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5화 예능에서 (2)
‘저거 또 저러네.’
신현태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품 안에 들고 온 빳빳한 새 스케치북을 매만지면서였다.
-여보. 오늘 할 일은 딱 하나야, 알지?
-아빠, 알지?
처자식의 부탁이 떠올랐다.
사인받아야 했다.
할 수 있다면 사진도.
특히 자식 놈은 인스타에 올려 자랑할 생각에 가슴 설레하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수혁아…… 조금만 참지. 방금까지 좋았는데.’
감염내과 의사로만 보면 오늘 녹화는 퍽 훌륭했다.
다소 지루할 수 있고, 심지어는 식상할 수 있게 느껴질 수 있는 기후 위기를 감염병의 증가와 결부해서 아주 잘 전달했으니까.
중간중간 위트가 살짝 부족하긴 했지만, 그건 양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질문이 해결해 주었다.
헌데 이렇게 갑자기 피디를 공격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제가 아프다니…….”
물론, 신현태는 수혁이 괜히 저럴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냐?
수혁은 천재니까.
보통 천재도 아니고, 그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천재.
“한재석 님.”
“아, 네. 말씀하시죠.”
하여간, 수혁은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입을 열었다.
이번엔 한재석을 향해서였다.
10년 넘게 정상의 위치에 있던 그조차 지금은 퍽 당황했는지 특유의 미소를 띠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잔뜩 굳은 건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진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 피디님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 제가 녹화할 때는 상대방에게 집중하느라…….”
“녹화 들어가기 전에. 아, 오늘 일정이 있어서 늦게 오셨다고 했죠.”
“그, 그렇습니다.”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더더욱 당황한 기색은 더해져만 갔다.
전세호?
그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겠나.
김홍국에게 넌 결혼식 왜 안 왔냐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놀란 얼굴로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잘 보시죠. 일단 앉아 계셔서 완전히 티가 나지는 않는데…….”
“어, 그러고 보니까 계속 앉아 있었네.”
“평소에는 서 계시나 보죠?”
“아, 네.”
한재석의 말에 피디가 황당하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어, 어제 비행기 타고 오느라 시차 적응이 안 된 거예요. 저 괜찮습니다. 교수님이 엄청 사려 깊으시네.”
그러곤 지금 힘들어 보일 수 있는 이유를 댔다.
보통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그날 좀 이상한 상태라 여기까지 왔더라 해도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물러섰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단순한 천재가 아니라 바루다를 탑재한 천재 아닌가.
[단순히 근육에 힘이 빠진 양상이 아닙니다. 아까 봤죠?]
‘응. 잠깐 몸을 일으킬 때, 발목이 툭 떨어졌어. 본인도 놀랐지?’
[네. 녹화 중이다 보니 어물쩍 넘어갔지만……. 분명 그때 이후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시차 적응 때문에 힘이 빠진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말이었다.
가능한 말이기도 했고.
하지만, 피디의 나이는 어림잡아 봤을 때 고작해야 40대였다.
또한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거나 혹은 타고난 체격이 좋은지는 몰라도 다리 쪽이 꽤 두툼했다.
허리둘레와 허벅지 둘레를 비교해 보면 비교적 건강한 편에 속할 터였다.
그런 사람이 좀 못 잤다고 힘이 빠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란 얘기였다.
‘신경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 저 정도의 근 쇠약은 이상해.’
[그렇습니다. 만성적인 건 아닌 거 같고요.]
‘비행기라……. 비행기면…….’
[이코노미 증후군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죠.]
‘그렇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수혁은 이제 녹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사실 카메라 롤이 중단된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스태프 중에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한재석이 말했던 것이 주효했다.
-어, 그러고 보니까 계속 앉아 있었네.
피디들이 대부분 앉아서 디렉팅을 내리긴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외였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디렉팅을 내리는 편이었다.
허나 오늘은 확실히 계속 앉아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앉아 있었다.
오해를 풀고 싶었다면 잠깐이라도 일어났으면 될 텐데…….
“피디님.”
“어, 네.”
“환자분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피디는 그런 시선 속에서 어느새 다가온 수혁을 마주하게 되었다.
달각이는 지팡이 짚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양반들이야 오늘 처음 보니까 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지만…….
‘수혁이 흥분했네.’
‘그러니까요. 못 일어나는 것에서 뭘 유추하고 있는 걸까요?’
‘내가 알 리가 있냐. 아빠지만 저놈 대가리 속엔 대체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하긴, 뭐……. 그걸 알 수 있었다면 제가 지금보다 더 뛰어난 의사가 되었겠죠?’
수혁의 측근들은 수혁의 심리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뭔가 대단한 질환이 숨어 있을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 피디의 질환은 수혁조차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란 뜻이었다.
이현종과 안대훈은 덩달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끼면서 이 한 편의 희곡을 감상하기로 결심했다.
“환자, 환자라뇨.”
흥미롭다는 건 이들에게 국한된 얘기였다.
아직은 그랬다.
수혁의 개인 캠을 돌리고 있는 촬영 감독 또한, 일단 일이니까 잡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이게 뭔 짓인가 하고 있었다.
뭐, 말을 절지도 않았고 유려하게 뽑아낸 덕에 녹화 시간 자체는 아직 잡아 둔 시간에도 못 미치고 있다 보니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진 않았다.
기분이 상해 보이는 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피디였다.
“아프잖아요.”
“아니, 저 진짜.”
“일어나 보세요.”
“그……. 지금 좀 힘들어서.”
“그러니까, 잠깐만요.”
“그……. 음.”
피디는 수혁을 올려다보았다.
녹화 장면을 지켜보면서도 반쯤은 콘셉트인 줄 알았다.
김다현 회장 비서실에서 직통으로 부탁이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만큼 중대 사안이라면 병원 쪽으로도 부탁이 갔을 테니 어떻게든 준비를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진짜 미친 사람이구나.’
맑은 눈의 광인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이야.
피디는 말이 안 통할 사람이라는 걸 확신한 채, 끙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흐아압.’
다행히 아까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이번에는 미리 힘을 줄 수 있었다.
“후, 됐죠?”
그야말로 간신히 섰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아프긴 하네?’
이건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녹화 전에는 몰랐다.
너무 긴장했으니까.
아직도 그러냐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방송 생리를 잘 모르는 사람일 터였다.
매번 같은 사람들로 이끌어 나가는 예능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 프로는 항상 다른 게스트를 불러야 하지 않나.
특히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인 게스트가 나오는 날이면 다들 초긴장이었다.
뭔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수혁이 처음부터 딱히 긴장한 기색도 없이 워낙 말을 잘하니까 저도 모르게 긴장이 빨리 풀린 모양이었다.
“지금 일어날 때,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났죠?”
“어……. 제가 그랬나요?”
“네. 힘이 빠질 때, 무의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죠.”
“아니, 저는. 어어.”
피디는 필사적으로 괜찮음을 피력하다가 수혁이 툭 미는 바람에 다시 의자에 넘어지듯 앉게 되었다.
수혁이야 다들 알다시피 몸이 가는 편에 속하지 않나.
키도 그리 큰 편도 아니고.
그에 비해 피디는 거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건장한 사람이었다.
헌데 손짓 한 방에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 버렸다.
“이것 봐요. 보니까……. 아까보다 더 심해진 거 같은데.”
“그…….”
“숨쉬기 어렵죠, 지금?”
“어……. 아뇨. 그 정도는……. 좀 의식이 되긴 합니다.”
“숨쉬기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되어야 정상이죠. 그렇죠?”
“그, 그렇긴 합니다.”
그건 충격이었다.
피디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치 빠른 왕작가의 손짓에 쉬고 있던 다른 스태프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캠이 잡고 있긴 하지만, 기왕이면 여러 각도에서 잡아 두면 좋지 않겠나.
“오디오는?”
“사운드는 한 번도 끈 적 없습니다.”
“좋네. 디렉팅은 필요 없죠?”
“네, 알아서 좋은 그림 뽑아 보겠습니다.”
인터뷰 도중에 뛰쳐나갈 만큼 바쁜 의료진도 드물긴 하지만, 그건 종종 있어 오지 않았나.
명의에서도 또 다른 어떤 다큐에서도 심심하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건 처음인데?’
진료에 미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통합진료센터라는 곳에 있는 놈들이 그렇다고 들었다.
바이럴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본인도 그 말을 들었을 때 혹했으니까.
근데 그게 바이럴이 아니라 그 어떤 과장도 섞이지 않은 아니, 반대로 어느 정도 축소된 일이었다니.
아마 피디가 제정신이었다면 신이 나서 덤벼들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당하는 입장이라 그저 어버버 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호흡곤란이라.”
“어어. 옷은 왜요.”
“벗어야 잘 보이고, 잘 들리니까요.”
“아니, 그래도 여기서…….”
“여기가 어딘데요?”
“여기요……?”
“여기 태화 의료원입니다. 병원이에요. 전 의사고요. 그러니까 환자분,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맞네.
여기 병원이고, 이 사람은 의사네.
피디는 방송가에서 닳고 닳은 사람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극도로 당황했다.
그사이 수혁은 피디의 윗도리를 젖히기 시작했다.
“어어. 제발요.”
피디는 그 강건한 팔로 저항을 하기 시작했으나, 놀랍게도 상체의 힘도 제법 빠져 있었다.
게다가 수혁도 바루다의 성화에 나름 운동을 하긴 한 몸 아닌가.
하고 있는 운동이라고 해 봐야 죄책감을 더는 수준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힘 빠진 피디는 허우적대기나 할 뿐, 속수무책으로 벗겨져 나가는 옷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너까지?”
심지어 옆에 있던 조연출까지 돕고 있었다.
피디는 부르투스에게 배 찔린 카이사르라도 된 심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별 소용은 없었다.
조연출이 뒤에 서 있는 왕작가를 가리킨 후부터는 피디도 의지를 잃어서 그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 시청률과 화제성의 노예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
갑자기 공개된 알몸이야 고통이었지만…….
“좀 치워 봐요.”
“으…….”
“확실히. 호흡곤란이 있어요. 그것도 진행 중입니다.”
“네?”
“아까보다 힘들죠?”
“어…….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수혁은 그런 피디의 감정일랑 추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안대훈과 이현종 그리고 나머지도 단순 감상 모드에서 벗어나 의료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피디, 그러니까 환자의 갈빗대 사이에 있는 근육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말은 환자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숨을 쉬고 있단 뜻이었다.
그리고 저 상태에서는 조금만 방치해도…….
“어……. 하악.”
“이런.”
삽관이 필요할 정도로 나빠질 수 있었다.
가뜩이나 근 쇠약이 진행 중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