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화 초청 연자들 (3)
수혁은 방금 얘기했던 교수들 외에도 꽤 여럿과 떠들어 대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언제까지라도 더 있을 용의가 상대에게는 있었겠지만, 수혁은 도장 깨기에 나서야 하는 사람이기에 억지로라도 떴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뜨는 수혁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둘이었지만 하나는 여전히 정신이 후딱 나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수혁 교수……. 우리 스튜어드 어쩔 텐가…….’
그 하나는 당연하게도 좌장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서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스튜어드가 맛탱이가 가서 그랬다.
눈이 매가리가 없는데 혹시 풍이 왔나 싶기도 했다.
다리를 들었다 놓으니 힘은 있는 거 같은데…….
뭐랄까?
말에 반응이 없어.
“닥터 스튜어드. 닥터 스튜어드? 내 말 안 들려요? 말이라도 좀 해 봐요. 나 이제 슬슬 무서운데.”
아니…….
아까 자리로 안내할 때까지만 해도 어?
얼마나…….
그래, 지났으니 할 수 있는 말인데…….
진짜로 시건방졌더랬다.
안하무인이라는 말을 형상화하면 딱 이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헌데 지금은…….
“닥터 스튜어드!”
119를 불러야 하나?
고작해야 말 몇 마디 다툰 걸로 119를 부르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삼국지 보면 설전이라는 게 있지 않나?
실제로 말로 싸우다 골로 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갈량한테 왕랑이 말로 싸우다가 죽었다잖아.
물론 낙마해서 죽었던 거 같기는 한데…….
스튜어드는 나이도 나이인 데다가 끌고 나오면서 보니까 배가 두둑한 것이 성인병 몇 개쯤은 달고 사는 듯했다.
그 말은 곧 열 받아서라도 풍 맞아 뒤질 수 있다, 이 말이었다.
“으…….”
해서 이번에도 답이 없으면 119 불러야겠다 하고 있으려니 신음 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다시 살펴보니,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긴……. 여긴 어디?”
진짜로 정신을 잃었었구나 싶었다.
에휴…….
‘내 아시아태평양 학회장 자리는……. 물 건너갔구나’
사람 억지로 불러다가 강의 지켜놓고 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절을 시키지 않았나.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놈이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으면 이렇게 신경을 썼겠어?
이 양반은 나름 미국 쪽으로 인맥이 장난이 아닌 놈이었다.
그중에서도 유태인 계열 병원 쪽으로 짱짱했다.
돈 만지는 사람이다 이건데…….
‘하……. 이 새끼가 병신이지 사실.’
어쩌겠나.
지 혼자 병신 짓 하다가 개박살이 났는데.
따지고 보면 수혁이 좀 오버하긴 했지만, 원인 제공은 이쪽에서 하지 않았나.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저쪽 줄이 짱이라 이건데…….’
이제 와서 잡을 수 있을까?
이현종은 앞 다르고 뒤 다른 사람을 제일 미워한다던데…….
그렇다고 아빠 제끼고 수혁에게 달려드는 것도 무서웠다.
방금 봤지 않나.
의사끼리 설전 치러서 나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을 사실상 무명인 이수혁이 단칼에 베어 버린 마당이었다.
예기치 않게 그걸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서 직관하게 된 좌장으로서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밖입니다, 밖!”
“아……. 내가……. 하.”
하여간, 그건 그거고 예의는 예의다 보니 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라 한들 이어 나가긴 했다.
그 말에 스튜어드는 허탈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중간에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했는데,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스튜어드는 그렇게 한참을 괴로움에 떨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물었다.
수혁을 찾았다, 이 말이었다.
좌장은 이 새끼가 또 가서 망신을 당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들어 보니 또 그건 아닌 듯했다.
“그토록 우수한 사람은 내 평생 처음 봤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해야겠는데.”
시비 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태도를 훅 바꿔버렸다.
‘이상한데…….’
스튜어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뭐 애써 이해를 해 볼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스튜어드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극악이라고 해도 좋았다.
좌장이라고 그런 걸 몰라서 불렀겠나?
이 인간이 말종에 더불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인간이 갑자기 수혁을 이렇게까지 인정을 한다고?
좋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 뻔했다.
“말씀해 주십쇼. 내가 결례를 범했으니, 사과도 해야겠지.”
“그…….”
그게 예상은 되는데 말을 이렇게 하고 있지 않나.
싹 무시하기엔 또 스튜어드가 가지고 있는 지위라는 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달까?
‘혹시 모르지? 대인배라 이번 일 잊고 좋게좋게 마무리될 수도……?’
꿈이라는 건 알았다.
말도 안 되는 희망이라는 건,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이성은 흐려지는데 욕심은 충천하고 있는 학회장은 유혹을 떨쳐 내지 못했다.
“따라오세요. 안내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 몸은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응? 아, 네.”
“흐음.”
냄새를 맡아 보면 살짝 지린 거 같긴 한데…….
암내랑 헷갈릴 정도다 보니 그냥 넘어가도 될 거 같긴 했다.
뭐…….
다들 점잖은 사람들이니 설마 거기서 지렸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공격할 거 같지도 않았고.
뭐가 되었건 다들 의사들이지 않나.
치사하게 생리적인 현상 뭐라고 하는 건 반칙이라는 걸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렇게 학회장은 닥터 스튜어드를 데리고 레지던트들 발표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명색이 학회장인 데다가, 옆에 대동하고 있는 이 또한 보통은 넘다 보니 다른 이들이 따라붙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혼자 어디 가십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권력에 아첨하는 이들.
그래, 세상에 수혁이나 이현종 같은 놈들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쪽이 워낙에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사실 이쪽이 보통일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휴.’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해서 아까보다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어가다 보니, 한 무리 인간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애들이었다.
이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강의 시간에 나와서 떠들고 있나 싶어서, 또 학회장으로서의 위엄을 만끽하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어, 학회장.”
“앗.”
그리고 그 틈바구니 안에 있던 이현종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 가다가 똥을 밟아도 이것보다는 덜 낭패스러울 터였다.
심지어 그 똥을 밟으러 가는 길이었음에도 그랬다.
‘내가 진짜 이 사람을 무서워하는구나…….’
학회장이 새로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이, 스튜어드는 뚜벅뚜벅 걸었다.
이현종 옆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그러나 나름 성심성의껏 모여든 이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던 이수혁을 향해서였다.
“광영입니다!”
“광영이라는 말이 요새 유행이에요?”
“네! 저희들끼리는 그렇습니다.”
“아……. 네.”
원래는 레지던트 사례 발표실에 가서 사뿐히 지르밟으려 했다.
아까 스튜어드를 짓밟긴 했지만…….
사례가 너무 희귀하다 보니 오히려 좀 미련이 남았다.
이건 진짜 짓밟기만 했지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게다가 이제 수혁에게는 더 이상 희귀하다는 것이 곧 어렵다는 것으로 귀결되지도 않았다.
도리어 수혁은 흔한 질환인데 다른 질환이랑 헷갈리는 경과를 밟는 경우에 훨씬 더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진짜 열심히 해 주는데요? 늘 건강하시고, 뜻하는 바 다 이루시길? 연예인입니까?]
‘이들에게는 연예인이지.’
[교주 같은데……. 아무리 봐도.]
‘시끄러워, 인마. 여자애들도 있다구. 혹시 아니?’
[네, 전혀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우하윤이 현재로서는……. 아니면 싱가포르에서 봤던 그 레지던트나…….]
‘아, 시끄럽네.’
그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수혁은 교도들에게 아니,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불만과 만족이 용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스튜어드가 위태롭게 끼어들었다.
아마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신경 안 썼을 수도 있었다.
말했던 것과는 달리…….
‘이 새끼…… 건방진 새끼……. 두고 보자…….’
스튜어드는 당연하게도 호의로 다가온 게 아니어서 그랬다.
‘이건……. 그래. 홈 어드밴티지야. 야구도 그렇잖아?’
비뚤어진 마음.
그러니까 내가 이런 동양인보다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발로한 일종의 망상이었다.
야구랑 의학 설전이랑 같을 리가 만무하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스튜어드가 더 잘 알 텐데도 이런 생각이 교정이 안 되고 있었다.
“저기, 이수혁 교수님.”
“응……?”
하여간, 그 순간 스튜어드가 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혁은 그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는 자길 아는 거 같은데, 자긴 몰라서 그랬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어, 사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더 열 받으라고.
바루다 덕에 상대의 속내를 다 알아볼 수 있기에 그러했다.
‘이 새끼 지금도 딱히 좋은 뜻으로 온 게 아니잖아?’
[그건 맞습니다. 정신없는 새끼네요.]
둘은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악마로 화한 채, 스튜어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스튜어드는 확 열이 받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풍이 올 뻔했다.
“그……. 나……. 나 스튜어드입니다.”
“네에……. 누구…….”
“아까……. 아까…….”
“아까……?”
[수혁, 이러다 죽으면 약간의 책임 소재가 넘어올 거 같습니다.]
“아아. 아! 아까!”
그리고 그러한 사실 또한 꿰뚫어 본 바루다 덕에 수혁은 너무 늦지 않게 아는 척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열 받은 마음이 가라앉을 리가 있겠나.
진짜로 딱 넘어가기 직전에 멈추었기 때문에, 스튜어드는 한동안 말도 잇지 못했다.
‘후우……. 이 노란 놈이…….’
표정 관리가 될 리가 없었다.
“죽일까요?”
그걸 보고 있던 김성진이 물었고, 안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교주님께서 죽일 겁니다.”
“아.”
안대훈은 수혁을 보고 있었다.
저 빙글거리는 미소…….
저 뒤에는 비극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누구한테?
삔또 상하게 한 사람한테.
“제가 아직도 부족하군요.”
“아니, 저도 1년 차 때는 더 부족했습니다. 이미 충분히 정진하고 계세요.”
두 또라이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스튜어드가 입을 열었다.
“저희 병원에 초청해서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데요.”
속내는 이러했다.
마운트 사이나는 자타공인 세계 초일류의 병원 아닌가.
시스템도 그러하지만 당연하게도 구성원 또한 초일류였다.
각 과의 스페셜리스트란 스페셜리스트는 다 있다고 보면 되는데…….
‘합공하면 제깟 놈이 견딜 수 있겠나? 아까 비겁하게 다수로 덤볐으니, 이번엔 네 차례다. 설마 도망가진 않겠지?’
말이 초청이지 분위기는 거의 뭐…….
암살 그 자체였다.
‘야, 이게 제일 반가운데, 나 좀 이상한 거야?’
[아뇨. 착한 사람은 혼내 주기가 그렇잖아요? 나쁜 놈 혼내 주는 게 제일 재밌고 속도 편하고 좋죠.]
그 제의에 수혁은 씨익 웃었다.
“얼마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