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화 개인 교습 (4)
땅땅땅땅
MRI실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만약 환자로 들어가게 되면 커다란 헤드셋과 더불어 귀마개까지 받게 되는데, 괜히 오바하는 게 아니었다.
CT와는 달리 방사선 피폭이 없다는 장점을 상쇄하려고 무던한 노력이라도 하는 것인지, MRI는 지독하게도 시끄러웠다.
오래 걸리기도 하고.
‘바로 보자고 하지 말걸.’
[타이밍상 그 말을 그때 하는 게 제일 멋지긴 했습니다.]
‘그 말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좀 없어 보이긴 하죠.]
‘망할.’
해서 수혁은 한껏 멋들어진 문장을 내뱉고서 대략 10분간 고요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인 것은 나머지 둘이 그 시간 동안 수혁을 한심하게 보는 데 시간을 들이는 대신 차분히 환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수혁이지 않나.
그마저도 꽤 폭력적으로, 그러니까 너무 빠르게 끌고 왔다.
아직 다른 의료진들의 사고는 조증에 머물러 있었다.
수혁의 말에 한줄기 의심이 강하게 뻗쳐 오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조증이 아니라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 실조……. 방향 감각 상실. 흠…… 확실히 기저질환이 있을 거 같긴 한데. 내가 조증에 대해 잘 모르니 아주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운데…….’
하윤도 그랬다.
아무래도 조증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조증이 어떻게 그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터였다.
허나 하윤은 에이스이면서 동시에 노력가이지 않나.
통합진료센터로 진로를 정한 이후론 각 과에 있는 선배들에게 찾아가 이것저것을 캐묻거나 나름대로 케이스를 뒤적거려 왔더랬다.
‘정신과 질환은 딱 증상만으로는…… 감별이 안 되더라고?’
우울증에서도 환각이나 망상 증상과 같은 증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
조증에서?
마찬가지였다.
괜히 정신과 의사들이 혼자 있을 땐, 조금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 되어서 책을 탐독하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조증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이 꽤 높아. 아니, 근데 처음 봤을 땐 너무 조증이었는데……. 지금도 그게 그냥 심해…… 심해져? 약을 쓰는데 심해진다…… 흐음.’
오진승 교수는 하윤보다도 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는 게 많다 보니 아무래도 고민의 갈래가 여러 개라 그랬다.
띵띵띵띵
그렇게 셋 다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어느새 검사가 점점 더 진행되고 있었다.
차츰 사진이 넘어오기 시작할 정도로 진행되었다.
“오네요.”
‘마침내’라고 속으로 외치며, 수혁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뇌 전반에 걸쳐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을 만큼 조금 넘어온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병변들이 있었다.
꽤 넓게 퍼져 있어서 그랬다.
“양측 대뇌에 미세 출혈을 암시하는 소견이 있군요.”
“아……. 이거…….”
“T1과 T2에서 모두 멀티플하게 보입니다. 확실히 미세 출혈 소견이에요.”
“이럴 수가.”
조증은 아니었다.
조증도 머리에서 발생하는 질환이긴 하지만 이렇게 MRI로 확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질환은 아니었으니까.
아예 다른 질환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몇 주간 써 왔던 약들이 모조리 무용지물이었다는 소리였다.
아니, 수혁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또 몇 주를 이런 식으로 소모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있는 게 아니라……. 거의 100% 그랬을 거야.’
오진승 교수는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어 갖은 고생하느라 형성된 뱃살 주변으로도 땀이 들어차고 있었다.
와이셔츠가 촉촉이 젖어 가기 시작했을 무렵, 수혁이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양측 뇌뿐만이 아니라 소뇌, 기저핵 영역에도 있군요. 뇌 전반에 걸쳐 미세 출혈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정상이군요. 사실 미세 출혈이라는 건……. 별 의미 없을 때도 있으니까요? 물론 기저질환이 있을 거라는 아주 강력한 증거가 되긴 합니다만 말이죠. 이렇게 되면…….”
[하시모토 뇌병증에서 이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는 케이스 리포트가 있습니다.]
‘그렇군. 그래, 확실히……. 하시모토 뇌병증이 정신과 질환하고 아주 헷갈릴 수 있지. 필요한 검사는?’
[아직 시행하지 않은 검사로는 갑상선 호르몬, 뇌척수액검사, 뇌파검사가 있습니다. 그 외에 몇몇 자가면역질환 관련한 항체 반응 검사를 시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직 바루다와의 대화만을 이어 나가면서였다.
그와 동시에 입으로도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이게 다 바루다와의 토의를 거쳐 나오는 말들이다 보니 완성도가 아주 높았다.
순식간에 진단을 팍팍 내릴 수 있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어떤 걸 의심하는 거죠?”
“하하. 선배. 오랜만에 봐서 그러는 건 이해하는데…….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편하게……. 아니, 어떻게 편하게 합니…… 해요. 이수혁 교수는 부센터장에 원장 아들에 천재인데.”
“그래도 선배는 선배죠. 잘해 주셨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허나 일부러 추론 결과를 바로바로 읊어 대진 않았다.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이 하나 있어서 그랬다.
이제 수혁의 추론은 우수하다 못해 지나치게 빠른 수준에 이른지 오래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혹은 바루다와 떠들어 댄 대로 바로바로 말을 하다 보면 상대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체감도 못 하고 그냥 납득해 버리게 되기 마련이었다.
수혁이나 바루다가 원하는 반응이 없게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아진다, 이 말이었다.
그래선 안 되었기 때문에 수혁은 간혹 쉼표를 찍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그게 쉬웠다.
‘그러고 보니까 나한테 왜 이렇게 사무적이야?’
[뭐……. 김인수 선생도 후배 대하듯이 못하지 않습니까?]
‘거기는…… 제자가 되었으니까 그렇고. 여기는 선밴데? 같은 교수고.’
[그렇게 섭섭해하기엔 수혁의 기억을 토대로 유추해 봤을 때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유대는 없었던 거 같습니다. 애초에 정말 몇 명 말고는 그런 관계가 있지도 않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아는 사람이라서 그랬다.
바루다의 말을 듣고 보니 친한 사이라기보다는 지인의 영역에 있긴 했지만.
하여간, 수혁은 일부러라도 허허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하세요. 아무튼, 이 환자……. 가장 가능성 높은 진단명은 하시모토 뇌병증입니다.”
“하시모토…….”
“하시모토 뇌병증이라.”
내내 잠자코 있던 하윤이 뭔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긴 아는데 당장 떠올리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수 있었다.
이건 워낙에 드문 질환이니까.
원래 의학적 추론 과정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흔한 질환부터 배제해 나가야 하지 않나.
다만 수혁의 경우엔 중간 다리를 통으로 잘라 먹을 수 있을 만한 배경지식과 경험 그리고 추론 능력이 있어 예외가 될 뿐이었다.
“감별해야 할 질환으로…… 들어 보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오진승 교수마저 처음 보는 질환이니 하윤을 탓할 일이 아니란 얘기였다.
비록 오진승 교수가 교수 직함 달게 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앞으로 10년가량 더 교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보게 될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을 테니.
“그럴 겁니다. 대충 인구 10만 명당 2명 내외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긴 한데……. 실제로 진단되는 경우는 그것보다 드무니까요.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병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게 혹시 아니더라도 조증은 아냐. 조증에서 미세 출혈이……. 이게 말이 미세 출혈이지 다른 거 아냐? 한두 군데가 아니라 이렇게 퍼져 있으면.”
“그렇죠. 오히려 혈관염을 시사한다고 봐야죠. 즉 자가면역질환과 연관이 되어 있는 소견입니다.”
“그렇군……. 그럼 정신과 환자는 아닌데…… 그렇다고 아예 안 봐 주기에는 증상은 정신과 환자란 말이지.”
“저희 센터에서 받을게요. 선배는 협진을 봐 주세요.”
“아, 그럴까. 그래. 그럴게. 야…….”
오진승 교수는 다시 한번 환자의 MRI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면 정상이라고 착각할 만한 소견이었지만 잘 보면 확실히 뇌 전반에 걸쳐 퍼져 있는 혈관염 소견이 있었다.
조증은 아니란 얘기였다.
오진이었다는 뜻이었다.
‘하아.’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하시모토 뇌병증의 예후를 정확히 모르긴 하지만, 하여간, 환자를 잃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 대훈아.”
그사이, 벌써 수혁은 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대훈은 아까 봤던 환자에 대해 묻는 줄 알고 즉시 노티를 전개했다.
급성 횡단 척수염에 대해 이러이러한 치료를 시작했다, 뭐 이런 것이었다.
그것을 들으면서 수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안대훈은 아마 기절했을 터였다.
‘아닐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죠.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이니까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진단명이 의심받고 있다니.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눈앞에 두고 있는 환자이기에 수혁은 이에 대해 얘기했다.
“다른 환자가 생겨서. 응급실에서 우연히 봤어.”
“아, 취미 생활하셨군요.”
“어……. 뭐, 그렇지.”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말에도 수혁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지극히 사실이니까.
게다가 대훈에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녀석이 만든 돌려돌려 판.
그게 이젠 통합진료센터 회의실에 신줏단지처럼 모셔지고 있었으니.
이현종과 이수혁 둘 다 시간이 나는 날을 기다리면서였는데, 최근 들어 그런 날이 없었음에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있었다.
‘그거 다 누가 닦겠냐.’
[안대훈이죠.]
‘그래, 충신이지.’
이런 충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화를 낸다면 그건 암군 아니겠나.
“그 환자 하시모토 뇌병증이 의심돼서.”
“아……. 놓쳤군요. 재밌는 케이스일 거 같은데.”
“하윤이가 옆에서 따라다녔으니까, 나중에 물어봐. 아니면 정규 컨퍼런스 시간에 내가 말해 줘도 되고.”
“네,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방금 무릎을 꿇었다는 것 정도는.
처음엔 센터 내에서도 오버하네 어쩌네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유행하고 있었다.
“일단 뇌파검사가 간단하니까 바로 시행하고, 혈액검사도 나가고. 항목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좋아. 너니까 믿는다.”
“소신 오늘 죽어도 여한이…….”
“죽으면 안 되니까 지랄 말고. 뇌척수액 검사도 하자.”
“받들겠습니다.”
“어, 그래.”
대체 이런 대답은 어디서 배우는 건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안대훈에게 전달한 이상 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행이 될 테니.
아마 내일이 오기 전에 제대로 된 결과를 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검사실 측에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서 무릎 꿇겠죠. 이수혁 교수님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요새도 그러나?’
[요새도가 아니라 요새 더 그런다던데요.]
‘하아.’
믿음직하지만 가끔은 부끄럽기도 한 수제자를 떠올리면서, 수혁은 하윤을 돌아보았다.
“어쩔래? 한 케이스만 더?”
하윤은 그런 수혁을 보면서 박카스 광고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