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화 월드스타 (4)
좌장의 멘탈이 나로호처럼 우주를 향해 힘차게 뻗어 가는 동안, 스튜어드는 놀랍게도 홀로 이 위기를 타개하고 있었다.
아니, 타개하고 있다고 하기는 좀 뭐한데…….
합리화를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터였다.
‘저 자식……. 심장유전질환 전공일 거야. 그래. 여기가 지금 내분비내과 학회가 아니라 내과 학회니까……. 그러니까 별의별 놈들이 다 올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감히 자신의 말에 저 젊디젊은 놈이 토를 달 수 있겠나.
심장유전질환 전공…….
그렇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 그렇지 않겠나?
그래야만 했다.
“후우…….”
머리 좋은 사람답게 짧은 시간 안에 합리화를 끝내고, 남아 있던 한은 한숨으로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봐야 툭 튀어 나왔던 눈물기는 남아 있었지만 역시나 빛이 밝아서 청중들은 저 양반이 우는지 어쩌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습니다.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대안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대부분의 의료진들도 가족성 비후성 심근염으로 진단했을 거라 생각하고요.”
하여간, 스튜어드는 바득바득 우기기 시작했다.
그래, 네 말 들어보니까 완벽하진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니들도 나랑 같을걸?
물귀신 작전까지 사용한다 이 말인데…….
‘아……. 약간 추한데?’
뒤에 있던 좌장은 이마를 짚었다.
‘이런 거……. 저 인간들이 제일 못 참는 거 아닌가……?’
단지 추해서만은 아니었다.
수혁이 어떤 인간 말인가.
저 인간…….
상대가 꿈틀하면 더 짓밟는 사람이었다.
특히 회개해야 할 타이밍에 그러면 인정사정없었다.
이현종보다는 낫다지만 그건 이현종이 너무해서지, 이수혁이 유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최선이라……. 제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요.”
“네? 아니, 그럼 선생님은 지금 다른 진단명을 떠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당연하게도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좀 더 복도 쪽으로 나왔다.
마이크를 꾹 잡고서였다.
스튜어드는 살짝 당황했다.
그래, 진단명이 틀렸다고 할 수는 있었다.
아니면 좀 미흡했다고 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다른 진단명을 대는 건 아예 다른 얘기였다.
그건…….
‘불가능하지. 내가 지금 많은 단서를 내비친 것도 아니고……?’
사진과 영상에 날짜가 쓰여 있다는 것, 그리고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꽤 있다는 것, 심지어 초음파에서조차 수혁이 습득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을 모르는 스튜어드로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무엇보다 이 질환은…….
진짜로 드문 병이었다.
50000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데, 그마저도 지연되어 진단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저런 근거를 영혼까지 끌어모은 스튜어드는 간신히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수혁은 그런 스튜어드의 반응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방금 보여 주신 영상을 보면……. 심장 초음파를 하기 위해 자세를 살짝 바꾸는 장면이 있죠.”
“응?”
“영상 3초에서 3.4초 사이. 아주 잠깐 하고 넘어가는데……. 네, 옆에서 좀 도와주시죠. 정확한 장면을……. 네, 거기 있네요.”
“아니…….”
수혁은 영상을 복기하고 있었다.
[잘 잡았군요.]
‘대행사 직원분들이 컴퓨터 잘한다니까.’
[저거랑 컴퓨터 잘하는 거랑은 딱히 상관없을 거 같은데…….]
‘아무튼. 넘어가.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넵.]
그리고 그의 지시에 따라 직원 하나가 아까 화면에 있던 영상의 3.2초가량을 잡았다.
그러자 흐릿한 화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양팔을 잡아서 위로 끌어 올리는 이 장면……. 8개월 아이라면 목을 아주 자연스레 가눌 수 있어야 하는데……. 보시면 목이 뒤로 처져 있죠? 멈춰 놔서 너무 흐릿하게 보이는데……. 전형적인 head lag 양상입니다. 아마 정상적으로 보였어야 할 운동 발달에서 상당한 지연이 있었을 겁니다.”
“어…….”
여기서 그걸 잡아낸다고?
스튜어드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혁이 말했던 것처럼 흐릿한 잔상만 떠 있을 뿐이었다.
“못 미더우시면 한번 재생을 시켜 보시죠.”
“어…….”
허나 재생이 되자, 딱 목이 뒤로 젖혀지는 게 보였다.
세데이션, 즉 진정을 시킨 상태가 아니었으니 저건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확실히 8개월 된 아이가 보일 만한 소견은 아니었다.
‘그때……. 그런 보고가……. 있었나?’
스튜어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당시 상황을 복기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오래된 케이스인 데다가, 꽤 여러 번 단순히 자랑하기 위한 발표를 이어 온 탓에 정확한 과정을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단지 결과만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사실 저런 식의 검사는 아이에게 있어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보다 훨씬 사람들이, 심지어 익숙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와서 검사를 하는데……. 아이의 표정을 주목해 주세요.”
“으음.”
스튜어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청중들의 관심 또한 수혁에게 집중된 지 오래였다.
그저 그의 말에 따라 영상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표정하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라……. 근육 긴장도 저하가 있어서, 표정의 변화가 두드러지지 못하는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 뚝 떼어 놓고 본다면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아이에게서 비정상적인 근병증이 있음을 확인했죠.”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찍은 지 꽤 오래된 건지 뭔지 화질이 아주 좋아 보이지도 않는 영상으로, 그것도 목적이 환자 시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검사를 했는지 보여 주는 데 있는 영상으로 이만한 추론이 가능하다니…….
이건 역시 괴물이었다.
“미쳤다.”
“역시…….”
“나루호도.”
“스고이.”
애초에 수혁의 진단 과정을 보러 들어와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반응도 좋았다.
스튜어드만이 죽을 맛이었다.
막말로 아직 대한민국은 의료에 있어서는 적어도 미국에 비하면 변방이지 않나.
아침에도 그렇게 무시하며 왔던,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왔던 강의장에서 이런 암초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고가 반쯤 멈추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아이의 호흡을 보시면, 호흡을 할 때마다 아주 살짝 액세서리 근육이 쓰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영상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사람조차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보다 고화질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튜어드가 제정신이었다면 억측이라고 했을 것이 뻔할 정도로…….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을 수혁이 앗아 간 상황이었다.
대부분은 그저 그런갑다-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는 사람도 감히 수혁의 말에 반박할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왜냐?
좀 무서워서 그랬다.
‘혹시 기억했다가 내 발표 시간에 마이크 잡고 일어서면 어째?’
저 날카로운 질문의 포화를 옆에서 보는 것도 오금이 저려 오는데, 그걸 직접 당해?
안 될 말이었다.
“그 말은 곧 횡격막의 움직임도 조금이나마 저하되어 있을 거란 말이 되죠. 이런 식의 증상을 보이는……. 그러면서도 비후성 심근병증을 동반하고 또 유전 경향을 강하게 나타내는 질환은……. 하나뿐인데. 닥터 스튜어드.”
“…….”
수혁의 말에 스튜어드는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멘탈이 나로호 따라 우주에 갔다가 아직 안 돌아와서 그랬다.
멍하니 있는 것을 본 수혁이 재차 물었다.
“닥터 스튜어드? 무슨 생각합니까?”
“아? 아아아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스튜어드는 그 자리에서 10년은 늙은 듯 보였다.
심지어 뒤에서 보고 있는 좌장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지경이었다.
사람 자세가 저렇게 극명하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달까?
다행한 건 이젠 더 이상 울지는 않는다는 건데…….
‘울지도 못하는 건가……?’
이따 가서 위로를 엄청나게 해 줘야 할 거 같았다.
어떤 위로를 어떻게 해 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폼베병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데, 실제 케이스에서는 어땠습니까?”
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어떤 질환명을 입에 담았다.
좌장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폼베이?
화산에 멸망한 도시?
뭐 이딴 생각이 들던 것도 잠시였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일어나 달리고 있었다.
질환명을 들은 스튜어드가 무릎을 꿇어서 그랬다.
“갑자기……. 뭐 하십니까?”
수혁의 말에도 답하지 않았다.
풍이라도 왔나 싶었다.
‘그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근육 톤이 제대로 살아 있어요. 저건 그냥……. 뭐랄까……. 회개의 표시 아닐까요?]
‘회개라니……. 너무 종교적인 단어 쓰지 마. 네가 안대훈이냐?’
[실로 모욕적인 언사로군요……. 하지만 인정합니다. 제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회개……. 아니, X발. 정정하겠습니다.]
물론 수혁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는 덕에 한눈에 상대방이 그렇게 문제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어서 그랬다.
“저…….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일개 인간일 뿐인 좌장은 가서 물어야 했고, 스튜어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좌장을 돌아보았다.
“어……. 네, 네. 어……. 아니, 이걸 어떻게……. 이 자료 혹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네? 자료요? 아, 발표 자료? 아뇨. 그럴 리가요. 자료도 아까 주셨잖아요. 대행사 직원들이 똥줄 탔습니다.”
“아, 그랬지. 근데 어떻게……. 아, 저 사람이 심장 질환 전공이죠? 그렇다고 말해요.”
“아……. 아닙니다. 그냥 이것저것 다 보는 분인데.”
“무슨……. 어떻게 한국에서…….”
완전 제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연단에 서서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게 좀……. 좀스럽지 않나?
특히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부적절했다.
갑자기 무릎을 꿇어서 이끌어 냈던 동정심을 바로 삭제시키는 그런 문장이었다.
“아무튼, 좀 쉬실까요?”
“아, 아뇨. 아닙니다. 이 케이스는 우연이에요. 절대로 제대로 된 추론이 아닙니다. 의학은 점성술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좌장은 그런 스튜어드를 이끌어 내려 했지만, 스튜어드는 마치 무협지에서 고강한 무공을 갖춘 젊은이만 보면 ‘사술이다!’를 외치는 엑스트라 중견 고수라도 빙의한 것처럼 도리질을 치고는 다시 우뚝 섰다.
‘주화입마라도 온 건가?’
좌장이 볼 때는 이대로 더 얘기를 해 봐야 더 큰 일만 생길 거 같은데…….
그렇다고 완력으로 말리기도 어려웠다.
덩치도 더 큰 데다가, 일단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 그럼. 파이팅입니다.”
“네, 바로 다음 사례로 넘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