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85화 (985/1,303)

985화 뒤풀이 (2)

화장실이라.

여기까지 듣고 난 안대훈은 참지 못했다.

발표고 나발이고 뭐가 중하겠나.

현실이 중하지.

‘교수님…….! 교주님……!’

안대훈은 그대로 달려 나갔고, 그런 안대훈을 감히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조태진은 따라 나갔다.

김성진이나 다른 이들도 따라나서려 했지만 이현종이 말렸다.

그런 꼴을 많은 사람이 봐서 좋을 게 있겠냐고 하면서였다.

그 말은 하면서 어쩐지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신현태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덜커덕

하여간 안대훈과 조태진은 매장 안에 들어섰다.

나름 힙한 곳이라 인테리어가 살짝 되다 만 느낌이 있었다.

마감이 안 되어 있달까?

“응?”

“안 사요.”

안대훈만 보고 몇몇이 잡상인인 줄 알고 손을 뒤흔들다가,

“어……. 교수님?”

“어어.”

조태진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이수혁 교수님이 화장실 가셔서 안 나오는데……. 괜찮을까요?”

그중엔 놀랍게도 수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여자였다.

안대훈과 조태진은 눈을 마주쳤다.

‘혹시?’

‘그럴 수 있다, 가능성 있다.’

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술이 좀 약하셔서요.”

“그래요. 이수혁 교수가 과음한 모양인데. 우리가 가 볼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신나서 술 게임을 했는데, 그걸 잘 못하시더라고요.”

“아.”

“술 게임이라…….”

수혁이가 술 게임을 잘할까?

잘할 리가 없었다.

일단 해 본 적이 없을 거 같았다.

[그러게 제가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고집을 부려 가지고…….]

‘술 게임이 술 마시는 재미에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지금 재밌습니까?]

바루다가 나섰다면야 얘기가 아예 달랐을 텐데…….

최근 들어 수혁의 고집 아닌 고집이 이런저런 부분에서 꽤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는 예외였는데, 술 게임 같은 부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고집을 부려 댔다.

“아이고.”

“우리 수혁이.”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수혁은 변기통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옷을 내리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그냥 얼굴이 너무 뻘게서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가죠.”

“그래.”

“어떡해……. 저 진짜 이수혁 교수님하고 얘기 많이 해 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뒤따라온 레지던트 하나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조태진은 그럼 흑기사라도 하지 그랬냐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불충한 소인의 죄로소이다…….’

따라왔어야 했다.

흑기사라도 자처해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소인이 연애 조언을 아끼지 않겠나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어 보였다.

왜냐?

이 자리에 와 있던 이들 중 꽤 여럿이 호감을 보인 거 같다는 보고가 잇따라서 그랬다.

술 게임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노는 사람처럼 흥분한 모습이 귀엽다나?

“너드미……. 그래,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너드미? 그게 뭐야.”

안대훈은 수혁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운 후, 대리 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 놈과 몇몇 프락치들에게 들은 바를 종합해 결론을 내렸다.

조태진도 옆에 있었으니 당연히 같은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듣질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걸 왜 귀엽다고 하나, 먹이나? 이런 생각만 들었다.

“있습니다. 그……. 딱 이수혁 교수님 같은 느낌이죠.”

“너드……? 그건 욕 아니야? 못 놀고, 공부만 하고. 아, 수혁이긴 한데…….”

“그렇죠. 보통은 그런데, 이수혁 교수님이 그냥 너드는 아니지 않습니까. 능력이 쩔잖아요. 게다가 교수라는 후광 효과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교수라고 하면 뭔가 되게 근엄하고 무서울 거 같은데……. 이수혁 교수님은…….”

“학회 질문자로만 만나지 않는다면 무섭진 않지.”

솔직히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터였다.

큰소리 내는 법도 없고, 뭔가 일이 막히는 순간이 오면 알아서 뚫어 주고.

“실제로 어리기도 하고요. 술 못 마시는 것도 저희야 잘 알지만, 교수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면 의외의 모에 포인트죠.”

“모에?”

“갭모에라는 게 있습니다.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드러나는 매력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흐음……. 그렇게 듣고 나니까 왜 수혁이가 인기가 없었는지 이해가 안 가네. 얘처럼 의외성 덩어리가 또 있나?”

또라이인 줄 알았는데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잖아?

조태진은 이런 얘기를 했다가, 제일 또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안대훈의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고 뒤로 물러섰다.

황당해서 더 말이 안 나오는 것도 있었다.

네가 누굴 그런 눈으로 바라볼 자격이 있냐…….

뭐 이런 말이 입안을 고요히 맴돌고 있었다.

[수혁. 제가 듣기에도 이건 가능성이 있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있다던가?

그건 몰라도 술자리 말은 얼굴 뻘건 사람이 듣고 있다는 말은 100% 들어맞는 격언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래……. 너드미라……?’

[수혁이 어떻게 봐도 전통적인 미남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쪽이라면 어떻게든 수요가 있을 거 같군요.]

‘나를 너무 물건처럼 말하는 거 아니냐?’

[인공지능의 한계라고 여기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갑자기 왜 이렇게 도와줘? 너 또 이거 함정 파서 나락 보내려는 거 아냐?’

[아뇨, 아닙니다. 가만 보니까 수혁은……. 확실히 연애를 하고 싶어 해요. 생물학적인 여자가 웃기만 해도 엔도르핀 수치가 팍 올라갑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불쌍하달까요…….]

해서 수혁과 바루다는 방금 들은 정보를 토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안경을 끼자.

머리를 더 길러서 덥수룩하게 하자.

옷을 체크무늬 남방으로 통일하자.

‘배바지?’

[그건 좀…….]

‘그래.’

아무래도 둘 다 이런 쪽으로는 젬병이다 보니 마구 잘못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활발한 토의가 지속되는 가운데, 전화가 왔다.

안대훈의 전화였다.

“응……?”

“뭐야? 이현종 교수님인가? 집으로 가는 거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아, 아뇨. 응급실 번호입니다.”

“아, 환자야? 으음.”

조태진은 안대훈의 말에 수혁을 돌아보았다.

수혁도 듣기는 했다.

환자라는 말을.

[오, 어떤 환자일까요?]

‘미리 깬 척할걸.’

허나 지금껏 몰래 듣고 있던 마당에 환자 얘기 들었다고 일어나는 건 좀 우스운 일 아닌가.

해서 일단은 눈을 감고 있었다.

취한 연기를 하고 있다 이 말인데,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굴이 워낙에 새빨개져 있어서 그랬다.

“수혁이가 이 모양인데 괜찮나, 이거?”

“뭐……. 저도 나름 최선을 다해 명의를 향해 한수혁 두수혁 나아가고는 있습니다.”

“어……. 그래. 늘 그렇게 말하는구나?”

“어떤 말씀이신지.”

“아, 아냐. 전화 받아, 그럼.”

“네, 그럼…….”

그사이 안대훈은 전화를 받았다.

“네, 통합진료센터 안대훈입니다.”

“아……. 안 선생님!“

널리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놀랍게도 안대훈도 꽤 유명인이었다.

아니, 유명인이라는 게 놀라운 건 아닌데 실력으로 유명하다는 게 꽤 놀라운 일이었다.

“아……. 너구나. 말해 봐.”

“네네. 근데 외래로 안 돌려도 될까요? 사실 지금 환자분 문의만 온 거긴 한데요.”

“문의?”

“네. 전원 문의요. 어차피 학회라 당장 오라고 해도…….”

“흠.”

문의라.

안대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말했다.

“아니, 말해 봐. 나 어차피…… 지금 차 탔거든?”

마침 대리 기사님이 왔다.

“어디로……?”

“태화 의료원이요.”

“네? 집으로 안 가시고요?”

“이분이 거기 사십니다.”

대리 기사는 이제 대체 뭔 일인가 싶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보통 집으로 가지 않나?

혹시 술 먹다 다쳤는데 119 대신 대리 기사를 불렀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한 생각은 아니었다.

왜냐.

세상엔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대리 기사 일을 하면서 알게 되어서 그랬다.

“일단 갑시다.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네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은 퍽 멀쩡해 보였다.

일단 정장을 입고 있었고…….

물론 정장 입은 미친놈들도 꽤 봤긴 한데.

이쪽은 조용조용하니 괜찮아 보였다.

머리 없으신 분도 나이가 꽤 있어 보이고, 이런 사람 앞에서 아랫것들이 함부로 나올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지금 병원으로 간다. 그러니까 말해 봐.”

하여간, 일이 해결되자마자 대훈은 행선지를 밝혔다.

상대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안대훈이야 병원에서 사는 인간 아닌가.

펠로우다 보니 숙소가 따로 나오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든 낑겨 살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 환자 55세 여환이고요. 3일 전부터 발열과 오한을 주소로 개인 병원 내원해서 감염 질환으로 진단, 항생제 시행했는데……. 3일 후에도 전혀 호전 보이지 않아 3차 병원으로 전원 되었습니다.”

“3차 병원 어디?”

“강서에…….”

“아, 거기. 그럼 이상한 짓은 안 했을 텐데…….”

“네.”

응급실 레지던트는 보내온 이메일을 줄줄이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잡일이라면 잡일이지만, 통합진료센터 앞에서 감히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쪽에서 치워 주는 환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그랬다.

죽다 살아나는 환자가 거의 매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보니 오히려 눈치를 설설 봐야 했다.

-통합진료센터에는 무조건적으로 협력해!

당장 오늘 아침에도 교수가 이런 말을 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병원 내원 시 혈압은 98에 62, 맥박은 101회 호흡 23회, 체온이…… 39.4도였습니다.”

“항생제 치료를 3일간 했는데?”

“네.”

“어떤 항생제인지는 기록이 없나?”

“아……. 그건 메일에 없는데, 따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근데 개인 병원이라고 했으니 경구 제제일 거라 생각합니다.”

“하긴, 그렇겠네. 그래서?”

이러한 연고로 레지던트는 당시 병원에서 시행한 검사 소견도 다 불었다.

듣다 보니, 안대훈도 그렇지만 옆에 있던 조태진도 느낌이 왔다.

이건…….

불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었다.

“일단 감염은 아니네.”

“네, 그런 거 같다고 합니다. 그쪽에서는 SLE 가능성이 높다고 하긴 하는데……. 환자분이 본원 진료를 강하게 원하고 있다고…….”

“그래, 지금 오시라고 해.”

“지금이요?”

“응. 나 응급실로 바로 갈게. 이수혁 교수님도 계셔.”

“네? 이수혁 교수님? 아니, 그럼……. 네네. 불러야죠! 알겠습니다.”

아무리 교수님이 협조적으로 나가라고 했다고 해도 환자를 지금 부르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해서 선 넘네 싶었는데, 이수혁 교수 얘기를 들으니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가 올 때마다 베풀었던 이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이수혁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 술 취한 이수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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