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화 춘계 (3)
하윤은 대학 병원 의사들이 대개 그러하듯, 뭔가 해야 할 일이 떠오르고 나면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해서 곧장 수혁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수혁도 대훈과 성진의 부흥회 아니, 강연회를 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던 참이었다.
[우리도 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아니 대가리에 칩 박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러지……?’
[저는 저게 인간의 저력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혁은…… 이제 단순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죠.]
‘음.’
그냥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발끈했을,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 바루다의 팩폭을 맞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하고 또 공부할 게 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펍메드가 아니라 그냥 주의 깊게 보고 있는 학술지 홈피에 들어가면 이펍 형태로 매일같이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새 지식으로 무장한 논문이라는 게 쉽게 나오는 건 아니지만, SCI 점수가 높은 논문에는 단 한 문장이라도 수혁이 여태 몰랐던 동시에 세상에 없었던 지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흐음…….’
[흥미롭군요.]
‘사골 수준의 질환인데 우리고 또 우리니까 뭔가 새것이 나오긴 하는구만그래.’
[그러니까요. 신기하네요.]
티격태격은 늘 그러하듯 잠시뿐이었다.
둘은 곧 논문 읽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주욱 읽어 내려가고 있으려니, 문가에서 서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똑똑.
그러곤 곧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는 발걸음 소리입니다.]
‘그거 싹 다 지운다고 하지 않았어……? 의학 지식 욱여넣기도 바빠 뒈지겠는데 발걸음 같은 걸 왜?’
[요청자는 이수혁입니다. 뭐, 언제나 수혁뿐이지만요.]
‘내가 요청한다고 해서 네가 들어주는 건 아니지 않아?’
[너무 지랄을…… 아차. 너무 수혁스러운 발언이었군요. 강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사실 몇 년 된 요청인데…… 그때 하도 시달렸던 통에 지우지도 못했군요.]
‘누군데?’
[우하윤입니다.]
‘아.’
우하윤.
수혁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고, 바로 앉았다.
지금이야 뭐, 누군가 ‘제일 총애하는 제자가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수혁은 별 망설임 없이 안대훈이라고 답할 터였다.
하지만 ‘제일 총애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우하윤일 터였다.
이미 이성적인 감정은 희석되고 희석되어 티끌이 되어 버렸다 여기고 있었지만, 원래 감정이라는 건 순간순간 사람의 마음을 뭉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네, 들어와요.”
그러한 사실을 가슴으로 느낀 건 아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파악하게 된 바루다 또한 지금은 침묵을 택했다.
당연히 일전에 손을 잡으라고 했다가 일종의 파국을 맞게 했던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간 하윤은 수혁에게나 바루다에게나 이런저런 이유로 특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네, 교수님.”
끼익 소리를 내며 하윤이 안으로 들어섰다.
대학 병원 레지던트들이 다들 그러하듯 꾸미기는커녕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오죽하면 크룩스 아니라 구두처럼 보이는 운동화만 신고 있어도 ‘오 저 녀석 멋 좀 부릴 줄 아는 녀석인가’ 하겠는가.
하얀 가운이나 입고 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면 대개 거지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대개라는 건 예외가 있다는 뜻인데, 그 드문 예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와아…… 사람이 어떻게 이렇지?’
[저도 이건 좀 불가사의입니다. 사람이라면 신진대사가 있기 마련인데 왜 이렇게 깨끗할까요? 딱히 씻고 온 것 같진 않은데.]
‘난 어때?’
[듣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
수혁은 거울을 볼 때마다 서 있는 거지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이 하윤은 수혁의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였는데, 수혁은 순간적으로 자기 의자랑 바꿔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키다가.
[미쳤어요?]
바루다의 다급한 개입 덕에 다시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동시에, 수혁은 타고난 연기력과 바루다 덕에 탑재한 침착함으로 용건을 물을 수 있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머릿속과는 별개로 말은 툭툭 나왔다.
“아, 네. 교수님. 저도 이번에 통합진료학회에 초록을 내야 하는데요…….”
“응? 마감 내일모레까지 아니야?”
“쓰기는 썼어요. 나름 연구하던 주제가 있긴 해서요.”
“아…… 맞네. 너도 이제 치프지.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대?”
“그러니까요. 제가 1년 차로 교수님을 치프로 모실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하윤은 옛날 생각에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가 똑바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잘할 것 같지만…… 일단 볼까?”
“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USB를 조심스레 내밀면서였다.
수혁은 그걸 받아서 자신의 컴퓨터에 꽂았다.
원내 보안망 특유의 딜레이와 함께 파일이 떴다.
제목은 ‘글로벌화에 따른 희귀 감염병 유행의 위험성 증가’였다.
‘현태 삼촌 아니면 태진이 형 쪽 도움을 받았나?’
주제 자체는 나무랄 것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일개 레지던트가 다루기에는 너무 과한 면모가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주제겠지만…….
당연한 주제일수록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법이었다.
공격당할 일도 많을 수밖에 없는 데다가, 자료가 많다는 건 선별하기가 어렵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었다.
“주제가 아주 좋네.”
수혁은 속내와는 다르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초록을 바라보았다.
어려웠을 거란 생각처럼 역시나 내용에 딱히 내실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물론 신현태나 조태진의 도움을 받았을 테니 한 끗이 있긴 한데…….
“근데 문제가 좀 있어.”
“아…… 네. 말씀해 주세요.”
다행한 건, 수혁의 생각이 곧 하윤의 생각이었다는 점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하긴, 이 친구 똑똑하죠.]
‘일등 졸업이야. 아마 내과도 일등으로 졸업하겠지.’
[그럴 겁니다.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으니.]
들어올 때 1등이라고 해서 나갈 때도 1등이라는 법은 없지 않던가.
아니, 대부분이 그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지금까지 잘했다고 해서 내과에서까지 잘하진 못하니까.
오히려 개판만 치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다.
비슷한 예로 김진용이 있었다.
들어올 때 2등, 나갈 때 성적은 추산 불가.
“일단 글로벌화가 되면서 감염병이 늘어난다는 건 증명이 필요한 사설이 아니야. 더 이상은 그렇지가 않아. 뻔히 예상되는 데다가…… 실제 사례로도 증명되고 있지. 우리나라 통계만 봐도 뎅기열이나 황열병이 원래는 없었는데 지금은 많잖아?”
“네. 그게…… 그래서 이 근거만으로는 좀 새로운 얘기가 되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렇지. 문제는…….”
“죄송해요. 교수님 전공 분야가 아닌데…….”
“아니, 아니야. 나도 이 주제를 좀 주의 깊게 보고 있긴 하거든.”
관점이 살짝 다르긴 했다.
신현태는 오히려 그 분야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다 보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만 딱 집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게다가 맡은 일도 일이다 보니, 잠시 임상에서 떠나 있는 느낌도 있었다.
본인이 부단한 노력을 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최신 지견을 따라가는 것조차 어려웠을 터였다.
원장이라는 게 만만할 리가 없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팬데믹 사태가 벌어진 게 몇 년 전이지?”
“교수님 1년 차로 들어갈 때쯤이니까…… 벌써 4년 정도 되었네요.”
“그렇지. 그나마도 우리나라는 팬데믹 사태라고 하긴 애매했어.”
“네.”
수혁은 팬데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를 강타했던 사스에서 비교적 안전했음에도 그랬다.
‘방역 체계와 의료 체계만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어느 정도 유리하긴 하겠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서 완전히 틀어막는 건 유니콘 같은 일이죠.]
‘그래, 그렇지.’
한때 묵시록의 4기사 중 백기사를 정복했네 어쩌네 떠들었던 때도 있었다.
전염병을 정복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니, 만용이라고 해야 할까?
교류가 많아지면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교류가 필수적인 것이 되면서 감염병을 아예 틀어막는 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어떤 나라가, 특히 자유 세계에 속한 나라가 홀로 서겠다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는가?
말마따나, 미국처럼 인구도 많고 석유도 나는 나라가 아니고서는 불가한 일이었다.
“내 예상에는 곧 팬데믹 터질 가능성이 커.”
“네? 어떤…… 어떤 징후라도 있는 건가요?”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툭 하고 화두를 던졌다.
그의 위치와 지금까지 보여 줬던 이적에 가까운 진료 때문에라도, 가볍게 던진 말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해서 하윤은 잔뜩 긴장했다.
사스 당시 학생이었음에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음은 알고 있기에 그랬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직격탄을 맞았던 홍콩에서는 400여 명의 의료진이 사스로 사망했다.
같은 의료진으로서, 그걸 어찌 그저 그렇게 여길 수 있겠나.
“아니, 징후가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잘 봐. 서남아시아 쪽 데이터를 보면…… 여기 보여?”
“아, 네. 근데 이걸 어떻게…….”
“난 원래 관심 많았다니까. 하여간. 보면 여기, 메르스가 번졌었지? 사스가 터지기 5년 전이야. 남아메리카에서는 지카가 번졌고…… 북미에서는 신종 플루가 번졌어. 모두 팬데믹 기준에 부합하는데…… 이걸 100년 전 스페인 독감부터 일렬로 정렬해 보면.”
“어…….”
수혁은 방금 언급했던 것뿐만 아니라, 각종 팬데믹에 부합하는 사례를 쭉 연결해 놓은 도표를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안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2000년을 기점으로…… 엄청 늘었네요?”
“그래. 그리고 그 간격이 점점 줄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지.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니까.”
“아…… 그럼…….”
“지금 이상하게 병 사이 간격이 긴 것뿐이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고 있진 않을 거야.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신종 감염병이 운 좋게 거기서 끝나고 있는 거겠지. 언제라도 팬데믹으로 번져도 이상할 게 없어.”
“그럼……?”
수혁은 하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 생길 거야. 어디서건. 그래서 말인데…… 음. 그래, 이게 좋겠네. 이거, 안 그래도 누구한테 1저자 주려고 했거든? 네가 해라.”
“네에?”
[네에? 이 새끼 이거 흑심 품은 거 아니야?]
그 말에 하윤도 바루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윤은 영문도 모르지만, 일단 갑자기 1저자를 준다고 해서 그랬다.
물론 바루다가 훨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미친놈이…… 이건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벌어야 얼마나 벌겠고, 또 언제 벌겠어.’
[터지면 벌지!]
‘어차피 나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전자 쪽이랑 협업하려면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거 다니다 보면 진료 볼 시간도 줄잖아. 그게 좋아?’
[이거 다 핑계인 거…… 너도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