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76화 (976/1,303)

976화 뭐가 되었건 (3)

‘좋군. 좋아.’

[그러니까요. 강의……. 시간 없어서 그렇게 잘 준비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대상을 아예 레지던트 또는 펠로우로 잡을 수밖에 없었지. 근데 이런 훌륭한 수준의 디저트가 나올 줄이야.’

[개꿀입니다.]

뭐가 되었건 간에 수혁은 기분이 좋았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환자를 볼 수 있게 된 셈 아니던가.

[그래도 개꿀이라고 생각하는 거 티 나면 좀 그러니까 손 붙들어 매세요.]

‘왜?’

[항간에 수혁에 대해 변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의사가 환자 보는 거 좋아하는 거야 당연한 건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말세예요. 그래도 손은 잡아요.]

‘오케이.’

너무 들뜨면 손을 이리저리 휘두를까 봐, 팔짱까지 낀 채 간신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중간중간 입술 씰룩거리는 거까지는 틀어막을 수 없었는데, 그런 모습이 아예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가고 있었다.

‘건방진……. 하잘것없는 교수가 설마 이수혁 교수님을 시험하는 건가?’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문도 모르나?’

‘그거……. 주기도문 아니냐? 종교가 다른데.’

갑론을박이 오가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종교의 대상이 아닌데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한다면, 역시나 안대훈을 빼먹을 수는 없을 터였다.

‘즐거워 보이시는구만그래…….’

물론 안대훈은 자나 깨나 수혁 생각만 하는 사람이다 보니 착각 따위는 없었다.

‘김선형이라고 했나……. 후후. 이따 치하라도 할까?’

아니, 약간의 착각은 있었다.

수혁의 입장에서 사람을 바라보게 된 지 오래라 그랬다.

“네! 결과가…….”

하여간, 수화기 너머에 있는 이에게까지 장내 분위기가 전달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차피 웅성거림 정도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당직 레지던트는 수혁의 말과 눈앞의 모니터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상황이었다.

“검사는 48시간 금식하면서 인슐린 농도와 혈당 체크하는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무작위 검사했나요? 아니면 저혈당 증상이 있을 시에 체크했나요?”

“아……. 저혈당 증상이 있을 시에 체크했습니다! 또 시간별로도 체크했습니다!”

“그렇죠. 네, 어떻게 나왔죠?”

무작위 검사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봐야 했다.

병이 없다면 천천히 당이 떨어지지 않겠나?

48시간 금식이 어마어마해 보일 수 있지만, 당뇨나 기타 췌장에 관한 병이 없다면 사실 의학적으로 저혈당으로 정의될 만한 수준의 혈당 저하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만약 병이 있다면 저혈당이 찾아올 텐데, 그때 검사를 하지 않고 그냥 무작위로 한다면 그게 뭔가.

‘하긴 아선 교수를 후루꾸로 따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죠. 당연한 일입니다. 개발 도상국에서도 그런 짓은 안 할걸요.]

좋은 게 좋은 거라, 수혁은 입꼬리를 또다시 씰룩거렸다.

검사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나?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로는 못 갈 테니 하루 종일 똥 덜 싼 기분으로 지내야 했을 터였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진단이 가능할 수도 있게 됐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저혈당 증상이 발생했을 당시 혈당은 47mg/dl……. 이었고, 인슐린은 4.5였습니다.”

“높군요. 그게 공복 몇 시간째였죠?”

“24시간째였습니다.”

“그전에는 증상 발현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12시간 공복 시에 53까지 떨어졌습니다. 당시 인슐린은 4.4였습니다.”

“흐으음…….”

당뇨는 아니다.

당뇨로 인한 저혈당 증상은 주로 치료에 의해 발생하니까.

허나 이 환자는 혈당 강하제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쓰지 않았으니, 상관이 없다고 봐야 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건강 기능 보조 식품이나 의약품을 무심결에 과량 복용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특히 보신 문화가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대한민국에서는 음료의 형태로 약을 들이켜 문제가 발생하는 케이스가 왕왕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하게 된 이상……. 그런 건 완전히 배제해도 좋겠지.’

[네. 다른 곳도 아니고, 아선입니다. 전에 몰래 들어가 봐서 알지 않습니까?]

‘숭숭 뚫리긴 하던데…….’

[그건 우리라 그렇습니다. 막말로 이현종, 이수혁 같은 인간이 만약 다른 병원에도 존재하고 그들이 작정하고 뚫으려 했다면 태화도 99% 확률로 뚫렸을 겁니다.]

‘오……. 어떤 데이터로 계산한 거야?’

[그냥 하는 소린데요?]

‘너…….’

잠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된 바루다의 뒷말을 애써 무시해 보면 앞에 추론은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병원에 입원한 이상, 게다가 금식 검사를 시행하게 된 이상 허가받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입에 댔으리란 생각은 일단 지우고 보는 게 좋았다.

물론 그 상태에서 도저히 질환을 잡아낼 수 없게 되었다면야 저것도 한 번쯤 의심을 해 봐야겠지만.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

‘남은 것 중 가장 흔한 것은 역시 인슐린종인데……. 크기는 그리 크지 않겠어.’

[네. 만약 크기가 크다면……. 인슐린의 과다 분비로 인해 증상이 발생했을 겁니다.]

인슐린의 정상 범위는 때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뭉뚱그려 말할 때는 무려 22까지도 정상으로 잡을 수 있었다.

인슐린종으로 인해 저혈당이 발생할 때는 저 수치가 팍 널을 뛰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밥을 먹고 난 직후 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혈당 증상이 찾아오기도 했다.

원래 당이 올라가면 인슐린이 분비되어야 하는데 그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였다.

다만 이건 인슐린종이 커다랄 때의 얘기였다.

작다면……. 지금 이 환자와 같은 소견을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질환도 생각은 해 봐야겠구만.’

[그렇죠. 확실히……. 임상 증상이 좀 애매하네요.]

수혁은 왜 저 교수란 사람이 전화로 노티를 하게 시켰는지 알겠다는 얼굴로, 김선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의 뜻을 담아서였는데 아까 말했듯 수혁은 필사적으로 가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렇다 보니 곡해할 만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저 새끼……. 기분 나쁘게 웃네.’

썩소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입꼬리 한쪽만 비틀어져 올라가 있는 저 얼굴.

때려죽이고 싶어졌지만…….

다음 이어질 검사 결과를 알고 있는 그이기에 참을 수 있었다.

문명인끼리 뭘 주먹다짐까지 하겠나.

그냥 지식으로 패면 되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대다수가 자신의 추종자인 상태에서 모르는 게 나온다?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나네.’

김선형은 최대한 지금 수혁이 짓고 있는 표정을 따라 하면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다른 검사도 시행하지 않았나? 그걸 말씀드리지.”

목소리에 칼이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란 느낌을 줄 정도로 냉철한 목소리였다.

물론 학회장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이긴 했는데, 우창윤은 그 속에 담긴 살기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너……. 이 미친놈이.’

왜냐?

일단 오래 같이 지내서 그랬다.

애초에 저놈 저거 전임 교수 만들어 준 게 우창윤이지 않나.

레지던트 때부터 계산하면, 김선형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온 세월이 정말이지 10년도 넘었다.

‘이거……. 애초에 이번에 온 환자가 아니잖아!‘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이 케이스 그 자체였다.

너무 어려운 케이스다 보니 케이스 리포트 대상이 되었을 지경이었다.

아니, 다 써서 냈고 이제 곧 퍼블리시 될 예정이었다.

‘2년 전에 온 환자……. 박사 학위 논문만 따고 쓴다고 어영부영 시간 끄는 거 봐줬더니 그걸 여기서 이렇게 써먹어?’

우창윤은 혀를 찼다.

미친놈…….

아니, 병신…….

‘병신아!‘

우창윤은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주워 넘기기 시작했다.

모든 욕이 김선형을 향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상황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굴욕의 역사라고 하면 딱 좋았다.

아마 청나라 장군 앞에 끌려 나가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례를 올려야 했던 인조의 심정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 교수님. 이게……. 아 이렇게 진단이 되는군요!

문제가 있다면, 인조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굴욕을 당한 것에 비해 우창윤은 남몰래 당했다는 점이었다.

아니, 지금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래. 밤에 생각을 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될 거 같더라고.

제일 아끼던 제자 앞에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을 수 있었으니까.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원래도 존경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제자 앞에서 또다시 잘난 척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아마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하긴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잘난 척이 비수가 되어 날아오고 있었다.

‘하긴…….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이 나조차 답을 찾지 못했던 케이스니까…….’

우창윤은 다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 듣기도 힘들어서 귀를 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공개 처형식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수치플이 될 참이어서 그랬다.

“아, 네! 교수님!”

수화기 너머 레지던트는 우창윤의 마음을 알 턱이 없었고, 또 자기 교수의 음험함조차 알 턱이 없었다.

그저 평소 팬이었던 수혁과 통화하고 있다는 것이 신날 뿐이었다.

“에……. 그래서 이거……. 검사를 했습니다! 인슐린종을 의심했고요! 따라서 검사는 복부 초음파부터 시행했습니다!”

“췌장은 복부 초음파에서 사실 뭐가 잘 안 보일 텐데…….”

“네. 거기서는 이상 소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 들뜬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혁은 드디어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으음…….’

[흐으으음…….]

바루다도 그랬다.

이거 어째…….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 소견이지 않나?

“사진…….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제가 저기 나온 이메일로 방금 보내 드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김…… 교수님.”

“김선형입니다.”

“네네. 김선형 씨. 아니, 교수님.”

거기에 매진하다 보니 살짝쿵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진을 요청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여기서 암만 사진을 본다고 해도 별 소용은 없었을 터였다.

왜냐?

사진을 기억할 수가 없을 거거든.

2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혁은…….

‘아……?’

[완전히 같군요. 그때 그 사진입니다.]

‘뭐지……? 그때 분명……?’

[어쩌면……. 우리 진단이 틀렸고, 재방문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게 과거 병력으로 붙었어야지. 지금 노티는 아무리 봐도 현재 진행형이잖아.’

[그것도 그렇군요. 대체 뭐지? 이게 완전히 같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일란성 쌍둥이?’

[그렇다고 해도……. 초음파는 사람이 찍는 것인데 윈도우 모양이 완전히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뭐여?’

사진을 데이터화해서 들고 있는 인간이었다.

‘옳거니. 너도 이건 모르는구나?’

어이없음에 팔짱을 툭 하고 푼 수혁을 보면서, 김선형은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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