
“그게, 뭐 새꺄.”
“뭐 인마. 너 프락치냐?”
“아니, 아니! 나는…… 나는 통합진료센터 초록 내기로 했단 말이야.”
“아…… 네가 그…….”
“와. 거기 진짜 초록 낸다고 하면 내과 학회 초록도 써 주시고 그래?”
“어…… 어.”
초록만 써 준 게 아니라 그냥 다 해 줬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죽을 것 같았다.
외과 계열이 많은 당직실이니만큼, 각종 흉악한 물건들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특히 정형외과 애들은 수술이 험한 만큼이나 들고 다니는 물건도 좀 그랬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각 과 교과서로만 맞아도 충분히 맞아 뒈질 수 있었다.
“와…… 부럽다…….”
“이 새끼 이거, 솔직히 우 선생님 이뻐서 거기 따라다니는 건데…… 교수님들도 그런 거 아시나.”
“아…… 콜 온다. 응급실이네. 야밤에 또 무슨 일인가.”
“병동 환자 넘어간단다…… 간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들 바쁜 대학 병원답게 모임은 곧 해산되었다.
마침 통합진료센터를 돌게 된 박영배는 홀로 남았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이현종, 이수혁 덕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지. 지금은 안대훈…… 그 선생님 덕이지.’
이현종과 이수혁은 주로 어려운 환자를 맡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현종은 주로 심장과 관련된 질환, 이수혁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짜 이게 뭐지 싶은 환자들을 봤다.
문제는 ‘어렵다’라는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기가 막히게 개입해서 살려 주지만 그전까지는 일단 김성진, 안대훈의 감독하에 진료가 이루어졌다.
말이 감독이지, 그렇게 보다가 실수를 한다?
아니, 실수를 할 것 같다?
그럼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회진에서 무섭게 까였다.
‘안대훈 선생님 아니었으면 뒈졌다…… 적어도 나는 뒈졌어.’
그걸 커버쳐 주고 있는 게 안대훈이었다.
이수혁도 전설이지만, 그는 약간 논외의 인물이니만큼 현실적인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인물은 오히려 안대훈이었다.
머리털과 의학적인 능력을 맞바꿨다고 알려진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열쩡열쩡열쩡’이었다.
-뭐 하니. 내일 아침 회진이랑 학회 발표 준비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아무리 봐도 양반은 아닌 안대훈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 교수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이 사람은 집이 없나……?’
아무리 펠로우를 펠노예라고 부른다지만, 옛 기록들을 보면 노예들도 나름 자기 집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던데…….
박영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합진료센터로 향했다.
딱히 불만 없이 향했는데, 안대훈 담당과 김성진 담당 구분 없이 전부 모여 있어서 그랬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일행은 회진과 학회를 준비하는 데 대략 30분가량을 할애했다.
어차피 매일매일 하는 일인 데다가, 회진 준비는 아까도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 없어서 그랬다.
다음은 강의 시간인데 안대훈과 김성진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했다.
오늘은 김성진이었다.
여느 때처럼 얼굴에 은은한 똘끼가 도는 것이,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현종, 이수혁 교수님 두 분은 천재다. 그중에서도 이수혁 교수님은 신이야.”
처음 강의를 들을 땐 이 사람들이 약간 미쳤나 싶었다.
신이니 뭐니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세계 최고를 논하는 것도 우스워. 우주 최고다.”
점입가경이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도…… 두 분은 정진을 아끼지 않으셔. 지금도 공부하고 계실 거다.”
하지만 김성진과 안대훈까지 합류해서 점점 제대로 된 센터 꼴을 갖추게 된 통합진료센터를 돌다 보면, 저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자잘한 일들이 점점 더 이현종, 수혁에게서 안대훈, 김성진에게로 내려오고 있다 보니 저 둘은 그야말로 진료와 교육만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수준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근데 평범한 우리가 자는 시간에 자면 되나?”
“안 됩니다!”
그 와중에 심지어 열심히 하는 면도 있었다.
하루하루 실력이 달라지는 기분이랄까?
딱히 통합진료센터에 남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시기는 값지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원래 수련 기간이라는 건 대개 지나고 보면 ‘필요한 과정이었구나’ 싶은 시간일 뿐, 실시간으로 뭐가 막 되는 건 어려운 일이지 않겠나.
헌데 여기선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공부! 공부! 공부!”
“그것만 하면 되나!”
“안 됩니다!”
“뭘 더 해야 하나!”
“진료! 진료! 진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애초에 뽑을 때 또라이를 뽑거나, 또라이가 될 것 같은 사람을 뽑아서 그럴까?
이게 비단 의사들만의 일이 아니라 간호사들까지 죄다 이 기이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 보니, 매일 이루어지는 이 소학회도 점점 집회 형식을 띠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도 강의 시작합니다. 오늘은…… 면역 억제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염, 그중에서도 진균입니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질환이죠. 진균은 감염을 잘 일으키지 않는 만큼 기회감염(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감염되는 것)에 속해 있지만, 한 번 감염이 일어나면 마이코박테리움에 속하는 세균들과는 달리…… 하루 단위 또는 시간 단위로 사람을 갉아 먹으니까요.”
물론 막무가내 형식의 찬양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훌륭한 강의가 늘 뒤따랐다.
[다들 미쳤군요.]
‘알고 보면 모두 너 하나씩 박고 사는 거 아닐까……?’
[그럴 리가요. 그랬으면 벌써 우리 따라잡히고 있을걸요? 특히 안대훈의 자질은 놀랍습니다.]
‘하긴…… 근데 네가 없이도 저게 되나……?’
[제가 인간을 많이 이해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판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전혀 모르겠어요.]
‘거참…… 아무튼, 이번 춘계 때…… 우리 소속 레지던트들도 일 한번 칠 수도 있겠는데?’
[그러니까요. 저 정도면 뭐라도 두각을 나타내야 억울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