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월드스타 (1)
“아……. 가기 싫다.”
닥터 스튜어드, 즉 제임스 스튜어드는 호텔방에 선 채 중얼거렸다.
내과 학회는 국제 학회를 표방하게 된 다른 많은 학회처럼 국제 학회를 표방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부 세션은 통으로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부에서 이런 의견이 나왔더랬다.
- 우리나라 사람들만 모여 가지고 있는데 영어 쓴다고 그게 국제 학회가 됩니까? 영어 학회라고 하든가. 뭐야, 이게. 발표하는 사람도 영어 못하고 듣는 사람도 영어 못하는데 불편하기만 하고 말이야.
사실 일부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해 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한글로 해?
그게 합리적인 방책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글로벌 시대고 또 대한민국이 여러모로 국제적인 위상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는데 내과 학회만 뒤처질 수는 없지 않겠나.
“닥터 스튜어드. 그래도 가야지.”
“돈 받았으니 가긴 가는데……. 학회라는 게 원래 뭐 배우는 맛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한국에서 우리가 뭘 배우겠어.”
“그……. 뭐, 이참에 맛있는 거나 먹지 뭐. 그래도 서울 어제 보니까 엄청 크고 화려하던데?”
“하아.”
그렇다 보니 해외 연자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임상 영역에서 대한민국 의료의 위상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건 사실이었다.
또 SCI급 학술지에서 한국 의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의료를 선도하는 건 미국이었고, 자잘한 분야로 내려가도 독일이나 일본 정도가 다였다.
아직 대한민국의 의료는 임상 영역에 갇혀 있었다.
- 꼭 좀 나와 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비행기에 호텔비에 체류비까지 다 줄게!
물론 개개인의 위력은 그래도 꽤 대단해서, 세계 유수의 학자들에게 다이렉트로 초청 전화를 꽂을 정도는 되었다.
아니,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 우리가 남이가’를 시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학회장이나 동종헌 등등, 해외 학회 참석 짬바가 장난이 아니지 않겠나?
그들의 활약으로 무려 10명에 가까운 해외 연자가 초청되어 한국에 왔다.
닥터 스튜어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 보면 도살장 끌려가는 줄 알겠네.”
옆에서 중얼거리는 닥터 트레이시 또한 그런 루트로 초청받아 온 사람이었다.
심장 학회에서 입지전적인 업적을 세운 그는, 특히 부정맥의 대가였다.
그나마 스튜어드에 비해 훨씬 거부감이 덜한 건 이현종 때문이었다.
적어도 심장 내과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이 프론티어였다.
“아……. 귀찮어……. 시차 적응도 안 됐고.”
“누군 됐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편의 봐주는 학회가 어딨다고 그래. 방도 좋은 데 줬잖아.”
“그건 그런데…….”
그에 비해 닥터 스튜어드가 몸담고 있는 혈액암 쪽은 아무래도 좀…….
이쪽이야말로 자본과 인력이 대량으로 갈려 나가야 새로운 것이 튀어나오는 분야라 그랬다.
그중에서도 닥터 스튜어드는 유태인 계열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뭘 하는 데 있어 돈이 부족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 가야지. 뭐.”
거기에 더해 약간의 인종 차별적인 생각도 있긴 있었지만, 스튜어드는 더 입을 털진 않았다.
‘세상이 이상해져서……. 생각하는 바도 괜히 잘못 말했다가는 매장이 되지.’
닥터 트레이시는 꽤 진보적 인사로 알려져서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점심도 이현종인지 나발인지 하는 한국 의사에게 먼저 연락해 같이 먹자고 하질 않았나.
듣자니 같은 심장내과긴 해도 세부 분야는 전혀 다른 거 같은데, 그럼에도 스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싶었다.
“이야…… 택시도 불러 주네.”
“흐음. 밴티……?”
“차가 커. 새 거고. 이런 건 확실히 한국이 미국보다 낫다니까.”
“꼭 우리 어릴 때 잽스 같지 않나.”
“잽스라니……. 2차 세계대전이라도 겪었나?”
“우리 할아버지가 유공자시지.”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 게다가 한국은 원래 우리 편이야. 내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라고.”
“둘이 다른가?”
“거참.”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찌 되었건 간에 웃으며 차에 탔다.
아닌 게 아니라, 학회 측에서 마련해 준 차량이 썩 괜찮아서 그랬다.
옐로우캡하고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밴 차량이 올 줄이야.
심지어 안에는 휴대폰 충전기도 있었다.
“왔다!”
그 시각 수혁을 비롯한 통합진료센터 사람들은 대훈이 미리 예약한 공항 밴을 타고 학회장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일산에 있다 보니 거리가 꽤 되지 않겠나.
게다가 여기 있는 이들은 어제 뜬금없이 환자 보느라 잠도 적게 잔 마당이었다.
그럼에도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술 먹고 뻗어 있던 수혁이 제일 기운이 넘쳤다.
“대훈아, 어디로 가면 되냐!”
“A안과 B안이 있습니다. A안은 레지던트들이……. 각 병원 모털리티 컨퍼런스 때 발표했던 사례 중 치명적이면서도 또 볼 수 있는 사례를 골라 발표하는 세션입니다.”
“흠……. 중요한 세션이네.”
모털리티 컨퍼런스.
환자가 사망했거나 치명적인 합병증이 발행한 사례를 주별로 또는 월별로 발표하는 자리였다.
대개는 질병 경과 자체가 치명적이어서 일이 나쁘게 되지만, 때론 진짜로 의료진들의 실수나 무지, 혹은 그저 임상 의료진의 한계 때문에 악화되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듣는 이에게는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타산지석으로 삼기에 그만한 세션이 또 있겠나.
“B안은……. 이번 내과 학회도 국제 학회지 않습니까?”
“그렇지.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초청 연자가 외국인이면 뭐 하나?
참석자는 외국인이 없는데.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는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알아서 연자도 오고 참석자도 오는 데 반해, 한국 학회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아직 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발표의 수준 자체가 다르니까.
애초에 한국 의사들도 제대로 준비한 발표나 연구는 외국 나가서 발표했다.
“그 초청 연자들의 강연입니다. 사례 위주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흐음……. 이건……. 고민되네.”
어쨌든, 초청 연자들의 면면은 훌륭할 터였다.
아무나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그쪽으로 편성되는 예산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 응? 우리 학회? 우리는 아직 그럴 필요가 없지. 게다가 나중에 싱가포르나 두바이에서도 열면 되잖아. 그럼 알아서 올걸?
이현종조차 손사래를 친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란 얘기였다.
[미국에서……. 나름 재밌었죠?]
‘응, 갈 때마다 재밌었지.’
[누가 보면 엄청 자주 간 줄 알겠습니다?]
‘이제 매년 가지 않을까? 큰일만 없으면 말이야…….’
[아무튼 재미는 있었죠. 레지던트들 발표야……. 뭐……. 언제든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래.’
수혁은 바루다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결정을 내렸다.
두 강의실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교수님, 어디로……. 모실까요?”
“B.”
“네. 이쪽으로 오시죠.”
안대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자연히 김성진을 비롯한 다른 펠로우들도 뒤를 따랐다.
“난 어디 가…… 아. 트레이시? 그럼 나도 가.”
이현종도 주춤거리다가 연자 면면을 확인하고는 가세했다.
그렇게 통합진료센터 밴에 타고 있던 모두가 B안, 그러니까 1홀로 향했다.
끼이익
전장의 사신, 아니, 학회의 사신이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 있던 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
“당연히 2-A홀로 가실 줄 알았는데……?”
“애들 지금 엄청 떨고 있던데……. 여기야?”
“잘못 오신 거 아냐? 여기는 외국 연자들이라……. 학회 측에서 엄청 신경 쓰는 곳인데……?”
이상한 일이지 않나.
보통 초청 연자는 말 그대로 초청 연자다 보니, 오히려 더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아니, 내버려 둔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다고 해야 할까?
평소라면 도끼눈을 뜨고 마구 질문 쳐 던질 개차반 교수들조차 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인성 안 좋은 사람들은 다 2-A홀 즉 레지던트들 쪽으로 가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수혁이나 이현종 역시나 학회에서는 그런 쪽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당연히 여기로는 안 올 거라 여기고 있었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아, 저기 학회장님 가시네.”
“그래. 안내하셔야지. 저 깡패들을…….”
“어허! 이수혁 교수님께 깡패라니. 악마라고 하여라.”
“아……. 그렇지.”
근데 왔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냥 웅성대고 말 일이지만…….
학회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미친놈이 설마 여기 시비 걸러 왔나?’
이수혁이 영어를 못하진 않을까?
그럼 발표해도 질문도 못할 거 아냐.
이따위 기대는 살포시 접어 두는 것이 좋았다.
최근 젊은 교수들은 어디 단체로 유학이라도 갔다 온 건지 뭔지 영어를 잘하지 않나.
심지어 영어 못하기로 소문난 일본 교수들조차 젊은이들은 얘기가 달랐다.
“저기, 교수님들?”
해서 학회장은 비굴한 미소를 띤 채 조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이현종, 이수혁도 허허 웃으며 반겨 주었다.
“오, 학회장.”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찌나 해맑은지 그냥 순수해서 돌아 버릴 거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순수 악 아닐까?
“네네.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강의 들으러 왔지.”
“네? 강의를 들어요? 하하, 농담도. 교수님은 이제 학회 오시면 연구 세션 말고는 강의 안 들으시잖아요.”
“뭔 소리야.”
“그……. 질문하러 오시는 거 아닙니까?”
시비 털러 오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하려다가 겨우 바꿨다.
해서 말이 좀 이상하게 튀어 나갔는데, 다행히 이현종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렇지.”
그리고 절대 원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아니……. 그.”
“왜?”
“여기 초청 연자들 진짜 어렵게 모신 분들이거든요.”
“뭔 소리야. 트레이시는 내가 오라고 했는데.”
“그분 빼고요……. 그분 빼고는 진짜…….”
그나마 동양계.
그러니까 일본 측 교수들은 훨씬 쉬웠다.
가깝기도 하고, 또 그래서 교류가 원래 잦아서 그랬다.
그쪽은 임상이 좀 부족하고, 이쪽은 분자 수준의 연구가 부족해서 서로 윈윈이 되어 주기도 하니 더더욱 그런데…….
“특히 닥터 스튜어드는 진짜 겨우 모셨어요. 그분 때문에 나간 돈이 얼만지…….”
“원래 돈은 좀 쓰지 않나?”
“스위트 룸 아니면 안 오겠다……. 비즈니스석 안 끊어 주면 안 오겠다……. 하루 관광할 때 개인 가이드 없으면 안 오겠다……. 아휴.”
“꺼지라고 하지, 그런 새끼를 왜 불렀어.”
“그…….”
“아, 자네 이거 끝내고 아태 학회장 노리는구나. 거기서 스튜어드가 끗발 날리니까…… 이거 학회 돈으로 어?”
“아니, 아닙니다! 천벌 받을 소리를!”
학회장은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게졌다.
다행한 건 이현종이 날카롭긴 한데, 열을 다른 데서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새끼가 대체 뭔데 그 난리를 쳤어.”
“그……. 유명하지 않습니까? 되게 잘하는…….”
“잘해 봤자 우리보다 못할걸? 우창윤보다는 잘하나?”
“아니, 에헤이. 세계 최고 병원에 있는데…….”
“이 사대주의 새끼. 가 있어 봐. 우리가 조져 줄게.”
“아니, 조지면 안 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