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화 클라스 (3)
‘뭐 같냐고……?’
비단 안대훈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당황한 상황이었다.
물론 MRI 사진이 떴으니 아까처럼 아예 오리무중인 상태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띨룽 이것만 보고 뭐가 뭔지 알아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교수님은……. 교수님은 아시는 눈친데.’
안대훈은 영상 대신 힐끔 고개를 돌려 수혁을 확인했다.
수혁은 언제나처럼 후후 웃고 있었다.
여유를 가장한…….
그러니까 의료진들이 뭣도 모르면서 환자 안심시키려고 짓는 그런 종류의 미소는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
저 웃음은 잘난 척을 앞둔 사람의 웃음이거든.
딱히 저 미소를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순전히 자기가 너무 좋아서 새어 나오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가만……. 다시 보자.’
교수님은 안다.
그것이 딱히 나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원해 수혁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으니까.
대개의 경우엔 이걸 그냥 당연히 여기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심지어 공부 열심히 해서 수혁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겠답시고 통합진료센터까지 온 사람들까지 그랬다.
‘난…… 난 아냐. 난 정말로…….’
허나 안대훈은 달랐다.
너무 머리를 굴리느라 달아오른 두피 온도 때문에 모발이 탈출하는 지경에 이를 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아닌가.
그에게 중요한 건 수혁이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는 알 수 있을 만큼 이 환자가 힌트를 이미 줬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보자.’
해서 안대훈은 다른 이들이 그저 수혁의 입만 쳐다보고 있게 되었을 때쯤에도 영상을 돌아보았다.
그저 시늉만이 아니라 진짜로 집중하고 있었다.
‘좋아. 역시 안대훈.’
[지금은 다른 놈들이랑 비슷하거나 너무 우수한 정도지만 아마 나중엔 확 차이가 나게 될 겁니다.]
‘그래, 마음가짐이 달라. 맨날 나보고 신이네 교주네 하면서 도전하는 마음이 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묻게 되면 수혁이 애써 팬클럽이라고 여기는 집단이 완전히 종교 집단화될 겁니다.]
‘어……. 나도 알아. 그래서 닥치고 있는 거야.’
[잘하고 있습니다.]
수혁은 그런 안대훈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통합진료센터 소속의 여러 펠로우들도 영상을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T1, T1를 밀어내고 있는 방추형의 종괴…… 흠. 여기엔 잘 보면…… 중앙 부분에 인핸스가 아주 잘 돼. 염증인가? 아냐, 아닌데…… 이게 염증이라면 CSF에서 뭐라도 나왔어야 해. 그건 아냐.’
물론 유의미한 추론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건 안대훈뿐이었다.
그조차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을 뿐, 말은 안 하고 있었기에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펠로우급이 아닌 이들, 즉 레지던트들에게는 살짝 지루하기까지 한 시간이었다.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뭐하러 보고 있단 말인가.
평소의 수혁이라면 아니, 이현종이었다면 지금쯤 아는 바를 털어놓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것도 아니다 보니 더더욱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안대훈의 진중한 얼굴 때문이었다.
진중하다 못해 일견 집착까지 느껴지는 그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수년은 늙은 듯했다.
‘하지만 공간을 밀어내고는 있어. 그 말은…… 확실히 종양인데…… 종양이 그렇게 빨리 자라나? 아냐, 아니지. 혈종이면 몰라……. 어? 가만. 가만있자.’
잠시 노년의 얼굴을 한 안대훈이 뭔가에 홀린 듯 모니터를 향해 걸었다.
그러곤 중앙에 인핸스 되는 부분, 그러니까 조영 증강제로 인해 하얗게 점멸하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가리킨 정도가 아니라 숫제 눌렀다.
모니터에 남은 지문 자국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을 때쯤, 안대훈이 돌연 박수를 쳤다.
‘뭐지? 뭔가 알아냈나? 벌써…… 그 정도라고?’
[안대훈……. 진짜 대단한데요? 틀린 답을 내놓더라도……. 그럴싸한 답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 들어 보자.’
박수까지 쳤으니 이제 슬슬 입을 열겠거니 하는 생각을 비단 수혁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하고 있었다.
안대훈은 머리나 종교적인 부분 말고는 딱히 반전 있는 사내는 아닌 터라 모두의 예상대로 입을 열었다.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한 말투로.
“아까 말씀드렸듯이 환자의 척수 부위를 누르고 있는 이 종괴는…… 염증의 결과 즉 고름이나 농양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 어제 CSF 검사를 했으니,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종양인가? 그 가능성도 크게 떨어집니다. 물론 간혹 아주 빠르게 자라는 종류의 림프종이 발생하기도 하겠지만…… 척수는 림프종이 호발하는 부위는 아닙니다.”
“그래, 그 근처의 뼈로 전이가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척수 자체는 림프종이 호발하는 부위는 아니지.”
우선은 지금껏 추론했던 바를 다시금 확인하는 말부터 했다.
뭐, 의미 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발을 디뎌야 하는 법이니까.
기왕이면 그 발 디딜 부위를 단단히 해 놓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고.
“아까 부상에 대해 확인하셨다고 했죠?”
“그랬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던 수혁의 표정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부상.
이것도 아니라는 건 확인했다.
하지만 수혁에게 있어서도 이 부상으로 인한 결과, 즉 혈종이 제일 커다란 힌트였기 때문이었다.
혹 안대훈에게도 그럴까?
그렇다면, 어쩌면 안대훈은 수혁이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아뇨. 이미 훌륭한 의사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추론 능력에 있어서는 수혁이나 이현종 바로 아랫급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배경지식과 경험뿐인, 반쯤 완성된 의사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닌 바루다의 말이니만큼 신뢰도는 100%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에 수혁은 조금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자신의 늙수그레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수혁이나 바루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그 눈빛에 담긴 신뢰와 애정에서, 안대훈은 또다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역시…… 피와 연관이 있군. 맞아, 지금으로서는 이거 말고는 가능성 있는 질환이 없어.’
안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자 했던 말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
“부상으로 인해 피가 흘러나오고 그로 인해 종괴, 즉 혈종이 형성되고 있다면 이 모든 증상이 설명이 됩니다만…… 환자는 부상의 이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혈액검사 소견이 안 좋거나 하지도 않죠.”
말마따나 어제 응급실에서 다시 나간 혈액검사 결과를 보면, 거의 다 정상이었다.
환자 나이를 고려하면 그냥 이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환자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종양 따위의 전신 질환이 아니라 국소 병변이 원인일 거라는 걸, 사실 여기서도 유추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안대훈은 수혁이라면 미리 알아차렸을 사실을 말하면서 깨닫는 동시에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혈종은 아닐 거라는 말이 됩니다만……. 여기 보시면 인핸스가 너무 강합니다. 이 말은 곧 혈관에서 비정상적으로 조영제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건데……. 염증 때문에 혈관 벽이 느슨해졌거나 혹은 혈액을 아주 적극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이를테면 악성 종양이 있거나 출혈이 있거나 하는 것을 시사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 세 가지 이유를 이미 감별했습니다.”
안대훈의 말을 들으며 수혁 또한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명쾌한 설명……. 내가 이렇게 말하나?’
[뭐……. 너무 자화자찬 느낌이 나서 그렇긴 한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안대훈은 어떻게 봐도 수혁의 제자군요. 추론 방식도 케이스를 이끌어 가는 방식도 모두 수혁을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날 좋아하는지 알겠네.’
[아. 거기까지 가나요?]
안대훈에 대한 감탄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자기애로 가득 찬 감탄이었다.
뭐가 되었건 간에 감탄은 감탄이었고, 지금 수혁은 딱히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는 노력 따위는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대훈은 수혁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좋아. 맞았구나.’
덕분에 두려움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니, 딱 하나 남은 게 있었습니다. 드물기도 하거니와 하필 여긴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질환이 아니라면 이거라도 끌고 와야 했습니다.”
“뭐, 뭔데.”
“뭐야.”
“아…… 씨. 답답해. 뭔데!”
자신감의 발로일까?
살짝 잘난 척이 가미되었다.
뜸을 들인다, 이건데.
수혁이 이러고 있으면 그냥 발만 동동 굴렀을 펠로우, 임상 강사들이 난리가 났다,
왜냐.
너무 답답하니까.
고구마 몇 개를 물도 없이 먹은 기분이니까.
그들이 하나 모르는 게 있다면, 정작 안대훈은 사이다만 마시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들이 고구마 먹은 표정으로 쩔쩔매고 있다면 더더욱 사이다는 달아져만 가는 법이었다.
“후후.”
“이 새끼가.”
물론 수혁이 아니다 보니 물리적인 제재가 잇따를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액면가로는 동생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안대훈보다 선배 아닌가.
일단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인수가 뒤통수를 후렸다.
후리고 나서야 수혁도 있는 자리라는 걸 깨닫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수혁이야 자기들끼리 그러는 것에 뭐라 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수혁은 지금 안대훈의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아니라 반쯤은 회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 알겠습니다.”
하여간 안대훈은 한 대 맞고 나서야 정답을 입에 담았다.
“바로 동정맥 기형입니다.”
“동정맥 기형……? 아…… 아! 그렇군. 아…… 그렇다면…….”
“네, 동정맥 기형이 있다면 전신 질환의 증거, 즉 혈액검사에서 큰 변화 없이 출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 동맥에서 정맥으로 바로 혈류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도 종괴 역할을 하기도 하죠.”
“아……!”
“와…….”
“우와…….”
그리 어려운 질환은 아니었다.
공교롭게 딱 여기서 생겨서 그렇지, 레지던트만 해도 벌써 몇 번은 직접 보기도 했을 정도로 흔한 질환이기도 했다.
어려웠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추론 그 자체였는데…….
한 번만 떠올리면 딱딱 이해가 될 정도로 명확한 질환이었다.
안대훈은 주변의 떠들썩한 반응을 보면서, 수혁의 말을 기다렸다.
초조해하진 않았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수혁은 껄껄 웃고 있었다.
‘꼭 내가 잘난 척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을 수 있구나?’
[이게…… 이현종이 수혁을 보는 심정 아니었을까요?]
‘아하. 그렇군. 그럼 이게 애정인가?’
[아들 삼게요?]
‘아니, 미쳤어? 수제자지.’
수혁은 그렇게 웃다가 이내 안대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맞아. 잘했어.”
“감사, 감사합니다!”
안대훈이 무릎을 꿇고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뽑으려 할 때쯤, 수혁이 말렸다.
“아니, 그러진 말고. 신경외과 콜 하자. 수술해야지.”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혁은 마침내 회진을 끝내고 나서야, 오늘 잡혀 있는 스케줄을 떠올렸다.
‘오늘 예능인가?’
[네. 별거 다 하네요, 정말.]
바루다의 말대로 별거 다 하는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