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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닥터-1040화 (1,040/1,303)

1040화 다시 시작 (6)

“지금 시행한 검사만으로는 사실 확실한 진단명이 나오진 않는군요.”

스튜어드는 민망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뻔뻔하고도 당당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꽤 희귀한 질환임이 분명합니다. 저희가 감별한 질환은 일단 호르몬 관련한 것들과 나병 등이 있습니다. 이 또한 희귀한 질환인데 2, 3일 안에 감별했으니 진료 과정이 느린 건 아닙니다.”

그러곤 감탄까지는 아니더라도 납득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환자야 여기 올 때부터 뚱했으니 그렇다 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래?’

보호자도 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호르몬과 나병.

이거 어디서 들어 본 거 아닌가.

‘거기서…… 벌써 며칠 전에…….’

보호자는 그제야 설마 여기가 별거 없고 거기가 오히려 잘하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적으로 뭔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쌓아 온 명성과 신뢰가 어찌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겠나.

마운트 사이나 병원이 비록 메사추세츠 병원이나 메이요 클리닉만큼의 명성은 없을지언정 임상에서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병원이지 않던가.

우수한 사람이 있으면 백지 수표와 함께 데려오는데, 그 대상 중엔 전통적인 미국의 적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의사까지 끼어 있을 정도니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얼마나 더 걸리죠?”

“글쎄요. 경과 관찰을 하면서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워낙에 가능성 있는 질환이 많아서요.”

“저기, 잠시만.”

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봤더니, 스튜어드는 또다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물론 그냥저냥 넘길 수도 있는 소리기도 했지만…….

환자는 지금까지의 개고생 때문에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네?”

손을 들고 나섰다.

전화기는 어디론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혹시 태화에서 보내온 소견서는…… 보지 않은 겁니까?”

“작은 규모의 병원에서 쓰는 소견서에서는 실수가 많아서요.”

“뉴욕 센터만 해도 그렇게 작은 병원은 아닌 거로 아는데요. 당장 이번 코비드 때 그 병원에서 진료받은 환자가 몇인 줄 아십니까?”

환자의 이름은 에즈라.

월스트리트에서도 공격적이기로 유명한 펀드 회사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애초에 그의 뿌리가 아시아에 있기도 했거니와 어쩐지 그쪽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취향에 맞아서도 그랬다.

물론 위에서 다른 곳으로 발령을 보내면 거기에 맞춰서 일할 자신이야 차고 넘쳤지만 처음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는 취향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가 태화 뉴욕 센터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가깝다거나 한 건 아니란 얘기였다.

그는 그 뒤에 서 있는 태화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모 병원의 규모는 마운트 사이나보다 큽니다.”

“아…… 한국에서요? 거긴 경쟁이 적으니까요.”

미국인이 경쟁을 논하다니.

아마 한국인이 들었다면 몽둥이 들고 뛰어와서 두들겨 팼을 텐데…….

아쉽게도 여긴 미국 놈들뿐이라 거기에 대해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설령 닥터 스튜어드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의사가 작성해서 보내온 소견서를 읽어 보지도 않은 행위가 정당화될 리가 있습니까?”

“얘? 왜 그래?”

“잠시, 어머님.”

“어…….”

상당히 공격적인 말투에 보호자가 놀라 끼어들었지만, 에즈라는 어느새 월스트리트의 금융 사냥꾼의 눈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앞이니까 참았지, 그라고 성질이 없었겠나.

애초에 투사 기질이 없어서는 이 살벌한 금융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조차 없었다.

“소견서에 뭐가 쓰여 있길래 그럽니까? 어차피…… 병원 수준에 맞춰서 진료를 해야 합니다. 의미가…….”

“의미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전에 제가 제출한 소견서를 보세요.”

“제가 시간이 나면 보겠습니다.”

“지금 보세요. 안 그러면 스워츠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당신을 고소하겠습니다.”

“아니…….”

고소라니?

그깟 종이 쪼가리 좀 안 봤다고 이런다고?

거기 애초에 피부과이지 않나?

레이저나 쏘는 애들이 보낸 소견서가 뭐라고……?

‘입양이라더니…… 인도 놈이라 이런가?’

놀랍게도 스튜어드는 급격히 날카로워진 에즈라의 반응을 보면서 인종을 떠올리고 있었다.

뿌리 깊게 자리한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수혁에게 그렇게 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떠나질 않고 있어서 그랬다.

아니, 오히려 반발심 때문인지 뭔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좋습니다. 일단 보죠. 그런데, 지금 하는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무례는 닥터 스튜어드, 당신이 먼저 범했습니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빼먹었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뭐…… 절차상 에러가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는 모든 절차를…… 아, 가져왔나.”

“스캔도 안 맡긴 겁니까, 설마?”

대화를 하던 도중 레지던트인지 누군지 하여간, 스튜어드의 아랫사람이 부리나케 뛰어와 서류를 건넸다.

닥터 장이 성심성의껏 작성한 서류였으나, 그 정성이 무색하리만큼 함부로 대해졌는지 구겨져 있었다.

뭔가 이물질도 묻어 있었는데 그냥 버려두었던 모양이었다.

원칙상 외부에서 온 병원 자료라면 모두 스캔해서 전자 의무 기록 차트에 넣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중대한 잘못이었다.

“그…… 착오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읽어 보죠.”

“하…….”

에즈라가 혀를 차는 사이에, 스튜어드는 주어진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뭐 쓸 게 있나 그놈들……?’

기껏해야 레이저가 잘 안 먹네요, 잘 모르겠으니까 잘 봐주세요 뭐 이런 내용 아니겠나?

뭐…….

좀 성의를 보였다면 구글 렌즈로 피부 찍어서 검색을 해 봤을 수도 있었다.

전자보다는 나을 테지만 후자라고 해서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으응……?’

허나 딱 한 문장을 읽은 후로부터는 그따위 생각일랑 품을 수가 없었다.

-환자의 질환이 전신적인 질환일 가능성이 있어 호르몬 수치 검사 및 두개골 엑스레이, 나병 등의 감염 질환에 대한 검사를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이미 했다.

여기서 했던 것을 거기서 이미 했고 결과도 다 봤다.

‘나병 아닌가 하고 있었는데…….’

호르몬은 꽝이 나왔지만 나병은 원래 진단에 시간이 좀 걸리는 편 아닌가?

물론 미국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때아닌 나병 감염자가 나올 가능성은 적지만…….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즉 에이즈 환자가 꽤 있다 보니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면역이 상실된 환자는 정말이지 별의별 병이 다 생길 수 있어서 그랬다.

보통 사람에게는 감염을 일으킬 수 없는 농도의 균이나 바이러스도 그런 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본 센터의 역량으로는 진단이 불가해 태화 의료원 통합 진료 센터의 부센터장 이수혁 교수님에게 진료 의뢰를 했습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떴다.

이수혁.

이 망할…….

“어, 왜 종이를 꾸깁니까!”

“아.”

그 순간 손에 힘이 확 들어가는 바람에 소견서가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잘도 구겨졌다.

아니, 숫제 찢긴 곳도 있었다.

“무슨 짓이죠? 설마…… 소견서에 이미 다 쓰여 있던 건가요?”

“그, 그게.”

보호자도 스튜어드의 비정상적인 반응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삐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소견서를 못 믿겠으면 통화라도 해 보시죠.”

“토, 통화요?”

그때, 에즈라가 마침내 연결된 수혁이 뜬 전화기를 내밀었다.

영통이었고, 수혁은 본인은 아니더라도 바루다 덕에 한번 본 주요 인사는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튜피드?”

물론 아주 정확지는 않았다.

바루다의 말을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딱 얼굴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나왔다.

우연찮게 수혁도 환자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그랬다.

-그게…… 가 버렸습니다.

장종우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으니 순전히 우연이라고 보는 건 무리였다.

걱정이 됐다.

거긴 돌팔이가 있으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높은 자리에 올라 있기까지 하지 않나.

혹 VIP랍시고 그 인간에게 갔다간 진짜 개고생만 하고 치료는 치료대로 늦어질 수 있었다.

물론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진단명을 들었으니만큼 그게 수년 동안이나 진행되거나 하진 않겠지만…….

[스튜어드입니다.]

‘방금은 좀 일부러 그랬어.’

[아…… 확실히 효과는 좋군요.]

‘그렇지?’

그게 좀 안타까워서 수혁은 일부러 이름을 잘못 불렀다.

스튜어드에게는 거의 직격탄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에게 수혁이란 움직이는 재앙이나 다름없어서 그랬다.

“어, 어으.”

갑자기 풍 맞은 사람처럼 말을 더듬어 대고 있었다.

보통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그게 아무리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걱정이 들어야 정상일 텐데…….

[질환에 의해서는 아닙니다. 그냥 당황했을 뿐이군요.]

하필 수혁은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었고, 이런 류의 공감성이 점점 더 희석되어 가고만 있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환자분, 이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메일 드렸듯이, 같은 검사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행했던 검사는 한 겁니까?”

“다리 사진은 안 찍었습니다. 오만 MRI는 다 찍어 놓고…….”

“정말…… 공부 지독히도 안 하는 사람이네요. 뭐……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놀랄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좀 모자라요.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스튜어드만큼 질이 나쁜 인간도 별로 없긴 할 터였다.

적어도 수혁이 겪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그랬다.

애초에 수혁이 만날 만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걸러진 사람들이라 그랬다.

물론 환자야 오면 그대로 진료를 보겠지만 피상적으로 겪는 것이지 않나?

그에 비해 동료들은 좀 얘기가 다를 텐데…….

수혁은 누누이 말해 왔듯 그 자신도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단 바루다 탓은 아니다, 이 말이었다.

‘으윽.’

스튜어드는 지속되는 모욕에 거의 주화입마가 올 거 같았다.

원래 같았으면 바로 지랄하면서 소리라도 쳤을 텐데…….

-저분 저러다 지릴 거 같은데, 내보내 주시죠. 걱정이 되네.

학회장에서 들었던 순수 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대사가 자꾸 떠올라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들러붙고 있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당황스러운 건 주변에 있던 다른 의사들이었다.

스튜어드가 한국으로 치면 기조 실장급이지 않나?

실력도 그런데……

이렇게 쳐발리고도 한마디도 못 한다고?

“하여간, 모르면 알아야지. 제가 알려 드리면 되겠죠? 사람들이 꽤 있는데, 모여 보십쇼. 환자분, 제가 설명에 환자분을 인용해도 괜찮겠습니까?”

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페이스였다.

딱 보니까 각이 나오지 않았나.

‘국제 잘난 척이다.’

[좋군요. 두근두근합니다.]

지금부터 떠들어 대면 생소한 얼굴들이 생소한 언어로 감탄을 해 대기 시작할 터였다.

생각만 해도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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