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0화 뉴욕으로 (2)
열 시간을 훌쩍 넘는 비행시간.
이코노미를 탔다면 비행을 빙자한 고문이겠으나, 비지니스를 탄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아, 주류 리스트 좀…….”
“네, 여기 있습니다.”
“위스키…… 오, 부나하벤 12년이 있네요? 이걸로 한잔하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혹시 매트리스는…….”
“이따가요.”
개인 사업 하면서 모든 직원 4대 보험을 마일리지 쌓이는 카드로 끊어 온 전 사장 또한 비지니스석을 최대한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 출장은 일은 절반도 채 안 되고 나머지는 관광으로 채울 예정이다 보니 더더욱 마음이 흡족했다.
“호오…… 이거 좋은데.”
“아…… 이런 케이스가…….”
“허어…….”
“어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히야아…….”
“허이구…….”
딱 하나, 옆자리에 앉은 두 수상한 사람들만 빼면 그랬다.
‘아니…… 저 사람들은 이 비싼 좌석 타 놓고서는 웰컴 샴페인도 안 먹고, 벌써 몇 시간을 저러고 있는 거지……?’
비지니스에 타면 이륙하기 전에 샴페인 또는 주스를 서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걸 거절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법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다른 술을 원해서이지 않겠나?
해서 그러려나 하고 봤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저 둘은 오로지 물만 마셨다.
그러곤 가방에서 프린트 해 온 종이를 서로 나누더니 아까부터 그것만 보고 있었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저, 실례지만…… 저 두 분은 뭐 하시는 거예요?”
“네? 아, 아아.”
호기심이 도진 전 사장은 승무원에게 물었고, 승무원은 탑승 전 들었던 주의 사항을 상기했다.
-태화 바이오 그룹 의전실에서 특별히 요청 들어온 분들이셔. 모시는 데 실례 없도록 하고…… 일등석으로 안 가는 건 취향이라고 하시니까, 알아만 두고.
뭔데 그러나 해서 검색을 해 보았더니만 나무위키가 떴다.
내용이 어찌나 신묘하던지, 안을 들여다보던 승무원은 무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비슷한 것이 생겨 버렸다.
“공부하시는 거예요. 의사신데…… 아주 유명한 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저분이?”
“아, 아뇨. 저분은 제자시고, 그 옆에 분이요.”
“네?”
“저도 헷갈렸는데 그렇다더라고요. 아무튼, 이번 비행에서 응급 생겨도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진짜 대단하신 분이더라고요.”
“어…… 뭐, 잘된 일이네요.”
전 사장은 별일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위스키를 홀짝였다.
이제 막 위스키란 술을 배우고 있던 참이다 보니 맛은 잘 몰랐다.
부나하벤 12년산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되었을 뿐, 실제로 먹어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게 싱글 몰트의 맛인가……?’
음미하려고 참으로 노력하면서, 눈도 살짝 감으면서, 심지어 온더락이 아니라 니트로 한 모금 딱 넣고 마시고 나서 눈을 떴다.
‘음…….’
아까부터 계속 먹어서일까?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타구니에 우리한 통증이 나타났다.
그리고 통증이 좌측 하지로 방사되는 느낌을 받았다.
쭉 뻗어 나가는 통증은 쉬이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이게 대체 왜 이러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는 건가? 아닌데? 아니라고 하던데…….’
처음부터 이랬던 것 아니었다.
사업하면서 술을 얼마나 마셨던가.
사실 술 먹는 게 사업 초기에 나름대로 무기 중 하나였던 만큼, 주량 하나는 자신 있었더랬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술만 어느 정도 마시면 이 통증이 나타났다.
망할…….
‘왜 이럴까?’
잠깐 고민하느라 눈을 다시 감았다 떴을 때, 전 사장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어잇, X발. 뭐야.”
아까부터 수상해서 또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 즉 유명한 의사라고 했던 사람이 코앞으로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
설마 아까 대화를 들었나?
그걸 무례하게 느꼈나?
사실 비지니스석을 탔다는 거 자체가 프라이버시 또한 존중받고 싶단 뜻이 있었을 텐데, 그걸 침해했으니…….
“미안합니다. 제가 그. 비지니스 처음 타 봐서.”
옆이 좀 번쩍인다 싶어서 보니 다른 대머리 의사 하나도 서 있었다.
수상함과 신기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두려움이 자리했다.
그렇다 보니 별의별 소리가 튀어 나가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미안해요?”
일단 눈앞에 있던 사람, 수혁이 ‘뭔 소리 하나 이 사람?’ 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그게 아니면, 왜……?”
“지금 여기 아프죠?”
그러곤, 수혁은 멀뚱한 얼굴로 손가락을 쭉 펴서 전 사장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대단히 민망했다.
아픈 건 맞는데……
사실 또 그렇게까지 막 아픈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가리키니까 좀 그랬다.
다행인 것은 비즈니스석은 이코노미석보다는 각 좌석당 배정된 승무원 수가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저, 왜 그러시는지.”
원래 같았으면 일단 수혁과 안대훈을 자리로 끌고 갔을 터였다.
-VIP다, VVIP야!
허나 먼저 들었던 말 때문에 일단 두 측에 모두 공손하게 말했다.
“아.”
나선 것은 안대훈이었다.
수혁 또한 언변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의료계에서 통하는 것에 비하면 일반적인 면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사람 아닌가.
‘우리 교주님이 좀 그렇지.’
안대훈은 노회한 부장급 또는 임원급 인사나 지을 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분이 좀 아파서요.”
자신은 정상이다.
일반적이다 라고 확신하면서였다.
“네?”
물론 먹힐 리가 없었다.
‘뭐야…… 무서워…….’
승무원은 대뜸 아프다는 말에 일단 전 사장부터 돌아보았다.
하나도 안 아파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취해 보인다 정도?
이런 손님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본전 뽑아야 하지 않겠나.
당장 승무원부터도 비지니스 타면 죽도록 마실 터였다.
“그…….”
“여기 아프잖아요?”
승무원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사이, 수혁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전 사장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전 사장도 더 예민하게 굴진 않았을 텐데, 수혁의 손가락으로 거기서 좌측 하지를 그었다.
“이렇게 뻗치는 거 같은데?”
“어…….”
전 사장은 이 양반이 점쟁이 빤스라도 주워 입었나 싶어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당황한 게 너무 명확하다 보니 승무원도 이게 뭔가 있긴 있구나 하고 뒤로 물러섰다.
나X위키에서 본 구절 때문이기도 했다.
-이수혁 교수님이 아프냐고 물었을 땐, 잠자코 있어야 한다. 무조건 아픈 거니까. 설령 환자가 아프지 않다고 해도 아픈 거다. 아픈 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슨 성경 구절 같은 말이긴 한데…….
그냥 말만 있는 게 아니라, 유튜브 영상도 있다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설명을 너무 잘하는 사람이다 보니 문외한조차 듣다 보면 무슨 탐정 드라마 보는 기분을 받아서 어제 몇 개를 봤는지 몰랐다.
나중에는 내가 보는 게 리얼인지 아니면 웹소설 원작 드라마인지 모르겠단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아프시네.”
“그…… 네. 아프긴 합니다.”
“원인은 알고 계십니까?”
“아뇨, 전혀…… 제가 사실 이거 때문에 병원도 갔었거든요.”
“뭐라고 들었죠?”
승무원의 묵인하에 비행기 안 진료실이 열렸다.
환자 아니, 전 사장 또한 얼떨결에 완전히 환자 모드가 됐다.
아프냐고 했던 데가 양상까지 그대로 아프지, 술도 살짝 취해서 알딸딸하지…….
비즈니스석 타는 바람에 기분도 떴지…….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도 좀 있었다.
“그냥 뭐…… 별거 없었는데…… 사실 이렇게 뻗치는 통증이 있으면 디스크라고 하던데 그것도 아니라고…….”
“뭘로 진단했습니까?”
“그냥 엑스레이요.”
“뭐, 엑스레이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면 더 안 찍는 게 맞기는 합니다만.”
수혁은 씨익 웃으면서, 안대훈을 돌아보았다.
‘벌써…… 아니, 아까 움직이실 때부터 아시는구나.’
그래, 이제 시험이구나.
하긴 이수혁 교수님은 사람이 아니시지.
어떻게 알았지?
그만한 힌트가 있었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뭐 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들지도 않았다.
신앙의 영역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훈아.”
“네.”
“환자분이 처음부터 아파하시는 거 같았어?”
“음.”
대훈은 당황했다.
처음?
그럼 안에 들어오면서 벌써 살피고 있던 걸까?
가져온 서류…….
그러니까 논문 더미 보느라 바빴던 거 아닌가?
“처음엔 못 봤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대훈아.”
“네.”
“너는 그러면 안 돼. 넌 내 수제자잖아.”
“네, 죄송합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있으면 혹시 저 사람이 아픈 건 아닌지 반드시 봐야지.”
“네, 교수님.”
수혁은 그런 대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제야 전 사장은 아, 이 사람이 진짜 윗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승무원은 어떤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영상과 문서에서 본 사람 그 자체였다.
“뭐 지나간 일이니…… 환자분.”
수혁은 이제 대훈 대신 전 사장을 바라보았다.
“네, 네.”
전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제 정말로 진료 중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비즈니스석인지는커녕 미국 가는 길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술 먹고 아프신 거죠?”
“아…… 네.”
[역시 그렇군요. 확실히 술 말고는 딱히 뭐가 없었죠.]
‘드물게 기압 차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글쎄. 2000년 이후로 비행기 압력 조절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잖아.’
[그렇죠. 민항기에서 항공성 중이염 발병률 자체도 줄었습니다.]
‘그렇지.’
수혁은 역시 맞군 하면서 바루다와의 토론을 이어 나가면서 동시에 전 사장과의 대화 또한 이어 나갔다.
“얼마나 되셨죠?”
“그…… 한 3개월?”
“3개월이라.”
[긴데…….]
‘방사통이 발생할 정도면 꽤 진행했다는 얘기야. 내 생각이 맞다면 말이지만…….’
둘과 동시에 대화를 하면서도 수혁은 전혀 헷갈림이 없었다.
오히려 증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추론만 확고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수혁만 추론을 이어 나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대훈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훈은 수혁의 표정에서 힌트를 얻었다.
‘표정이 어둡다…… 어지간한 병은 아니란 거야.’
수혁은 딱히 표정을 숨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환자 앞에서는 어느 정도 조절을 하지만, 그건 실제로 뭔가 얘기할 때 얘기지 이럴 땐 예외였다.
‘근데 전혀 모르겠다. 안 좋다는 것만 알겠는데.’
대훈이 좁쌀만큼 전진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수혁은 정답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 수혁이 하는 질문은 모두 대훈에게 주는 힌트라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 운동을 하거나 움직일 때 통증이 있는 곳은 없어요?”
“어…… 사타구니 쪽은 아닌데요?”
“다른 곳이어도 좋습니다.”
“그게. 이게 맞나 싶은데.”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제가 하겠습니다. 환자분은 그냥 다 말씀해 주세요.”
“그…… 네. 알겠습니다. 실은 그제…….”
전 사장은 아까부터 환자라고 부르는 수혁을 보며 최선을 다해 기억을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