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2화 혼내 주러 왔습니다만 (1)
-기장입니다. 이제 곧 우리 비행기는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오니…….
전 사장의 귀에 방송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진료 시간이라고 해 봐야 20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원래라면 남은 10시간 동안 더 이 귀한 비즈니스석을 즐겨야만 했다.
허나 암이라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
밥이 넘어가겠나?
술?
술은 좀 당기긴 했다.
-술이요? 먹으면 될 거 같습니까?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수혁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그것도 무리였다.
해서 그저 멍하니 있었다.
무력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암이란 병에는 진단이라는 말보단 아무래도 선고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걸,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이건…….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당장 미국 출장 계획만 해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지 않나.
정말이지 인간의 계획이라는 건 이 자연의 섭리 앞에 아무 힘도 없는 거 같았다.
“환자분.”
“그, 네? 아, 네.”
좌석에 몸을 틀어박고 후아아- 하고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수혁이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이름도 안 물어보긴 했는데 하여간, 정식 호칭을 환자분이라고 정해 버린 모양이었다.
뭔가 억울하고 분했지만 실제로 환자가 맞기는 해서 네라고 했다.
“여기 제 번호예요.”
“어…… 이건…….”
“볼일만 보고 나면 전화해요. 여기서 확진까지 하고, 태화로 가서 치료합시다.”
“어……. 그,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불만을 품고 있던 와중에 훅 들어오는 바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번호까지 주면서 치료하자고 할 줄이야.
죽음의 5단계에서 부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치료 안 받고 일단 지내 보려 했던 마음이 눈물 대신 안으로 쑥 들어갔다.
어쩌겠나.
한퀴즈에도 나온 현시점 국내 제일의 의사가 병 걸린 거 맞고 그 병 고치도록 도와준다는데.
“그래요. 너무 걱정만 하고 있진 말고요. 병기 봐야 알겠지만……. 옛날보다는 훨씬 예후가 좋아졌어요. 태화에 마침 조태진 교수님이라고 훌륭한 교수님도 계시고요.”
“교수님이 직접 치료는 안 해 주시나요?”
“저는 진단하고 급한 치료 정도만 담당합니다. 게다가 혈액암이면 전문가가 보는 게 맞아요. 아마 우리가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에도 새 논문 몇 개 나왔을 겁니다.”
“아하…….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꼭 전화드리겠습니다.”
해서 고맙다고 하고 고개도 몇 번 끄덕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아까보단 훨씬 편안해졌다.
수혁의 얼굴과 말투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대훈아.”
“네.”
“다 봤어?.”
“아, 네.”
“그럼 나 줘.”
“이거 교수님이 다 보셨는데요?”
“어, 다 봤지. 근데 그냥 또 보게. 재밌잖아.”
“아……. 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수혁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대훈에게 논문을 받아 들고 또다시 탐독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보기에도 신기한 광경이겠지만 대훈이 보기에도 비슷했다.
‘보통…… 저렇게 보고 또 보고 하는 건 만화책 아니면 소설책 아닌가……?’
대훈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꽤 재밌게 보는 편이긴 했다.
애초에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생을 걸 수 있겠나.
이것만 해도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얘긴데…….
저쯤 되면 재능이 아니라 그냥 미친 수준이라 해도 좋았다.
끼이이이익
이제 슬슬 아니, 사실 한참 전부터 지친 상태였다.
막말로 15시간 가까운 비행시간 동안 공부만 한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들뜨기로만 따지자면 전 사장보다 더한 것이 안대훈이었다.
술도 막 종류대로 깔아 두고 먹고 싶고, 밥도 두 끼 먹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옆에 교수가 저러고 있는데.
해서 억지로 억지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비행기가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앉았다.
밖을 내다보니 확실히 생경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전에 한번 와 봤다고 익숙한 느낌도 들었지만 하여간, 우리나라가 아니구나 싶달까?
“어, 대훈아. 다 왔네?”
“네.”
“아마 밖으로 나가면 대기하고 있을 거야.”
“어…… 누가요? 제가 지금 막 우버 잡으려고 했습니다만.”
“아, 그럴 필요 없어. 태화 바이오 지사도 있고 병원도 있잖아. 거기서 나와 주시기로 했어.”
“아……. 교수님……. 진짜 출세하셨군요.”
“어? 어어. 뭐……. 그런 셈이지?”
만리타향 뉴욕에서조차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니.
수혁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레지던트 시절부터 봐 온 안대훈으로서는 잠시 울컥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크흡.”
“지랄……. 지랄 말고.”
물론 안대훈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게 일반적인 감정은 아니다 보니 타박이 이어졌다.
괜찮았다.
안대훈은 타박을 타박이 아니게 받아들이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으니까.
“네네. 하하.”
“그래. 입국할 때 잘할 수 있지?”
“저요? 저 영어 잘합니다.”
“그래……. 이제 잘하지.”
예전 안대훈에 비하면 괄목상대라는 말을 써도 좋을 만큼이나 성장한 마당이었다.
치킨? 비프? 를 묻는 사람한테 갑자기 자기 베지테리언이라고 했던…….
언제 떠올려도 황당한 일화의 주인공이 안대훈이지 않나.
그랬던 안대훈이 이제 발음만 빼면 거의 네이티브라고 해도 좋을 만한 실력자가 되었다.
-좋은 의사가 되려면 영어도 잘해야 한대…….
수혁의 조언 아닌 조언이 채찍질이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부우웅
당연히 별문제 없이 둘 다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짐까지 찾아 나오자 벤틀리에서 나오는 럭셔리 SUV 벤테이가가 다가왔다.
뉴욕 공항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화려한 차였다.
“아니, 이런 게 지사에 있어요?”
“아, 빌렸습니다. 그, 죄송합니다.”
“왜……. 왜요?”
해서 물었더니 좀 이상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계속되는 수혁의 물음에 직원은 멋쩍은 얼굴이 되어 답했다.
“인계 사항에 교수님은 롤스로이스 좋아하신다고 하던데……. 이게 공교롭게 렌털이 안 되어서요.”
“네? 아니, 누가 그런……. 그런 낭설을?”
“네? 아닙니까?”
“네. 저 그냥 아무거나 잘 타는데…….”
“두바이에서랑 싱가포르에서 모두 롤스로이스 따로 타셨다고…….”
“아……. 그거요. 그게 어쩌다 보니.”
직원은 얼버무리는 수혁을 보며 속으로만 웃었다.
‘아닌 척하시기는…….’
병원 내 사람들.
아니, 이제는 의료계 종사자라고 해도 좋을 만한 사람들은 수혁을 이현종의 아들로 알고 있지 않나.
일단 뛰어난 실력과 이어지는 기행도 닮은 데다가, 펠로우도 없이 교수가 되질 않나, 그에 더해 부센터장이 되질 않나…….
특혜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한 파격적인 행보가 있었으니 그렇게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회장님의 숨겨 둔 아들이라지……?’
허나 밖에 있는 사람들, 즉 태화 그룹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낭설이 퍼지고 있었다.
김다현과 이현종 의원 그리고 싱가포르와 두바이에서 우연찮게 권력가들의 환심을 산 탓이었다.
그 때문에 외국만 나가면 진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있지 않나?
‘학회도 열자마자 무슨 호텔에서 하고 블핑 불렀다던데……. 다음 학회 때는 아이브 공연한다고……. 원장 아들로 그게 되겠냐?’
심지어 두바이 왕자의 입김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보니, 국내에서도 눈에 띄게 화려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좀만 조사해 보면 수혁이 지내는 오피스텔의 시세도 나오는데 그 가격이 미친 수준이다 보니 낭설은 좀처럼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살이 붙어 나가기만 해서 지금은 태화 그룹의 뉴욕 지사 전 직원이 충성을 다해 수혁을 모실 것을 바로 지난주에 결의했을 지경에 이르렀다.
배다른 자식이 분명하니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이만한 대우를 받는 데다가 저리 똑똑하기까지 하니 뭔가 한자리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냐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예약해 주신 바카라 호텔 앤 레지던스 뉴욕으로 모시면 되겠죠?”
“아, 네. 거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제가 예약한 건 아닌데…….”
외국 간다고 하니까 득달같이 김다현의 의전실 직원들이 도왔다.
가뜩이나 잘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번 한퀴즈에서 홈런 정도가 아니라 숫제 만루 홈런 여러 방 친 것과 같은 임팩트를 보이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한동안은 돈 아끼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 두바이의 왕자 또한 방송 봤다고 하면서 돈을 보탰다.
그 결과 수혁은 하이엔드 브랜드 호텔인 바카라 호텔 앤 레지던스 뉴욕의 프레스티지 스위트 룸에 묵게 되었다.
‘어디라고?’
[프레스티지 스위트요. 뭔가 비싸 보이는 이름 아닙니까?]
‘바카라가 근데 도박 이름 아냐? 난 마음에 안 드는데…….’
[김다현 회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습니까.]
‘왜 극존칭이야?’
[회장님이시니까요. 카드도 전달받았는데……. 할 수만 있다면 가서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수혁은 세속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바루다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직원에게는 꼭 무심한 재벌 3세처럼 보였다.
‘세상에……. 하룻밤에 거의 500만 원짜리 방에 묵으러 가면서 저런 표정이라니…… 역시……. 맞구나…….’
배다른 자식이래도 재벌 3세는 3세구나.
하긴, 그러니까 김다현 회장이 따로 부탁도 하고 그러지.
그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이라던가.
그 나이에 직계도 아닌데 한 그룹의 회장이었다.
나름 이유원 회장이 소유와 경영을 구분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손 치더라도 저만한 쾌속 승진에 이어 거의 붙박이로 보이는 회장직 유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철면 김다현.
‘허휴.’
직원은 서릿발 같은 호령과 함께 뉴욕 지사 전체를 갈아엎고 갔던 김다현 회장을 떠올리다가 몸서리를 쳤다.
그것과는 별개로, 수백에 달하는 뉴욕 지사 직원 중 제일 운전을 잘해서 뽑힌 직원은 곧 호텔에 도달했다.
그러자 벨보이 말고도 몇몇이 뛰어왔다.
“이수혁 부센터장님!”
“어…….”
“태화 의료원 뉴욕 센터장 장우영입니다. 일전에 신세를 졌습니다!”
“아. 아, 장우영 교수님. 몸은 어떠세요?”
“날아갈 거 같습니다!”
“그, 네.”
한 명은 지나치게 텐션이 높았다.
살짝 안대훈 냄새가 났는데, 수혁은 다른 사람, 뉴욕 지사장의 인사를 받느라 안대훈과 장우영 교수가 서로 눈을 맞추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어느새 뉴욕에도 수혁교가 뿌리 깊게 번져 버렸다는 걸 모른 채 인사를 마친 수혁은 이미 체크인 수속을 이쪽 직원들이 마친 덕에 바로 방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럼 편히 쉬십쇼.”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쇼.”
지사 사람들도 과잉이었다.
“혹시 센터에 잠시라도 들러 주시면 그런 광영이 또 없겠습니다.”
하지만 장영우 교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태진, 안대훈 냄새가 너무 나는데……?’
[미국에 있다 보니 단어가 헷갈리는 거…… 아니겠어요? 언제 봤다고.]
‘하긴, 그렇지?’
[그러니까요.]
수혁은 이해하려 애쓰다가, 고개를 털었다.
그사이 안대훈은 수혁이 그나마 최근에 간혹 마시게 된 위스키, 몽키숄더를 땄다.
“교수님. 정말 저가 위스키로 되겠습니까?”
“내 입맛에는 그게 좋더라.”
“네, 그럼 저도 이걸 이제부터 제일 좋은 위스키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와……. 진짜 제가 본 중 제일 영혼 없어 보이는 얼굴입니다.]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참 솔직한 놈이란 생각을 하면서였다.
“딴 거 마시고 싶으면 딴 거 마셔……. 어차피 우리가 돈 안 내잖아. 그래, 너 뒤에 들고 있는 거. 발렌타인 30년.”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너 벌써 땄어.”
“네? 아이쿠. 그럼 어쩔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