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화 춘계 (2)
찰칵.
수혁은 여느 때처럼 병원에 있다가, 그러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진료를 보고 있었더랬다.
그러다 우리 센터는 잘 되고 있나 해서 돌아왔다가 이 사달을 본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달이라고 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다.
왜냐?
센터 꼴을 제대로 갖춘다 싶었을 때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둘이 하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죠. 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현종처럼 어마어마한 경험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고.]
‘5월 되어서 김인수, 장종우, 이태원이 이렇게 오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확실히 힘들어 보여.’
[그러니까요. 쉽지 않을걸요.]
‘100% 우리 대머리가 주도하는 거 같은데…….’
[근데 김성진도 요새 못잖게 미친놈이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힘들 터였다.
그래 봐야 펠로우에 임상강사인데, 그 와중에 매일매일 강의를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
아직 교수를 단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학위도 따야 하고 진료도 많고 또 논문도 써야 했다.
원래 같았으면 윗분들 모시고 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었을 테지만, 그나마 그게 없는 게 다행이랄까?
하여간 쉬운 일이 아니란 건데…….
그렇다고 해서 말릴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저렇게 공부를 시켜 주면 레지던트들의 실력도 오르긴 하겠지만, 그 누구보다 가르치는 당사자들의 실력도 팍팍 오를 테니.
찰칵.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수혁을 찍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하아…… 드디어 나도 이걸 하게 됐구나.’
일명 ‘안대훈들’이라 불리고 있는 존재들.
수혁의 홈마.
핵심 멤버인 안대훈과 조태진 둘이 결성할 때는 그냥 동호회 느낌이었다면, 이젠 태화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일단 간택을 받아야 했다.
‘우리 아빠가 아선 기조실장인데…… 나는 이러고 있네.’
물론 간택이라는 것도 마치 신의 계시인 양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상 중엔 우하윤도 있었다.
나름 수혁 팬클럽의 원년 멤버이긴 하지만, 신앙 수준의 동경을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는 조태진의 의견 때문에 미뤄지고 있었다.
아니, 미뤄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아마 그대로 두었으면 절대 이루어지지 못했을 터였다.
‘근데 렌즈로 보니까…… 좀 잘생기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조태진의 마음을 되돌린 것은 신현태였다.
-야…… 하윤이랑 이어 줘 보자.
그 말에 안대훈은 그만 불경한 폭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가끔 안대훈이 자신의 옷을 찢고 회개하는 일이 있는데, 그게 이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을 직접 꺼냈던 신현태도 아직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한 일은 아니긴 한데…….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윤이…… 하윤이는 누가 봐도 너무 괜찮은 애 아니니?
심지어 조태진도 이렇게 말했다.
수혁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주제에 남녀 간의 문제는 또 따로 보기에 그랬다.
사실상 조태진이나 신현태, 안대훈 등이 좋아하는 수혁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의 수혁이지, 연애 대상은 아닌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게다가 모두 나름대로 의사다 보니, 어떤 사실관계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죠. 하윤이는…… 제가 1년 위라서 더 잘 아는데, 애가 그냥 이쁘고 밝기만 한 게 아니에요. 똑똑하고, 무엇보다 애가 사려 깊고…… 착합니다.
-왜 정수리 끝이 붉어져?
-오해는 마세요. 그냥 이쁜 무언가를 떠올리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 수혁이도 수혁이인데…… 너는…… 너는 진짜 안 돼.
-저기, 저도 사람입니다만?
-어, 알지. 나도. 나 너 좋아해. 처음에는 수혁이한테 잘해서 좋아했는데, 너도 진국이야. 근데 아무리 우려도 하윤이한테는 안 된다. 알지? 상처받을까 봐 하는 소리야.
-지금 굉장히 상처받았습니다. 하윤이한테 고백하고 뺨 맞아도 이거보단 덜 아플 것 같은데요.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던 찰나, 처음 말을 꺼냈던 신현태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내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집 놀러 왔을 때 보니까…… 참 좋은 애 같더라. 이현종 선생님하고 닮기도 했고. 근데 현종 선생님 같은 그런 괴짜는 아니잖아. 아마 속으로는 연애하고 싶어 할걸……?
신현태는 본인이 하는 일과 생각에 확신이 있는 편이지만, 그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아내의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처음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은 애가 연애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야, 당연한 말이긴 한데…….
‘우리 수혁이도……?’
수혁이는 아닐 것 같았기에 그랬다.
아니, 연애에 관심이 있으면 노력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신현태 본인도 학생 시절엔 진짜 미팅도 많이 나가고 소개팅도 많이 나갔더랬다.
그럴 때마다 ‘너는 어차피 안 된다’라고 하는 이현종이 곁에 있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신현태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수혁에게 조심스레 물었더랬다.
너도 연애하고 싶냐고.
‘와…… 난 애가 진료할 때 말고도 그렇게 눈이 반짝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잖아.’
생각해 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좀 이상해서 물었다.
근데 왜 밖에 나가질 않냐고 했다.
요새는 그 뭐냐 동호회?
아닌데.
하여간, 젊은 친구들이 만날 수 있는 모임도 많다고 들었다고도 했다.
‘우리 수혁이가…… 자만추였을 줄이야.’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거, 좋다 이거다.
원래 그게 그럴 수 있으면 좋은 거지.
그냥 공부하다가, 그냥 일하다가, 그냥 환자 보다가, 그냥 걷다가……?
근데 수혁이 품고 있는 상상은 일반인의 그것으로부터 다소 지나치다 싶을 만큼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 있잖아요. 병실 복도 모퉁이를 돌다가 차트 옮기던 분하고 탁 부딪치고, 와르르 쏟아요. 그럼 그걸 주워 주다가 손이 닿고 다음엔 눈이 마주쳐요.
-아니면…… 병원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다 뒤로 돌아서는데 탁 부딪치고, 커피를 쏟아요. 그럼 그걸 황급히 휴지로 닦으려다가 손이 닿고 다음에는 눈이 마주쳐요.
-그, 그럼…… 병원 식당에서 음식 시키고 받아 오다가 탁 부딪치고, 음식을 쏟아요. 그럼 그걸 닦다가 손이 닿고 다음엔 눈이 마주쳐요.
그만……!
제발 그만 부딪쳐라!
보통 그렇게 부딪칠 일도 없을뿐더러, 대개는 부딪치면 싸움으로 번져…….
사람은 다른 사람이랑 갑자기 부딪치면 사랑이 아니라 분노를 느낀다고!
막말로 수혁아, 네가…… 네가 차은우니?
그럼 몸이 아니라 눈빛만 부딪쳐도 사랑에 빠뜨릴 수 있겠지만, 넌 수혁이야…….
그리고 대체 병원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겠다는 생각은 왜 아예 없는 거니!
신현태는 그런 고민을 감히 눈앞에서 쏟아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삭였다.
삭히다 삭히다 못해 솟아오른 천불로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낸 묘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홈마…… 그 이상한 거 하고 있지, 너네.”
신현태가 말을 꺼내자마자 조태진과 안대훈은 얼어붙었다.
누구보다 그 일에 대해 진심이긴 했지만, 뭔가 부끄러운 일이란 것은 알고 있어서 그랬다.
신현태가 보기에도 그랬다.
미친놈들이야?
왜 연예인도 아닌 수혁이 사진을 찍냐고.
‘근데…… 아내도 그랬지? 수혁이가 사진빨은 잘 받는 것 같다고…….’
생각해 보면, 수혁이 얼굴이 찬찬히 뜯어 보면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 새끼 이거, 하도 진료만 하고 있다 보니 끼니를 거를 때도 있고 해서 턱선도 나이답지 않게 날렵한 편이었다.
옷?
옷은 진짜 못 입지만, 어차피 가운만 입으니 상관도 없었고.
‘그럼 우리가 봤을 때 적어도…… 수혁이에게 약간의 호감이라도 있는 애들을 다 홈마로 취직시킨다!’
신현태가 떠올린 악마의 계책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저 정신 나간 자만추의 화신이 연애하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아, 저요? 전 선이나 소개팅은 싫어요. 자연스러운 만남이 좋아요.
지금으로서는 절대 안 되었다.
솔직히 소개팅 뺑뺑이를 돌려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아휴.
“그거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고. 하윤이, 어떻게 해서건 설득해서 홈마 시켜.”
“네……? 그거 어려운 건데.”
“피사체에 대한 어마어마한 애정이 필요합니다요, 원장님. 하윤이가 애정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랄 마. 그 사진 안 써도 돼. 목적은 하윤이랑 수혁이를 이어 주는 거야. 자꾸 보다 보면 정들겠지! 나도 요새는 우리 수혁이 잘생겼단 생각이 자꾸 들어. 맨날 봐서 그런 거 아닐까? 하윤이도 자꾸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
“네? 아, 그런…… 그런가……?”
“그럴 수도…… 오…….”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소리였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둘은 이미 정신이 나갈 대로 나가 버려서 홈마까지 하게 된 놈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갑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 제일 정신이 나간 사람이 신현태였다.
“게다가 렌즈를 통해 보는 거야. 일반인 느낌이 아니라 연예인 느낌이 들 수도 있어!”
“오호…….”
“호오……?”
“뭐랄까. 어? 후광 효과가 있을 거라고. 애초에 수혁이가 후광 효과는 이미 엄청 나잖아! 우리가 맨날 봐서 그렇지…… 쟤 이제 31살인데 부센터장이야. 돈도 잘 벌잖아, 어지간한 교수들보다는. 이리저리 쟤 이름으로 입금되는 돈이 월 2천 정도는 될걸?”
“그렇게 많이 벌어요? 왜 난 절반이지?”
“저한테는 4배인데요?”
정신없는 대화는 스노우볼처럼 정처 없이 불어만 가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쟤가 그야말로 상위 0.1% 신랑감이야. 하윤이랑 얼굴 궁합도 잘 맞는 것 같아. 애 낳으면 이쁠걸.”
“그렇네요. 아들, 딸 하나씩.”
“며느리, 사윗감도 우리가 같이 심사해야 할 것 같은데.”
“손주 낳을 때까지 내가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저도요.”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이미 남의 결혼식에 자식 결혼식 거기에 손주까지 다 봤다.
미친놈들의 향연이었다 이건데…….
하여간 그 덕분에 하윤은 반강제적으로 카메라를 쥐게 되었다.
조건은 아주 파격적이었다.
원할 때만, 원하는 만큼만 찍어도 된다.
보수도 준다 등등.
‘그렇군…… 교수님은 30도 각도에서…… 왼쪽에서 비췄을 때 제일 잘 생겼네.’
효과는 있었다.
하윤은 원래 모든 일에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기도 한 데다가, 애초에 수혁을 인간으로서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연애 감정과는 여전히 거리가 굉장히 있었지만…….
‘근데…… 나도 춘계 준비해야겠는데? 아니, 뭘 저렇게 열심이야? 통합진료센터 안 도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어?’
그렇다 보니 피사체에 시선이 아주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어느새 하윤은 카메라를 늘어뜨린 채 센터 쪽을 보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의 대부분은 열정적인 얼굴로 공부 중이었다.
때로 질문도 오갔는데, 학회 발표에 관한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흐음…… 나도 교수님께 도움을 받을까……?’
하윤은 그 오랜 고민의 끝에, 신현태가 환영해 죽을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