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65화 (965/1,303)

965화 학회 개시 (2)

“안녕하십니까, 회원 여러분. 통합진료의학회 초대 회장 이현종입니다.”

평소의 이현종은 빈말로도 점잖다고는 하기 어려운 양반이었다.

오히려 경박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학회에서는 공격적이기도 하고.

하여간…….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이번 학회의 발표 수가 무려 100개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모인 건 250개 정도였는데, 고르고 고른 결과입니다. 모두 여러분 덕택입니다. 덕분에 양질의 강의를 매우 풍족한 양으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점잖다는 말로도 좀 모자랐다.

학회장의 직함에 걸맞은 모습이랄까.

“그 시작을 제 강의로 열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종은 한동안 그가 그렇게 싫어하던 겉치레를 해 대다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학회의 본질은 배움에 있는 법이지. 이상한 허례허식보다는 강의에 집중하자고.

본론이라 함은 곧 배움이었다.

배움은 곧 강의였고.

여타 학회와는 좀 달랐다.

본디 학회장이라고 하는 위치에서 강의를 도맡아 하는 법이 거의 없어서 그랬다.

평생 고생했으니 이젠 대접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게 보통 아니겠나.

허나 이현종은 배움에 있어 나이 듦이란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원래도 그랬는데, 수혁이 때문에 통합진료센터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렇게 되고 있었다.

“강의의 주제는…… 케이스 지식을 쌓기에 유리한 학술지 학습법입니다. 본격적인 강의는 내일 이 시간에 할 예정이니, 이건 그냥 쉬어 가는 느낌이라고 여기면 좋겠습니다.”

그 생각 때문에 이번엔 주제 선정부터 남달리 했다.

작년, 그러니까 제1회 추계 학회에서는 거의 잘난 척에 가까운 강의만 해 대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겸손을 강의화한 거 아니냐는 내부의 평이 있을 정도였다.

“오…… 웬일이야?”

“다른 학술지들 소개로 시작하잖아……?”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제 내용은 더 했다.

진짜로 공부하기에 좋은 학술지들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염병에 있어서는 오히려 덩치가 큰 학회들보다 로컬 학회들이 더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로컬이라는 게 국내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감염 내과 임상 수준은 사실 국제적으로 꽤 위상이 높죠? 실수가 적습니다. 게다가 희귀한 감염 질환을 보기도 쉽지는 않죠.”

그렇다고 내용이 별거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현종은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사람답게 부실한 강의는 참지 못했다.

그리고 뻔뻔한 편이지 않나.

덕분에 각 분야의 내용을 넣을 때 도움 청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내놔.

-응?

신현태는 강의를 듣다 말고 울컥했다.

전에 있던 대화를 떠올려서 그랬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로컬이란……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남미 의학회지, 인도의학회지 등을 말합니다. 이쪽은 일단 우리나라와는 아예 다른 종류의 감염병이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같은 감염병이라고 해도 의료 전달 체계 또는 상급 의료 기관의 수준 차이로 인해 경과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시행착오가 많다는 건데…… 원래 의사는 남이 잘해놓은 것을 보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오히려 못한 걸 보면서 더 많이 배워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종은 신현태에게서 주워들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마냥 들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현태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들은 그대로만 말해도 썩 괜찮은 얘기였을 텐데, 거기에 이현종의 인사이트를 더하니 듣기에 따라 그럴싸함을 넘어 일종의 진리가 담겨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또 하나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면, 암입니다. 암. 만성 질환의 영역이기도 하고 또 난치성 질환의 영역에 속해 있기도 하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의료진과 각국 정부 그리고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 암의 정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정복하기 요원한 일이죠.”

이번에는 조태진이 한숨을 쉬었다.

초록 20개를 구해 오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강의 준비를 돕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이야기였다.

-아니, 이런 뻔한 얘기 말고! 자료도 더 없어? 맨날 암만 본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몰라?

-그게 아니라요.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건 제가 관심 있는 영역이…….

-지랄? 그럼 작은 그림만 그려? 쫌생이라서 그래?

-그게 아니라…… 원래 전문가라는 게 작은 영역에서 자신만의 지식을…… 아, 왜…… 지금 때리…… 사람을 쳐요?

-맞을 소리를 하니까 이러지! 그렇고 그런 얘기를 만들어 오라고!

-와아…… 수혁아. 수혁아? 얘는 어디 갔어! 형이 처맞고 있는데.

-걔는 아까 응급실 갔지. 학회 얘기 별 관심 없어.

-어후…….

신현태는 나이도 있고 또 친분도 더 두텁고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봐주는 게 있었지만.

조태진에게는 얄짤없었다.

애초에 이현종이 조태진을 볼 때, 저 새끼는 좀 이상한 놈이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다만 암이 진단되고, 완치가 안 된 상황에서도 수명은 늘려 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여러 문제들이 수반되고 있는데, 그 문제들의 원인이 암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과 더불어 암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진단해 내는 것의 중요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건 역시 최신지견이 담긴 학회지를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 좋아요. 인도나 남미 쪽 학회지는 이쪽에서는 좀 부족한 면이 있어요.”

하여간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현종은 본인 분야인 심장 말고도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썰을 아주 잘 풀어 댈 수 있었다.

내분비?

이쪽도 괜찮았다.

‘하아.’

우창윤이 한숨을 쉬었다.

호르몬 관련해서는 그야말로 대가라 할 만하지 않나?

그런 그가 마른걸레 쥐어 짜이듯 짜였으니, 제대로 된 얘기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이현종이 뭔가 다른 분야에 대해 말할 때마다 해당 분야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숨을 쉬거나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격한 반응에 비례하듯 강의의 퀄은 아주 높았다.

“와…… 확실히 저 정도 하려면 공부도 지독하게 해야 하는구나.”

“한마디 한마디에 임팩트가 있네.”

“필기는 했어? 태어나서 학술지 이름을 제일 다양하게 들은 날 같은데.”

“다 했지. 그리고 저거 그냥 배포하신다고 했어.”

“와…… 클라스.”

“같은 강의는 두 번 다시 안 하시겠다는 거지. 저 정도 퀄이면…… 나 같으면 아껴 뒀다가 이리저리 우려먹을 텐데.”

그렇다 보니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 왔을 때 비교적 젊은 의사들 위주로 감탄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근데 다음 시간 강의가 레지던트들 강의던데…… 이게 맞아?”

“그렇던데? 교수님들 강의는 오히려 작은 데서 해.”

“이쪽에는 별표도 있어. 근데 구성원이 죄다 태화야.”

“그럼 그렇지…… 이현종 교수님 완전 자뻑 대마왕이라니까? 틈만 나면 우리 태화가 짱이라고 하잖아.”

“근데, 내가 이수혁 교수님 강의 몇 번 들어 봤는데…… 유튜브도 보고. 마냥 그렇게만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친구냐? 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다 똑같지.”

“그래서 넌 여기 말고 딴 데 강의 들을 거야?”

“아니, 얼마나 잘하나 들어 볼 건데?”

그것과는 별개로, 다음 강의실 배정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떤 학회도 레지던트들에게 메인 홀을 내어주고, 교수들에게 작은 홀을 내어주는 경우는 없어서 그랬다.

게다가 별표라니?

식당을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강의에 별표를 쳐 놔?

이런 것도 이전까지는 아예 없던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거참…… 강의 부탁해서 했더니 작은 데로 주시고.”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라…… 심도 있는 강의는 아무래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겠습니까.”

“원장님, 저는 지금 이현종 교수님께…….”

“현종이 형은 학회 개최하느라 정신이 없잖아요.”

레지던트들의 불만은 차라리 별거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교수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는데, 이거 대응하는 건 신현태 몫이었다.

‘이현종…… 오퍼스원은 내가 먹는다…….’

신현태는 아까 낮에 본 와인병을 보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

참을 인 자를 세 번 생각하면 살인도 참는다는데 벌써 열 번은 넘게 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뭐, 거의 하늘로 날아가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 종이 울렸다.

좌장을 맡은 이현종이 친 종이었다.

“장내에 계신 내빈 여러분, 강의 시작을 알립니다.”

지극히 사무적이면서도 점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현태는 온몸에 돋아나기 시작한 소름을 쓸어 내리곤, 말을 이었다.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 일단 강의실로 가시죠.”

“좌장도 저기서 해요?”

“이쪽 좌장은 오성흠 교수님이에요. 원장이잖아요. 더 높아.”

“네에……? 칠성 병원 원장님이 좌장이라고……?”

“그럼요. 저희가 얼마나 교수님들을 생각했는지 아시겠죠?”

“으음.”

실제론 끔찍이 생각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냥 끌고 온 사람 앉혀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다른 이들이 볼 때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칠성 병원장 오성흠이 이현종이 볼 때나 밥이지, 남들이 볼 때는 교수 커리어 끝판왕에 가까운 사람이지 않겠나.

그렇다 보니 어느 정도 불만이 가라앉았다.

“첫 번째 연자는 태화의료원 내과 3년 차 우하윤입니다. 글로벌화에 따른 팬데믹 사태 증가에 대한 예측 및 팬데믹 사태 감시망에 대한 제의에 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그 사이, 이현종은 첫 번째 연자를 단상 위에 올렸다.

우하윤.

그녀는 보무도 당당하게, 위아래로 정장을 빼 입은 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었다.

“와…… 저 사람이 우하윤이구나.”

“진짜 이쁘다.”

“성격도 좋대.”

“수혁교라던데?”

“아, 수혁교래? 그럼 성격도 화통하겠네.”

“무슨 의미냐?”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마땅한 모습이었다.

괜히 내과 교수들이 이번 기수 조커 카드는 하윤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게 아니라는 뜻.

물론 정작 우하윤은 그런 시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수님…… 보고 계십니까.’

오직 한 명, 수혁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단지 그에게 도움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도움을 받다 보니 더 확실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세계 최고였다.

최고가 될 거란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최고고, 앞으로 남은 일은 그 사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이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인생에 있어 목표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니겠나.

‘이제 시작합니다.’

하윤은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 하윤을 보고 있던 이들의 눈도 동시에 좀 밝아지는 느낌이 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태화의료원 내과 3년 차 우하윤입니다. 지금부터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이 도표를 주목해 주십시오.”

수혁이 보여 주었던 바로 그 도표, 그러니까 시간별로 발생한 펜데믹 또는 적어도 2차 감염까지 일으켰던 사례를 적어 둔 도표로 시작하는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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