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1화 감염 대가 신현태 (1)
“후우우…….”
신현태는 마른세수를 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세수도 했고 머리도 감은 데다가 커피까지 마신 탓에, 더 이상 잠이 오기는커녕 멀쩡하기 그지없음에도 그랬다.
“긴장돼? 별일이네. 학회 평생 다닌 거 아니야?”
그런 신현태를 보며 그의 아내이자 태화 전자의 임원인, 그야말로 커리어 우먼의 표상인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짜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신현태 짬밥이 벌써 몇 년인데 국제 학회도 아니고 국내 학회에서 쫄아?
“그게…… 학술적인 내용만 다루는 게 아니다 보니…….”
“아…… 그 강의구나. 열난다? 이름이 그게 최선이었어? 요새 그따위로 지으면 애플에서 나와도 안 받을 것 같은데.”
“응…… 그게 말이야. 우리 수혁이가 이름은 진짜 못 지어서…….”
“아무튼, 그건 아직 정식 출시 아니니까 넘어가고. 그걸 깔고 실행하도록 설득하는 게 이번 강의의 목표인 거지?”
“응. 지식 전달이 아니라…… 내가 그게 좀 고민이 되네.”
“흐음.”
신현태의 아내는 풀 죽은 남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표정만은 진중했고 또 위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속으론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남편……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우리 남편…….’
세상에.
이 나이 먹도록 발표라고는 진짜 지식 전달을 위한, 순수한 강의 발표밖에 안 해 봤구나.
하긴, 그런 양반이니까 아직도 혼자서 부동산도 못 가지.
계약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부동산을 못 가.
문고리 잡는 순간 몸이 달달 떨린다나 어쩐다나.
이현종은 그보다 더한 양반이다 보니, 그녀는 어쩌면 교수라는 것들은 금치산자(심신상실로 재산의 관리·처분 금지를 선고받은 사람)와 동의어가 아닌가 하고 있었다.
‘진짜 내 덕에 세상 편하게 사는 줄만 알아라.’
그녀는 신현태의 풀 죽은 옆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귀엽긴 했다.
그러니까 같이 살지.
하지만 지금은 좀 괘씸하단 생각이 더 들었다.
‘나 때문에는 못 하면서 수혁이 때문에는 하네? 이거 미친놈이야?’
다소 격한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언뜻 보면 자애롭기까지 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화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임원을 달았다는 건, 노회한 정치인 이상의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뜻 아니겠나.
“여보.”
“응?”
“이걸로 여보가 뭐 돈 벌 거야?”
“응? 아니. 공짜로 서비스할 거야. 애초에 내가 만든 것도 아니지.”
“진짜 공익을 위한 거잖아.”
“그렇지.”
“그럼 사회 공헌하는 느낌으로, 당당하게 가. 자기는 그게 매력이야. 평생 좋은 일만 하잖아?”
“어…… 그건 그렇지?”
남 좋은 일만, 이라는 단어는 쏙 뺀 채 말이 이어졌다.
“그래. 내가 오랜만에 넥타이도 골라 줄게. 이상한 걸 차고 있네?”
“아…… 이거 수혁이가.”
“하.”
“왜?”
“아니야.”
하마터면 쌍욕이 나갈 뻔했지만, 잘 참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디 가서 이거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목 메달 작정인가 싶을 만큼이나 닳아빠진 목도리 아니, 넥타이를 풀었다.
딱 봐도 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만큼이나 닳다니.
그야말로 죽어라 메고 다닌 모양이었다.
‘하긴…… 색깔이 아예 안 맞는데도 메고 있는 걸 보면…… 이 화상.’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딱 맞는 색으로 골라 주었다.
원래 이러한 과정 자체가 남편으로서는 힘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뭔가 찜찜한 마음에 축 처져 있던 신현태는 그대로 힘차게 나갈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어. 갔다 오면 나 없을 거야.”
“왜…… 왜?”
“출장 가. 어제 말했잖아.”
“아, 응.”
“그래. 내가 곰국 끓여 놓을게.”
그렇게 나온 아파트 1층엔 원장이라고 붙여 준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 네. 병원으로 가죠.”
“제가 직접 호텔로 모시고 가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어차피 병원에서 버스 대절해서요. 올 때도 알아서 올 테니까, 병원만 데려다주시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셔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어떤 원장들은, 또 사장들은 기사들에게 함부로 대한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신현태는 군의관 때부터 절실히 느꼈던 바가 있었다.
단기적으로 윗사람이 되었을 때만큼 잘 대해 줘야 할 때가 없다고.
그렇지 않나?
병사들이 뭐 백날 천날 병사로 있나?
당연히 전역하면 남이고,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원장님. 학회장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가고, 버스도 타고, 학회장에 도착했다.
내과 학회가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이현종과 수혁이 가세해 준 덕인지 뭔지, 나름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가 학회장이 전에 없이 좋았다.
5성 호텔이라니.
휘유.
“그래. 고마워. 가자.”
신현태는 양옆에 선 이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이현종, 수혁이, 조태진, 안대훈, 김성진 등등.
하나같이 만만한 놈들이라곤 없었다.
-괜찮은데? 이 논리를 애초에 거부할 놈이 있을까?
-삼촌. 발표 좋아요. 게다가 대충 짬 때려도 되는 거 아니에요?
-원장님. 왜 그렇게 후달려하세요? 몰래 뭐라도 받으…… 억
실력도 실력이지만 대충 좋게좋게 말해 줄 만한 놈들이 아니란 얘기였다.
아니, 좋게 말해 주기는커녕 욕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특히 이현종은 그랬다.
‘아니…… 아니야. 우리 수혁이도…… 이상하게 학회 관련한 일이라면 지랄하니까…….’
그런 놈들이 다 저렇게 말했으면 뭐…….
괜찮지 않겠나?
아내의 말도 있고, 또 이놈들의 면면을 떠올리면서 학회라는 글씨를 보고 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간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수혁아, 얘 봐라. 아니, 원장까지 해먹은 놈이 그깟 발표 하나 한다고 뚝딱거려?”
“삼촌…… 대훈이는 오늘만 강의 두 개인데도 저렇게 멀쩡히 걷는데…….”
그걸 본 이현종과 수혁은 마치 하이에나라도 된 듯 훅 하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고.
발표 때문이 아니라…….
아니, 발표 떄문은 맞지.
하지만 그런 이유는…….
“야 야. 어디 가. 너 발표 여기서 하잖아.”
“어휴. 이거 뭐 겁나서 발표시키겠어요? 다음 추계 때 통합진료의학회 발표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이거.”
말도 못 하고 어버버 하고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걸 또 걸려서 제대로 된 자리로 끌려왔다.
“이야…… 좋네. 응? 이번에 스폰 제대로 받았나 봐……?”
“그러니까요. 우리 논문 중에 좀 아쉬운 것들만 실었는데도 이게 되네요?”
“거참. 내과 학회라는 데가 이게…….”
“어쩌다 이리됐나 몰라.”
원래 같으면 결혼식 열리는 곳이 컨퍼런스 룸으로 변해 있었다.
층고가 높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좌우로 늘어선 장식품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레지던트들은 당연히 이런 데가 익숙할 리 없었고, 몇몇 펠로우마저 황송함에 절로 고개를 숙이고 다닐 지경이었다.
물론 학회 깡패 이현종, 이수혁 부자는 껄렁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이곳저곳을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야 야. 떴다.”
“네? 누구요?”
“멍청아! 누구긴 누구야! 그 새끼들이지.”
“아아. 그렇다고 이렇게 숨어요?”
“빚쟁이가 따로 없게 구는데 당연히 숨어야지.”
“그러게…… 그냥 그 학회를 가시지.”
“내가 명색이 학회장인데 이거 준비해야지! 당장 저번 주에 거길 어떻게 가냐?”
“저는 갔는데요. 그래서 당당합니다.”
그런 둘을 본 학회장은 단상 위에 놓인 책상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에 비해 동종헌은 당당하기만 했다.
왜냐.
갔거든.
그것만 했냐?
아니었다.
그는 초록도 꽤 여러 개 구해 왔고, 몸소 발표도 했다.
돌이켜 보면 학회 차원에서만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임상을 보는 현장 의사로서도 꽤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랬다.
“야, 네가 서 있으면…….”
“왜요? 아, 오시네.”
그래서일까?
그의 눈에 비친 학회장은 좀 한심해 보였다.
도움받은 걸로 치면 이쪽이야말로 압도적이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이번 집행부가 다른 기수에 비해 잘한 게 뭐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내과 학회를 정상화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건 다 저 부자 덕분이었다.
“오신다고?”
“네.”
“자네, 뭐 하나? 돈 떨어졌어? 어디 봐.”
“아니, 아닙니다. 흠흠! 구두끈이 이게.”
“끈 없는 구두인데.”
“그…… 하하! 하하하!”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저 부자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는커녕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일까?
하여간, 앞으로 다가온 이현종과 수혁 때문에라도 학회장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만 머리통을 책상에 박기까지 했다.
“요새 좀 힘든가?”
“그…… 네. 아무래도 한 조직의 장으로 있다 보니…….”
“어, 뭐. 그게 얼마나 큰 조직이라고.”
“내과 학회가 내과 전체를 아우르는 그…… 어떤.”
“응, 그렇지. 그래. 그래서 약속을 어겼나?”
“네?”
“너 왜 안 왔어?”
“아, 그게. 그. 학회 준비…….”
“대행사도 쓰고, 호텔 빌리고. 양쪽에서 도와주는데 네가 뭐 한다고 바빠?”
“회의…….”
“여기 교육 이사는 왔던데.”
“그.”
학회장은 동종헌을 죽일 듯이 노려봤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거기는 왜 봐?”
“아, 그.”
“이따 봐.”
“아…….”
“그리고 그전에. 오늘 신현태 교수 발표하는 거 알지? 거기 꽉꽉 눌러 담자고.”
“학회 와서 강의 듣는 건 기본적으로 자유…….”
“어. 아는데, 오늘만 공산당처럼 해 봐.”
“어…… 어떻게요?”
“나도 몰루.”
이현종은 황당함에 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한 학회장의 등짝을 후려치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당연하게도 그 자리 그대로 앉아서 학회장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으셔가지고.”
“너…… 너!”
“어어. 또 불러요?”
“아…….”
“아무튼, 시키신 대로 하시죠. 사람 꽉 채워야죠.”
“어떻게!”
“경품……?”
“경품은…… 경품은 마지막 날에나 하는 거잖아.”
“이번에는 순서 좀 바꾸죠.”
이현종은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니라,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동종헌이 프락치가 되어서 그랬다.
그는 통화 연결을 해 놓은 채, 그 핸드폰을 양복 앞주머니에 넣어 둔 참이었다.
“하아…… 너…… 너 미리 입 맞췄구나?”
“네. 그러면 안 되는 걸까요?”
“아니…….”
학회장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입을 맞춘 것도 이상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당당할 일이야?
말이 되나, 이게?
그러거나 말거나 동종헌 교수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알았습니다. 내과의 미래는 저기 있어요. 학회장님이야 사실 이걸로 끝이겠지만, 전 기껏해야 교육 이사지 않습니까. 차차기라도 학회장을 하게 되면…… 저는 저기서 큰 친구들하고 일하고 싶어서요.”
“너…… 지금 뭐 하는…… 뭐 하는 거야.”
“왕위를 계승…… 아니지. 미래를 계승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