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화 뒤풀이 (1)
“형, 진짜 우창윤 교수……. 정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학회.
직역하면 잘은 모르겠지만 학자들의 모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럼 꽤 멋들어진 모임이 돼야 할 거 같겠지만, 아쉽게도 실제 모습은 늘 상상했던 것보다 못한 법이었다.
내과 학회라고 해서 딱히 예외는 아니다 보니 태화 사람들 또한 전부 요즘 대학생들도 잘 안 갈 것 같은 오래된 호프집에 들어와 있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이다 보니 신현태는 이미 만취였다.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없는 건 아닌데……. 거의 없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얘기 아닐까……?’
물론 얼굴이 불콰해졌다고 해서 정신도 불콰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들 머리 굴리는 걸 한평생 업으로 삼고 있는 인간들이다 보니, 취해도 대강 대강은 굴릴 수 있었다.
“어? 누구?”
물론 예외도 있었다.
이현종은 진짜 만취였다.
방금도 맥주 한 잔을 들이켰는데, 이제는 정말이지 술이 술을 마시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아니……. 이 형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수혁이도 없는데.’
수혁은 보쌈당해서 사라졌다.
무수히 많은 레지던트들과 학생들에게 이끌려 갔다.
어지간하면 이현종 아니, 신현태도 놔주지 않았을 텐데…….
-이수혁!
-이수혁!
출마 선언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에 초 칠 수는 없지 않겠나.
해서 보내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종은 취해 있었다.
물론 그따위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현태는 우창윤을 염려하고 있었다.
잘 나가다 헛바람 들어서 인생 나가리 되는 경우를 한두 번 봤어야 말이지.
“우창윤 교수 말야! 정치하라고 등 떠밀었잖아. 아까 기자 번호 물어 가던데…….”
“아……. 아아. 우창윤.”
“표정이 어째 좀 그런데.”
“잘할 거 같냐?”
“그걸……. 그걸……!“
신현태는 깜짝 놀라서 그나마도 없어져 가던 취기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미친 인간이 남의 인생이라고 이렇게……?
“남의 인생이잖아.”
허.
허!
신현태는 기가 차서 말이 잘 안 나왔다.
“이……. 아니, 아무리 아선 사람이라고 해도…….”
“아니, 뭐……. 잘할 수도 있지. 그리고 당장 어떻게 하겠어? 정치가 얼마나 어려운 건데.”
“당장 할 거 같던데…… 사명감에 불타 가지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감이라면 뭐……. 실패해도 괜찮은 거 아닐까?”
“어……?”
그런가?
가슴에 웅대한 품을 품고 있다면 그런 건가?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그냥 두면 안 될 거 같은데…….
신현태는 아까 학회 끝나자마자 희희낙락한 얼굴로 어디론가 사라져 가던 우창윤을 떠올렸다.
안 될 가능성이 99% 같은데, 나중에 어떤 얼굴로 돌아오게 될까.
심성이 그래도 착한 편에 속하는 신현태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조용히 해 봐. 우리 안대훈 선생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아…….”
하지만 제아무리 신현태가 착해 봐야 별 소용이 없는 상황도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지금이 그랬다.
안대훈은 모두의, 그러니까 수혁파로 분류되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입을 열었다.
“네, 현재 저희 학회 최고의 숙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좋아.”
“해 봐.”
“제발…….”
최고의 숙제.
아니, 당면한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 그리고 김성진, 김인수, 장종우, 이태원과 같은 충신들의 탄원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안대훈이 화면을 띄웠다.
화면이라고 해 봐야 끈적이는 호프집 테이블 위에 놓인 패드가 전부긴 했지만 하여간.
<이수혁 교수님 연애 기원 프로젝트. 부제 :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안대훈이 띄운 제목은, 그래도 국내에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모여서 이따위 것을 봐야 하나 싶을 정도의 제목이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제일 잘 알아서, 호프집에서도 구석진 자리에 피해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이들도 취해가고 있어서 원활한 진행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수혁……. 키 175cm, 65kg…….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 부센터장, 전임 조교수. 연봉 2억…….”
“잠깐 이렇게까지 다 알고 있어? 어떻게 아는 거야. 연봉은 개개인별로 다 비밀 아닌가?”
“제가 알아봤습죠.”
“어……. 어떻게?”
“제 눈과 귀는 병원 온 사방에 다 퍼져 있습니다.”
“허.”
신현태는 그야말로 진심을 담아 허- 하고 내뱉었다.
원장인 자신도 모르는 걸 일개 펠로우가 알고 있다니.
“하여간……. 그 외에 특허 소득까지 하면 세전 소득이 연에 3억 정도 됩니다. 완전 고소득자에 군대 면제에 31세이시니까 진짜 조건은 좋습니다. 이런 조건이 또 없어요. 제가 강남 쪽 활동하는 마담뚜에게 알아봤는데 대뜸 어디 사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뭐 그런 조건입니다.”
신현태만 놀라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이 새끼는 진료도 최선을 다하고 공부도 최선을 다하고 교육도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 논문에도 최선을 다하는데 이런 건 또 언제 했단 말인가.
헤르미온느의 시계가 아니라 안대훈의 머리카락 아니, 시계가 있단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그에 비해……. 연애 경험은…….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처참합니다.”
“처참할 정도라고?”
“아니, 그래도 수혁이가 한두 번 연애해 봤다고 했는데?”
“응, 모쏠은 아니라고 했어.”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 순으로 말을 보탰다.
이게 단순히 교수들만 발언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못난 놈들만 모아 놓은 것일까?
우연히도 나머지 통합진료센터 사람들은 죄 싱글이었다.
연애 얘기가 나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입이 다물어지는…….
“네, 그게……. 사실 연애라는 것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뭔 얘기를 하려고…….”
“설마……”
“하지 마.”
“이수혁 교수님 입장에서는 연애고 썸이지만, 상대편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런……. 그런 만남입니다. 가령 소개팅한 것도 연애로 치셨던 모양입니다.”
“아.”
물론 이야기가 지속될수록 기혼자들의 입도 점차 다물어지고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떠들어 대는 건 이제 오직 하나, 안대훈뿐이었다.
“저도 처음엔 믿기 어려워서 몇 번이나 교차 검증을 했습니다. 실제로 한 분은 따로 만나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결론은 우리 이수혁 교수님이 모쏠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렇게 밝다니.”
“애가 참……. 그것도 재능이라니까.”
“우리 수혁이의 매력이죠.”
모쏠이라니.
다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지만, 그 탄식을 부정하려는 듯 반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했다.
안대훈은 속으로 무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해서 잠자코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본인도 그 말을 듣고 잠시 수혁에 대한 존경심을 접지 않았었나.
“그런 주제에 아니,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소개팅이나 선은 한사코 거절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고로 자연스러운 만남을 하게끔 해야 하는데……. 원장님, 우하윤 홈마 프로젝트는 어찌 되고 있는지요?”
하여간, 안대훈은 공을 잠시 신현태에게 넘겼다.
가뜩이나 우창윤 때문에도 술이 깬 상황이었던 터인데 수혁이 연애 얘기 아닌가.
“흠흠.”
신현태는 자리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화면을 바꿨다.
그러자 하윤의 얼굴이 떴다.
“아.”
너무 예쁘다 보니 몇몇 인물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봐도 저 둘이 잘될 거 같지가 않아서 그랬다.
이게 무슨 계산을 통해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세한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 와중에 신현태가 말을 이었다.
“홈마는 아주 성실하게 이행을 해 주고 있고……. 고무적인 것이 따로 수혁이랑 만나기도 했어.”
“오.”
“오?”
“물론 논문 도와주고 뭐……. 발표 도와주는 데 그친 거 같은데……. 이 자식이 글쎄 도와달라고 했더니 논문거리를 더 줬더라고?”
“아.”
“아…….”
“뭐 지금 이렇게 뭐……. 어……. 그래. 안됐다고 단정하는 건 섣부른 거 같은데…….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까지 가능성이 크지는 않은 거 같아.”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
굉장히 우회해서 한 말이었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당연하게도 이 말도 막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원장님은 딱히 보고하실 게 없으시군요?”
“어……. 그렇지. 보고……. 어. 그렇지.”
“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진짜 컸는데……. 이번 학회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학생들도 많이 오고, 특히 레지던트들이 많이 몰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이게 안대훈 선생의 회심의 프로젝트 아니었나?”
이현종도 감히 하윤이랑 뭐가 어떻게 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둘이 잘되더라도 육십 넘어서의 일일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안대훈에게 거는 기대가 훨씬 더 컸다.
처음엔 수혁이도 그냥 자기처럼 의학이랑 결혼하면 어떤가 했지만, 이기자랑 살다 보니 인생에 크나큰 즐거움을 놓쳤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간에 아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나.
안대훈은 이현종의 광기 어린 눈을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바람잡이들도 있고 해서……. 기대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잘 형성이 되었습니다. 자, 지금 이제 보시면…… 제 친구가 운영하는 매장에서 뒤풀이가 진행 중이거든요? 실시간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자신 있다 싶더니만, 한 끗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상에 매장에도 프락치를 심다니.
이현종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두드렸다.
“분위기 좋다는구만.”
“삼삼오오 찢어져서 만남도 이루어지고…….”
“아니, 이거……. 미러볼인가? 뒤풀이를 나이트로 갔어?”
“아뇨, 그건 아니고……. 카페인데 나름 이렇게 변신도 할 수 있는 업장입니다. 저도 몇 번 가서 놀아 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자네……가?”
“저도 얼마 전까지 20대였습니다. 지금도 서른이라 젊죠.”
“어……. 나이가……. 문제가…….”
안대훈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셈 치고 카톡을 뒤졌다.
그러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게…….
“근데 이수혁 교수님 얘기는 없네요? 이놈이 이럴 친구가 아닌데.”
“정말 없어? 어디 간 건가?”
“모르겠습니다.”
“영통 해 봐. 영통.”
“아, 네.”
안대훈은 즉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자 친구가 받았다.
“야, 안 그래도 내가 지금 걸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어. 뭐야. 우리 교수님은 어디 계셔.”
“어느 순간 안 보여서……. 내가 찾아다녔거든. 방금 찾았어.”
“찾았다? 뭔 말이 그래.”
“그게……. 주무시고 계시더라고. 아까 초부터 너무 달리신다 싶더니만…….”
“목소리가 왜 이렇게 울리지?”
“아, 나 화장실이야. 지금 교수님 옮겨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