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화 뭐가 되었건 (5)
했다 치고.
했다 치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래…….
아선 병원은 엄밀히 말해 태화와 라이벌이고 당연히 이쪽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상대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된다……. 안 돼, 선형아! 아선에 프락치 개많다!’
이제 우창윤은 강의실 밖에 나와 있었다.
그래 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왜냐.
문이 활짝 열려 있었거든.
어떻게든 강의를 들어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닫을 수가 없었다.
‘그래, 우리라면 그런 생각을 해 봄 직하지! 하지만……. 안 돼!’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끼리끼리라는 말도 있고.
뭐라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니.
우창윤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 자기 비슷한 사람을 골라 키운 바 있었다.
‘선형아……. 안 돼에!’
그게 김선형이었다.
똑똑하고, 자존심 강하고……. 결과 우선 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 잘되면 된다는 생각이라는 게 일이 잘될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우창윤은 중년을 넘어 장년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매뉴얼이라는 게 못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필요해서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건데……. 아쉽게도 김선형은 아직 그런 준엄한 현실을 깨닫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애초에 대학 병원 교수라는 자리가 세상을 깨닫기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자리이기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지금 제가 따로 지시하겠습니다. 전화는 끊죠.”
“아……. 네.”
해서 김선형은 대충 넘어가기로 작정했다.
당황한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우창윤을 닮아서 그랬다.
약간의 소시오패스적 기질이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데에 더 유리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김선형은 금세 마음속 찝찝함을 싹 지우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지금 바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속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어쩌지……? 수치를 바꿔……?’
검사 수치를 그대로 읊는다면…….
김선형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애매하게 일찍 들어왔다고 여겼었는데, 열정 가득한 놈들 때문에 속절없이 자리가 밀려서 가운데쯤 앉아 있게 된 마당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 바꾸고 그냥 말하면……. 용비어천가 나온다…….’
지금도 이수혁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환호성을 내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놈들인데 심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케이스까지 전화로 맞힌다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건…… 이건 내가 봐도 놀라운 일인데…….’
같은 교수가 아니, 내분비내과 교수가 봐도 이걸 이런 식으로 갖다 맞힌다는 건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헌데 레지던트나 학생들이 볼 때는 어떨까.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다 보니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잠깐 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저 새끼들은 대체 여기 왜 와 있을까 싶은 놈들이 눈에 띄어서 그랬다.
장차 내분비내과의 노예가……. 아니, 동량이 되어 줄 펠로우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앉을 자리도 없는 주제에 왜 들어와 있나.
“검사는 그럼 언제 시행하죠?”
수혁은 그런 김선형을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속으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병신인가?’
[뻔히 아는 걸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요?]
‘흐음……. 혹시 모르지. 초천재라서 지금 이 검사 수치를 꼬아서 다른 질환으로 진단하는 거야.’
[그럴 수 있나……? 당장 떠오르는 게 없는데요.]
‘야 너두? 야 나두. 우리가 병신이라서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그렇죠. 극히 높은 확률로 저놈이 병신이지 않겠습니까.]
수혁은 저도 모르게 마이크에 대고 병신이라고 할 뻔했다.
다행히 바루다가 제동을 걸어서 소리까지 내진 않았지만…….
바루다의 육체 제어 능력이 대단할 건 없지 않나.
그렇다 보니 입 모양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병신……. 이라고 하셨다.’
물론 수혁의 입 모양을 즉시 해독 가능한 사람이 이 안에 많지는 않았다.
안대훈이나 우하윤 정도나 있을까.
안대훈이야 뭐 미친 사람이니까 그렇고, 우하윤은 최근 수혁의 사진을 찍느라 하도 쳐다봐서 그랬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수혁 복음서……. 아니, 수혁 케이스 모음서에서 본 거 같기도 한데…….’
당연하겠지만 둘 사이의 덕력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하윤이라고 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치만 우하윤은 대머리가 아니지 않나.
아버지가 대머리이니만큼 유전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남자가 아니라 남성형 탈모는 발생할 턱이 없기야 하겠지만서도…….
‘옳거니……. 그래, 봤어. 봤다고’
놀라운 건, 안대훈도 딱히 남성형 탈모는 아니란 점이었다.
유전 경향도 없었다.
안대훈이라고 해서 하릴없이 날리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두고 보고 있었겠나.
명색이 의사고, 그중에서도 꽤 뛰어난 의사인데.
게다가 종합 병원 근무자이니만큼 당연히 피부과로 뛰어갔더랬다.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 본 결과…….
이현종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증명된 사안이었다.
-스트레스성 탈모
안대훈의 두발을 홀랑 앗아간 질환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 병원에서 얼마나 혹사당했으면 그렇게 됐냐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부모님은 병원에 와서 일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했고.
허나 정작 당사자인 안대훈은 딱히 불만이 없었다.
그는 그가 얻어 낸 지식을 생각하면, 나름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사진도……. 그때랑 같다. 뭐야, 저 새끼? 진짜 병신인가?’
안대훈은 이제 수혁과 같은 얼굴이 되어 김선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는단 점이었다.
“어……. 나 안대훈.”
“네, 네!”
그는 곧 전화를 걸었다.
이현종에게 물려받기도 했고, 또 새로 만든 한 프락치 중 하나에게였다.
“지금 김선형 교수님 앞으로 이런 환자 있는지 확인해 주고……. 할 수 있으면 영상의학과 인터벤션 파트 가서 뭐 하고 있는지 알아봐. 시간 되면 거기 앞에서 대기해 줄 수 있나?”
“아……. 네. 어차피 학회라 지금 뭐 별로 할 거 없어요.”
“좋아. 그럼 작전 개시.”
“대업에 영향을 주는 일입니까?”
“그렇지.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지. 무려 이수혁 교수님과 직접 연관된 일이다.”
“그렇다면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선의 보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력을 소모하면 될 일이니까.
“어떻게 됐나요?”
“아, 네. 지금 삽입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김선형은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삐질삐질 새어 나오기 시작한 진땀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그건 생리적인 현상이니까.
무엇보다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즉석에서 케이스를 재조합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혁과 바루다조차 간헐적 저혈당 증세를 보이면서, 동시에 영상학적 검사에서 이상 소견을 찾을 수 없으면서 동시에 증명된 기저질환이 없는 케이스에서 다른 질환을 만들어 볼 엄두도 못 낼 정도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그래요? 이게 삽입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검사 자체는 빠르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 네.”
일단 시간이 없었다.
정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디디디디.
그사이 수혁의 이메일로 충신 안대훈이 보낸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긴급’ 글자가 떠 있었다.
‘뭐지?’
[안대훈이라면……. 어쩌면 이 사태의 전말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아……. 그렇지. 그 안대훈이라면…….’
안대훈이 여기 없을 리가 없지 않나.
그 말은 곧 화면에 피피티 대신 이메일 화면 띄워 두고 사람 하나 개바르고 있다는 걸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있다는 얘긴데…….
그 와중에 ‘긴급’ 달고 메일 보낼 일이 달리 있겠나.
아마도 지금 조지고 있는 사람을 정말로 X되게 만들기 위한 자료를 보내왔음이 분명했다.
‘재밌겠는데…….’
[그러니까요. 이현종이 왜 그러는지 알겠다니까요.]
예전의 수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이현종이 사람 하나 버려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야. 왜 저렇게 웃어.’
수혁은 사람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이나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검사 수칙을 잘 모르시겠으면 지금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췌장으로 들어가는 비장 동맥, 위십이지장 동맥, 상행성 장간막 동맥, 좌우 간정맥에 칼슘 0.45mEq 5cc를 급속 주입하되……. 칼슘 주입 전, 주입 후 30초, 60초, 90초, 120초에 좌우 간정맥에서 혈액을 채혈하시죠.”
언제나 그러하듯 완벽한 문장을 내뱉었다.
생판 남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 저는 법이 없었다.
김선형이라고 해도 뭘 읽지 않는 이상 이게 가능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이 끝난 건 아니었다.
“채혈한 혈청에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인슐린 농도를 측정하면 좋겠군요. 제 예상으로는……. 비장 동맥에 선택적으로 칼슘을 자극했을 때, 좌측 간 정맥에서 채혈한 혈액에서 인슐린 농도가 현저히 증가할 거 같군요.”
“허……. 어……. 억.”
그리고 그 말이 끝날 때쯤, 김선형의 얼굴은 까맣게 타들어 가던 단계를 지나 하얗게 탈색이 되어 버렸다.
아까까지도 놀라움의 연속이기는 했더랬다.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깔끔하고도 신속한 진단이지 않았나?
그 와중에 언급했던 진단 방법 그러니까……. 검사 방법 또한 교과서를 그대로 읊나 싶을 정도로 정확했다.
한데 이건…….
‘이건……. 아니, 이건……. 이건 질환의 위치를……. 위치를…….’
졸도할 거 같았다.
정말로…….
뇌혈관이라도 터졌나 싶을 정도로 기이한 감각이 깃들고 있었다.
왜냐.
인슐린종에서……. 미세 인슐린종이 있을 때 인슐린 수치가 동맥혈 칼슘 자극 검사에서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위치를 정확히 감별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럴 만한 단서가 있었는지를 찰나의 순간에 되짚어 봤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안……. 미안하다!’
우창윤은 옆에 레지던트에게 양해를 구한 후, 무등을 타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기 자식처럼 키운 마당이다 보니 예전처럼 냉정하게만 굴 수는 없어서 그랬다.
적어도 자기 사람에게만큼은 그랬다.
해서 그 최후는 바라봐야지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끔찍했다.
납득할 수 없다는 저 얼굴.
침이 새어 나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내가 잘못했다. 내가!’
그때 우창윤은 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샐쭉해진 눈을 한 수혁은 방금 안대훈이 보낸 파일 근처에서 마우스를 돌리고 있었다.
-아선 영상의학과 인터벤션
파일 이름이 이랬다.
다른 이들이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창윤은 단박에 알아들었고,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