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98화 (998/1,303)

998화 초청 연자들 (1)

“아.”

좌장은 외마디 탄식을 흘렸다.

한 세션을 책임진 좌장이 아니, 학회장인 그가 내뱉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마터면 쌍욕을 내뱉을 뻔했으니까.

“이, 일단 일으키지.”

“네네.”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 건 매한가지였다.

마이크에서 떨어져 스튜어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뒀다간 진짜 수혁 말대로 단상 위에서 똥이라도 지릴 판이다 보니 서둘러야만 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렇게 건방을 떨었어…….’

학회장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인 스튜어드를 간신히 부축하고 내려왔다.

“어디로……. 자리로 모실까요?”

어찌나 무거운지 잠깐 사이에 건장한 편에 속하는 대행사 직원조차 땀에 푹 젖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자리에 짱 박아 두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차올랐지만…….

‘아니, 아니지..’

이 양반을 이 상태로 여기에 둔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지금이야 정신이 나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지만 나중에 딴소리하면 어쩐단 말인가.

사실 이미 아시아 태평양 학회장은 나가리 난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듣지 않은 이상 실낱같은 희망을 아예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학회장은 도리질을 친 후,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로. 휴게실로 가죠.”

“아……. 네.”

대행사 직원이 한숨을 푹 쉬었지만 학회장은 모르는 척했다.

일단 스튜어드를 밖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참이었다.

그 말은 곧 남에 대한 배려를 비롯해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 이 말인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좌장이었다.

“그…….”

다른 대행사 직원에게 이끌려 나온 학회 사람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해외 초청 연자들은 중요하니까 자기가 좌장 맡아야 한다고 그렇게 바득바득 우기더니…….’

학회장이 미쳤나 싶었다.

‘이게……. 어찌 보면 이현종 교수님 때문인데.’

원래 학회장은 그릇이 그리 큰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학회장으로 만족할 사람이었다.

아니, 그릇이 어지간한 사람도 학회장이면 만족하는 게 보통이었다.

헌데 이현종, 이수혁 부자가 가세하면서 얘기가 좀 달라졌다.

이 둘이…….

논문을 써 주면서 또 발표를 해 주면서 학회의 위상이 가파르게 올라서였다.

점차 이 양반의 망상이 과대해진다 싶더니…… 결국엔 아시아태평양 학회장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정치질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 그랬다.

‘그러더니 봐라……. 저런 양반들은 그냥 재앙 같은 사람들인데……. 한때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불었다고 뭔…….’

둘이 도와주면 된다고 하더니 막상 봐라, 뭘 도와줘?

아예 박살을 내 버렸는데.

‘에이……. X발.’

이사급도 아니고 위원급, 그러니까 주니어 교수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따위 욕은 속으로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냥 너무 높은 사람들 앞에 서니까 슬슬 두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해서 가타부타 말없이 일단 연자부터 세우기로 했다.

진행이 매끄럽지 못해 죄송하다느니, 뭔가 차질이 있었다느니 하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에……. 다음…… 네. 기타노 타게시 교수님이 발표를 맡아 주시겠습니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단한 희귀 질환 사례입니다.”

무작정 끌려 나온 기타노 타게시.

동경 의과 대학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일본 의료계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생화학 연구의 대가이기도 했다.

나이도 대개 국제 학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들이 그러하듯 40대 후반이었고.

여러모로 어딜 가나 떵떵거려도 좋을 만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소개와 함께 위로 올라오자마자 대뜸 고개부터 숙였다.

“이수혁 사마님 앞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

수혁은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었다.

왜냐?

방금 한국말로 했거든.

유창하다고까진 못하겠지만…….

“하하.”

그렇게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안대훈이 웃었다.

“뭐야.”

“일본은 가깝지 않습니까. 포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죠.”

“내가 일본 가 본 적이 없는데…….”

“영상은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한류 모르십니까.”

“아니…….”

한류는 의사가 아니라 연예인들 얘기 아니니?

이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 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제가 발표할 주제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단한 희귀 질환입니다. 아시겠지만 유전 질환은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종류를 점차 늘려 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같은 분류로 묶여 있던 질환이 알고 보니 다른 질환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고, 또 아예 진단이 안 되었던 질환을 비로소 진단하게 되는 경우도 많죠. 이것은 우리 같은 임상 의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일부 실험실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직접 실험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연구가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는 아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사례 강의이지 않나.

뭐…….

이 양반은 처음부터 존경을 표했으니 아까처럼 대놓고 패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게 생기면 참을 수 없을 터였다.

수혁은 그런 인간이었으니.

“첫 번째 사례입니다. 이 환자의 경우엔 저희가 직접 진료한 환자는 아닙니다. 임상적으로 저희 병원보다 훨씬 훌륭한 병원에서 진단 직전까지 하고, 저희 병원으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사례입니다.”

헌데 그럴 수가 없었다.

“대훈아……. 저거…….”

“네, 저희가 진단한 환자입니다. 의뢰를 드렸었죠.”

“그……. 그렇긴 하지. 우리 병원에서 안 되는 질환이었으니까.”

이제 대다수의 유전 질환에 대한 검사는 국내에서 가능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는 불가했다.

한민족의 나라다 보니, 한국 사람에서 주로 호발하지 않는 질환의 경우엔 완전히 다 구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랬다.

그럴 땐 검체를 따로 보내야 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은 기이할 정도로 이러한 검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물을 많이 건너갈 필요는 없었다.

“근데……. 설마 모든 사례가……?”

“네, 설마가 사람 잡죠. 지금 저분이 저희 사례를 기본으로 해서 일본 내 학회에서도 강의 중입니다.”

“아니……. 이러면 난 좀 재미가 없잖아.”

다 아는 사례라면…….

게다가 어떻게든 수혁이나 이현종이 관여한 사례라면 진단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을 턱이 없지 않나.

너무 과대한 평가 아니냐고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근 1년 사이엔 와-이건 진짜 너무 어려워서 죽을 거 같다 수준의 케이스는 없었다.

‘아니……. 교수님. 사람을 죽사발을 내 놓고 재미가 없다뇨?’

안대훈은 툴툴거리고 있는 수혁을 보면서 감히 이런 생각을 했다.

불경한 일이긴 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좀 심했거든.

‘어떻게 보면 좌장까지 쫓겨난 상황인데……. 재미가 없다니요…….’

그 사람이 다시 강의할 수 있을까?

권투 선수들도 많이 맞는 시합을 하고 나면 타격 공포증에 시달린다는데…….

스튜어드인지 나발인지 하는 사람은 거의 눕혀 놓고 패는 것처럼 당하지 않았나?

정정당당한 시합도 아니었다.

그건…….

‘그래, 차라리 고문이랄까?’

못 내려오게 놓고 팼는데 이런 시무룩한 표정이라니.

‘과연……. 신과 악마는 동전의 양면인가.’

안대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대화를 했다면 신앙을 잊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는 몰라도 안대훈의 신앙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교수님 일단 쉬어 가시죠. 다음 세션도 재밌을 겁니다.”

“아, 그렇다고 했지, 그래. 음. 뭐……. 이런 강의도 좋긴 좋아.”

“네. 그렇죠.”

“내가 한 걸 내 입이 아니라 다른 사람 입으로 자랑하고 있잖아? 대리……. 잘난 척이랄까?”

“아, 그 부분이 마음에 드셨군요. 네.”

눈앞에서 이따위 말을 하고 있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수혁이 너무 대단해서 그런 면도 있었다.

지금 기타노 타게시가 떠들어 대는 사례들도 어마어마한 사례지만…….

‘아까……. Oxysterol 7a-hydroxylase 결핍증은……. 대체 어떻게 그런 검사를 생각하고 또 해석할 수 있지……? 아무것도 찾아보지도 않고 말야.’

스튜어드의 사례는 정말이지 미친 사례 아니었나.

전 세계에 10개의 사례도 채 보고되지 않은 사례였고, 심지어 그 난이도도 어마어마했다.

스튜어드가 일부러 소견을 다 지워서 그랬는데, 수혁은 그런 건 방해 축에도 못 낀다는 듯 파죽지세로 진단해 버렸다.

‘와……. 근데 이수혁 교수님이 진짜 미쳤긴 하네…….”

‘이건 이현종 교수님이네.’

‘심장이잖아. 심장은 그런데……. 다른 모든 분야를…….’

‘어, 아니, 아까도 그렇고. 이 케이스들도 그렇고……. 이거 우리 병원 왔으면…….’

사실 스튜어드, 그러니까 스튜어드가 속한 마운트 사이나 병원이 만만한 병원일 리가 없지 않나.

아까 그런 사례가 막말로 국내 다른 병원으로 왔었다면 진단하는 데 애를 꽤 먹었을 것이 뻔했다.

아예 경험하지 못했던 케이스일뿐더러 예상도 불가능한 케이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전 사례도 그랬다.

가족성 비후성 심근병증…….

단언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마 90% 이상의 병원에서 그렇게 진단했을 터였다.

‘진짜 모르겠으면 저기 보내는 게 맞긴 하겠다…….’

‘응, 안 받아 줘도 개이득인 게 전화만 듣고 답 말해 주는 경우가 반 정도 된대.’

‘미친…….’

‘왜 안 믿겨?’

‘아까까지는 그랬을 거 같은데 지금은 믿겨. 수멘.’

‘수멘.’

게다가 지금 이어지는 기타노 타게시의 강의에 등장하는 사례들 또한 만만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원래 신도였던 이들의 신앙심은 물론이거니와 이 새끼들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닌가 했던 이들마저 수혁교로 귀의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스튜어드가 깽판 치고 내려갔던 것에 비하면 기타노의 발표는 꽤 훌륭한 편이었다.

그 뒤로도 쭉 그랬다.

이수혁에게 존경을 표하면 사람인 이상 정도 이상의 공격은 피할 수 있단 것을 알게 된 이들 전원이 인사말처럼 수혁을 칭찬하고 시작해서 그랬다.

‘에이…….’

[다음 강의를 노리죠.]

수혁은 불만이었지만 뭐 어쩌겠나.

“아들아, 이럴 때는 좀 참아 줘야 하는 법이야.”

사회화가 덜 되기로만 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현종마저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서 나섰다가는 진짜 야만인 취급 받아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해서 세션은 그렇게 끝이 났다.

끝나고 나서는 으레 그러하듯 해외 초청 연자들에게 교수들이 다가가 사진 찍기를 청하기 시작했다.

약간 부끄러운 일이긴 한데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국회에서 행사가 열리면, 국회의원들이 연예인들하고 사진 찍으려고 줄 선다는 게 딱히 비밀도 아니지 않나.

이때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이 그득한 가운데, 교수들은 연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수혁에게 향하는 걸 바라보게 되었다.

“이수혁……? 처음 듣는 이름인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인상 깊은 문답이었습니다.”

이 자리의 진짜 스타는 수혁이라는 걸, 그들만은 알아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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