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7화 월드스타2 (2)
수혁은 진짜로 별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그러나 늘 그렇듯 정확한 발음과 말투로 화면에 떠 있는 병리 사진 소견을 읊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말 그대로 소견서를 보고 읽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막힘 없는 판독이었다.
“간 조직 검사 소견을 보면 간문맥의 염증과 간경변 소견이 있습니다. 그 외 조혈 현상도 보이고……. bsep의 부분적인 발현 결핍과 cd10의 완전 발현 결핍이 보여……. 이를 종합해 봤을 때 진행성 familial intrahepatic cholestasis 2형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허나, 마지막 말, 그러니까 질환명을 듣고 난 스튜어드는 저도 모르게 비열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
확실히 병리조직검사에 대한 판독 소견 자체는 전문가들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까지 판독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실제로 병리과 교수도 가능한 진단명 1번에 진행성 familial intrahepatic cholestasis 2형을 주긴 했다.
왜냐?
이것도 그리 흔한 질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하여간 이러한 양상을 보일 때 가장 흔한 질환 중 하나였다.
그러니 합리적인 선택일 텐데…….
‘아니지……. 이건 진짜 어마어마하게 희귀한……!’
스튜어드는 벌써 이겼단 생각에 득의양양해지고 있었다.
그가 하나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어서 그랬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격언.
이게 단지 언어를 말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냥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보다 드문 질환으로는 bile acid의 합성 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후자의 경우엔 하나의 질환이 아닌, 이를 일으킬 수 있는 질환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검사를 좀 더 진행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
방심하고 있던 스튜어드의 얼굴이 멍청하게 변해 버렸다.
누가 뒤통수라도 때렸나 싶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정작 때린 장본인인 수혁은 여상한 말투를 고수하고 있었다.
“혹 추가적으로 어떤 검사를 진행하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같지만…….
수혁의 눈빛을 정면에서 받고 있는 스튜어드로서는 그런 속 편한 생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추궁인데……. 으읏…….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망할.
스튜어드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리고 있으려니, 수혁이 재차 물었다.
“말해 주시죠. 어떤 검사를 진행하셨습니까?”
“음……. 일단 CT를 찍었습니다.”
“아. CT. 이건 병리 검사와는 별개로 이루어진 것이겠군요?”
“그……. 네.”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모노드라마 같은 강의라 할 수 있었다.
스튜어드 혼자서 우쭐대다가 쪼그라들었다가, 울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우쭐대다가 또 혼쭐이 나고…….
‘저 사람 좀 모자라 보이지 않아? 갑자기 또 굽신거려.’
‘너 영어 잘 못하지? 지금 이수혁 교수님한테 개발리고 있잖아.’
‘그……. 응. 통역 왜 안 해 줌?’
‘미리 공지했잖아. 실시간 통역 없을 거라고.’
‘아무튼, 재밌네.’
‘못 알아들어도?’
‘대강은…… 의학 용어만 알아듣고 있음.’
‘그럼 됐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의사들은 영어를 잘하겠거니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에 공부 좀 해야 갈 수 있는 게 의과 대학이기도 하거니와, 또 논문도 대개 영어로 된 것을 보고 있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긴 모양인데…….
물론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의학 용어를 벗어난, 진짜 영어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그저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강의와 이어지는 문답 정도는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의학 용어의 포션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랬다.
“그…….”
“왜 그러시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혁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는 스튜어드에게 물었다.
이 인간이 CT를 띄워 놓고는 또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랬다.
아까보다는 훨씬 못하긴 했다.
기대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한 줄기 희망 아니, 집착이 느껴진다고 하면 옳을 거 같았다.
“이 영상에 대한 판독도 가능하시면…….”
“이건 진짜 판독이 필요치 않은 영상 같은데요.”
“그래도 기왕 일어서신 김에요.”
“뭐, 알겠습니다.”
CT 영상 판독.
그중에서도 복부라면 꽤 어려운 것이 맞았다.
영상의학과 전문의들 사이에서도 복부는 진절머리 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실제로 응급 판독 당직을 설 때, 복부 관련한 영상은 분과 전문의에게 따로 요청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하지만 병리 사진에 비하면 난도가 확 떨어졌다.
왜냐?
병리 사진은 사실 임상 의사들이 아예 쳐다볼 생각도 안 해서 그랬다.
“일단 복수가 많고……. 간의 우엽은 위축이 되어 있는 데 반해 좌측은 비후되어 있군요. 또 비장 비대가 있고. 자세한 수치까지 필요하십니까?”
하여간 수혁은 역시나 이 인간은 별걸 다 묻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 주었다.
“아, 아닙니다.”
정확한 수치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 질척대는 느낌이지 않나.
게다가 임상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수술을 고려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외과 의사 입장이라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스튜어드는 내과 의사였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의사들 또한 내과 의사였다.
“네, 그럼……. 다음 검사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검사를 해야 했는지…….”
“사실 진행성 familial intrahepatic cholestasis 2형이라면 여기서 더 검사가 필요치 않을 수 있죠. 간이식을 기다리는 것이 방법일 겁니다만……. bile acid 합성 장애라면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검사는 이에 대한 검사여야 합니다. 이해하셨죠?”
이제 수혁은 스튜어드가 아닌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회장에서만큼은 그렇게까지 보기 힘든 광경은 아니었다.
질문에 나섰던 이가 강연을 이어받는 거…….
발표자가 레지던트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안 돼…….’
하지만 상대가 해외 초청 연자인 경우라면 얘기가 많이 달랐다.
‘넌 또 왜 나라 잃은 표정만 짓고 가만히 있어!’
좌장은 아까부터 짚고 있던 이마를 쿵쿵 두들겼다.
가뜩이나 최근 스트레스 때문에 넓어지고 있던 이마인데, 오늘 더더욱 넓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 스튜어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 좌장은 머리통에서 머리카락을 뚝뚝 흘렸지 않나.
“이 bile acid, 즉 담즙에 대한 검사는 주로 소변을 이용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여과지에 묻힌 소변을 이용하는데……. LC/MS/MS을 이용한 유도체 분석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에 대한 검사 설비 및 시약이……. 국내에는 없고 일본에는 있습니다.”
강의는 더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 이쯤 되면 강연자가 병신이 아닌 이상 뭐라고 하면서 나서야 할 텐데, 어째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입은 다물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스튜어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숫제 단상에 기대고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엎어졌을 터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어떻게……. 이걸 다 알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발표고 나발이고 이제 됐으니까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수혁은 스튜어드를 그렇게 놔둘 리 없는 인간이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검사를 시행했습니까?”
또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그냥 강의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이어 나갔으면 했는데…….
“했다면 결과를 말씀해 주시죠. 진단까지 맞춰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자료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자료가 있어야 더 강의를 이어 나갈 수 있다 이 말인데…….
그 자료는 애석하게도 스튜어드 본인에게 있었다.
그리고 스튜어드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이 내가 동양 놈에게……?’
이상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입술도 달싹이지 못하는 상태라 입 밖에는 의미 있는 언어가 아닌 그저 거친 숨만 내뱉고 있었다.
“똥 마려우신가?”
수혁은 그런 스튜어드를 보면서, 합리적인 추론을 해냈다.
갑자기 사람이 저렇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 않나.
급똥.
대부분의 사람이 항거 불가능한 고통을 느끼는……. 질환 아닌 질환.
해서 수혁은 학회 대행사 직원에게 눈짓을 보냈고, 직원은 오랜 경험을 통해 스튜어드는 이미 글렀다는 걸 알았기에 알아서 화면을 넘겼다.
“어……. 되게 시행착오가 많았네요? 쓸데없는 검사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이거.”
수혁은 대개 한두 장 넘어가면 결과가 나올 거라 예상했었는데, 지금 넘어간 화면만 거의 열 장이 넘었다.
별의별 검사를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지막 몇 장을 남겨 둔 상황에서 딱 수혁이 말한 검사를 시행하긴 했다는 점이었다.
“결과가……. 아, 뜨네. 3b-Hydroxy-5-cholenoic acid가……. 47.0 mmol/mol Cr……. 전체에서 86%군요. 엄청나게 증가해 있어요.”
그리고 수혁은 그 검사 결과를…….
대다수의 임상 의사들에게는 그저 암호처럼만 느껴질 결과를, 당연하게도 처음 결과를 받았던 스튜어드 또한 그렇게만 느꼈던 결과를 별다른 망설임 없이 해석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조차 없었던 것을 그냥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저 3b-Hydroxy-5-cholenoic acid를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 효소란 곧 oxysterol 7a-hydroxylase인데, 이것이 결핍되어 있군요. 이 효소의 결핍증은, 진짜 드문 질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10개의 케이스도 채 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단을 놓쳤을 가능성을 고려한다 해도 추정되는 유병률이 백만 분의 일 정도 되죠. 이런 걸 강의하시다니……. 여기가 내분비 유전질환 학회도 아니고 그냥 내과 학회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셨나 봅니다.”
아니, 진단까지 전광석화로 이루어 냈다.
그뿐만 아니라 유병률이나 현재까지 알려진 증례 보고 수준까지 말해 주었다.
‘아니……. 이게……’.
스튜어드는 이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혁은 그런 스튜어드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수준까지는 몰라도 됩니다. 왜냐면……. 이쯤 되면 다학제가 열리게 되고, 또 치료는 어차피 대개의 경우 간이식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빨리 진단해 낸다면야 더 좋기야 하겠지만……. 그냥 의뢰를 주세요. 여러분이 알아야 할 질환은 이것보다 더 흔한 질환입니다. 이 정도로 드문 질환은 정말 증례 보고용으로만 알아두면 됩니다.”
스튜어드를 잘근잘근 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좌장님. 저분 저거 저러다 싸실 수도 있겠는데, 빨리 안내해 주시죠.”
아니……
짓밟았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