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93화 (993/1,303)

993화 월드스타 (2)

‘조지면 안 된다고……. 조지면…….’

학회장은, 그러니까 좌장을 맡은 학회장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다른 놈이 와서 열불 뻗치게 하는 통에 더더욱 땀이 뻘뻘 흘러나왔다.

“학회장님.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잠시 갔다 오셔도 될 거 같은데요? 아직 시간이…….”

“그런 거 아닐세…….”

“그럼 왜…….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엄청 몰렸습니다. 사실 영어 세션이 그렇게 인기가 있는 편이 아닌데……. 연자로 오신 분들도 다들 흡족해하세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인마 지금이야 흡족해하겠지!

그리고 얘들이……. 레지던트 애들이 여길 대체 왜 왔겠냐?

원래 같으면 영어 세션 들어오라고 하면 갖은 핑계 다 대면서 딱 1년 차한테 짬 때릴 놈들이 왜 싱글벙글 웃으면서 앉아 있겠냐고…….

“그……. 잘된 일이구만.”

학회장이란 자리는 속마음을 다 털어놔서는 안 되는 자리지 않나.

그랬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대신 뒤로 공작을 벌여야 하는데…….

- 아, 알았다니까! 학문적으로 조진다는데 왜 그래?

그게 잘 통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말실수를 하긴 했다.

세계 최고의 병원에서 온 사람…….

이 말을 대체 왜 했을까.

미쳤나?

태화가 공공연히 세계 최고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현종과 이수혁은 그 선봉에 선 사람들인데…….

‘개인적으로만 놓고 보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어.’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긴 했다.

아무래도 이게 좀…….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 최고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나?

물론 이런저런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나오긴 한다지만, 아직 학문적인 성과로는 노벨상 하나 타지 못한 나라다 보니 이쪽으로는 영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다.

‘그래……. 스튜어드. 닥터 스튜어드의 역량을 믿자.’

학회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가며 스튜어드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미소로 화답하지 않았다.

그저 뚱한 얼굴이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실력 하나만은 대단했고, 또 잘 보이면 콩고물이 떨어질 거 같은 사람이다 보니 알랑방귀를 뀔 수밖에 없었다.

“자……. 세션 곧 시작합니다. 아직 복도에 계시거나 강의실 내에 서 계시는 분들 자리로 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학회장은 쳐야 할 멘트를 쳤다.

어쩔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확실히 학회장이자 좌장의 명은 지엄한 것이라 곧 다들 자리에 앉았다.

“그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연자분을 소개합니다.”

그렇게 세션이 시작되었다.

제일 많은 돈을 들였고, 또 제일 많은 공을 들인 세션이니만큼 개인적으로 여러 교수들에게 자리 좀 지켜 달라고 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어그로 끄는 데는 딱 두 명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이현종, 이수혁.

둘을 따라 들어온 레지던트들이 엄청 많다 보니 홀이 좁은 것도 아닌데 다소 비좁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한국…… 학회 분위기가 원래 이런가?’

심지어 기이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앉아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좀 젊다 싶은 사람들은 뭔가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레지던트라는 존재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세계 어디서 수련을 받건 간에 개고생을 하기 마련이거늘, 이토록 강렬한 배움에 대한 열망을 어찌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한국 전쟁을 겪고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건가?’

닥터 스튜어드는 꽤 놀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시하는 마음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강의를 듣겠답시고 이러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이 분위기 만큼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이만한 분위기는 느껴 보지 못했으니.

“자, 다음은……. 닥터 스튜어드를 모시겠습니다. 닥터 스튜어드는 존스 호킵스 의대를 졸업해 엠디 앤더슨에서 수련을 받고 메이요 클리닉에 스텝으로 있다가, 현재는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내분비내과 과장으로 재직 중이신 재원입니다. 희귀한 내분비 질환 사례에 대해 강의해 주시겠습니다. 자,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마운트 시나이 병원.

맨해튼에 있는 병원으로, 만연해 있던 유태인에 대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병원이었다.

금융계 쪽에서 유태인들의 위력이 어떠한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 자신을 위한 병원이니 돈이 진짜로 미친 듯이 들이부어졌다.

동시에 닥치는 대로 인재를 끌어왔는데, 러시아의 의사도 백지 수표 주고 데리고 왔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즉 가히 세계 최고의 병원 중 하나라는 말이 과언은 아니란 말이었다.

“수혁아.”

“네. 마침 사례라니, 좋네요.”

과언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무조건 괜찮을 수도 없지 않겠나?

특히 이현종은 젊은 시절 하도 무시를 당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더더욱 공격적이었다.

수혁?

수혁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랬다.

첫 번째 강의가 들었던 것과는 달리 정말로 특별할 것 없는 케이스를 중심으로 한 강의여서 더 몸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간다, 그럼.”

“네.”

수혁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좌장 자리에 앉아 있던 학회장이 확인했다.

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저럴까.

이해가 안 갔다.

‘파이팅. 닥터 스튜어드.’

할 수 있는 건 오직 응원과 기도뿐이었다.

여러 심정이 섞여 들어간 가운데, 발표가 시작되었다.

“제 강의는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어려운 케이스가 다 모이는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면……. 평생 가도 볼일이 없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다 이해할 생각보다는 그냥 이런 것도 세상에 있구나, 뭐 이런 느낌으로 들어 주시면 됩니다. 다음.”

보통 해외 초청 연자로 오면 정말 빈말이라고 해도 초청해 줘서 영광이라는 말도 좀 하고, 와 보니까 참 좋더라, 여행하고 싶더라라는 둥 초청해 준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게 예의 아니겠나?

또 외국인들 대상 강연이니만큼 말도 좀 또박또박, 천천히 하는 게 예의였다.

아니, 기본이라고 해야 할까?

허나 스튜어드는 그러한 기본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시건방진 말이나 하고 있었다.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 더 기분 나쁘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아직 전 세계의 환자들이 다 모인다고 하기에 한국의 의료는 명성이 모자랐다.

“저 쌍놈의 새끼.”

“후우. 걱정 마세요.”

배려 따위 없이 빠르게 내뱉은 영어였음에도, 그러니까 통역사 수준이 아니면 몇 마디 놓치는 것이 당연했을 영어였음에도 이현종과 수혁은 다 알아들었다.

그리고 전의를 다졌다.

“첫 번째 사례입니다. 사례부터 말씀을 드리고……. 진단명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우튼 시나이의 케이스고요, 당연히.”

그러거나 말거나 스튜어드는 강의를 이어 나갔다.

“8개월 남아. 재태 연령 40주에 출생 체중 3.95kg, 인종은 화이트 코카시언입니다.”

‘아……. 인종을 알려 주는군.’

[아무래도……. 인종별로 자주 발생하는 질환군이 다르기도 하니까요.]

‘그래, 이게 습관이 되어야 세계적인 진료를 할 수 있겠지.’

[이거 하나는 배워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혁은 싫은 건 싫은 거고 배울 건 배운다는 마음으로 강의를 들었다.

“특이 병력은 전혀 없었고, 설사를 이유로 다른 병원에 내원하여 시행한 검사에서 간 효소와 근육 효소 수치가 증가 되어 마운트 시나이 병원으로 전원이 되었습니다. 간 효소의 증가는 사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소견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 설사가 반복될 경우, 8개월 정도의 영아에서는 탈수가 훨씬 쉽게 일어나기에 딱히 간 효소가 더 많이 유출이 되지 않았더라도 농도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죠.”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럴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임상 의사는 다들 유추가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또 대한민국의 임상 의사는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 것이 당연했기에 대다수의 청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아는 척하기는…….’

스튜어드는 그런 꼴이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또 장염이 심한 경우, 전신 염증의 일환으로 간 수치가 올라갈 수 있죠. 하지만 근육 효소는 얘기가 다릅니다. 물론 패혈증 수준의 감염 소견을 보이고 있다면 이 또한 오를 수 있겠으나 당시 환자의 전신 상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ck가 1061 IU/L이었습니다. 높죠.”

1061.

그냥 높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엄청 높은 수치.

수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초음파를 해 봐야겠는데…….’

[네.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스튜어드가 말을 이었다.

“내원 당시 시행한 흉부 엑스레이와 초음파 소견입니다. 엑스레이에서도 보시면 심장 비대 소견이 있습니다. 초음파에서도 비후성 심근병증을 보이고 있죠.”

‘흐음…….’

[뭐로 진단을 내렸을까요?]

“검사 당시 영상입니다. 장염 때문에 설사를 한 탓에 기운이 좀 없어 보이죠.”

‘저건…… 장염 때문에 기운이 없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네. 만약 장염 때문에 기운이 없는 것이라면, 탈수 소견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아이의 피부나 입술 소견은 탈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근데 영상이 묘하게……. 아, 촬영 날짜가 15년 전이야.’

[으음……? 그렇게 옛날 영상이라고요?]

다른 이들은 그냥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찍었나, 왜 보여 주나 싶긴 해도 일단 봤다.

왜냐.

시간도 별로 길지 않았을뿐더러, 영어가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도 힘들어서 그랬다.

허나 수혁에게 영어가 문제가 되겠나?

아니지.

거기에 더해 수혁은 바루다와 하도 오랜 시간 토의를 해 왔기 때문에 고속으로 사고를 진행하는 게 가능했다.

‘이상해. 너무 처져 있어. 단순히……. 비후성 심근염증이 아닌 거 같은데.’

[네, 더 검사를 해 봐야겠는……. 안 하네?]

그렇게 벌써부터 의심을 품고 있는데, 스튜어드의 다음 화면엔 진단명이 떡하니 떴다.

“처음엔 단순 비후성 심근염증으로 진단 후 베타 차단제를 처방했습니다. 사실 간순 비후성 심근염증이라면 그렇게 예후가 나쁘지 않죠. 헌데 한 가지 이변이 발생합니다.”

수혁은 손을 들까 말까 하면서 발표를 들었다.

이변이라지 않나.

금세 수정했다면 뭐…….

예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하긴 뭐해도 저 정도면 어느 병원에서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동생도 검진에서 근육 효소가 증가해 있어 검사를 해 보니 비후성 심근염증을 보였어요. 가족성 비후성 심근염증의 가능성이 가장 높죠. 그래서 두 남매 모두 베타 차단제를……. 음?”

아니, 아니었군.

수혁은 어휴- 하면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기대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학회 진행 보조 요원을 맡은 레지던트가 부리나케 달려가 마이크를 건넸다.

“질문 있습니다. 괜찮겠죠?”

“뭐, 해 보시죠.”

수혁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긴장했을 텐데.

아쉽게도 스튜어드는 그렇지가 않았다.

여유 있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 해 보라고 하면 어떡해!’

좌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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