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3화 혼내 주러 왔습니다만 (2)
“어, 하윤아. 그래.”
수혁은 몽키숄더라는 중저가 위스키를 홀짝이다가, 하윤의 전화를 받았다.
‘오……. 이것이 작전의 결과인가.’
대훈은 전화 받고 있는 수혁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금은 별일이 없어도 그냥 미소가 나올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한 손에는 발렌타인 30년, 다른 한 손에는 룸서비스로 올라온 견과류와 캐비어 그리고 치즈 모둠과 같은 고급 안주가 있는데 울상을 지으면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란 말인가.
“어……. 거기가 어렵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여간, 수혁은 신현태의 계책대로 하윤과의 통화를 가끔이나마 하게 된 마당이었다.
그래 봐야 지금처럼 시험공부 하다가 막힌 것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이번에 미국에서 돌아가게 되면, 말 그대로 개인 교습을 할 예정이다 보니 다들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 쉽지?”
수혁의 말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천재는 가르치는 데는 젬병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실제로 이현종은 훌륭한 스승이기는 하되, 훌륭한 선생은 아니었다.
그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평생 의학을 공부해 대는 그 광기에 가까운 집념은 본이 될 수 있을지언정 가르치는 스킬 자체는 별로여서 그랬다.
-넌 왜 모르니……?
이현종과 제자들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재능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현종과 같은 이들은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보통 화를 내게 되기 마련이었다.
-너 집중 안 한 거지! 그렇지!
고작 이런 것도 이해 못 할 리가 없어! 와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허나 수혁은 달랐다.
왜냐.
잘난 척이 그의 특기이자 장기였기에 그랬다.
잘난 척이란 게 성립하려면 우선 상대가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해를 해야만 하지 않겠나.
그 이해를 위해 지금까지 온 힘을 다해 노력을 해 온 사람이니만큼, 잘난 척이 아닌 가르침을 위한 설명에 있어서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크, 좋구만…….”
그 자리에 있는 안대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었다.
맛있는 술과 안주 그리고 음악보다 향기로운 수혁의 설명까지.
심지어 이 자리에 자기 혼자만 있지 않나.
‘설마 꿈은 아니겠지?’
불현듯 행복한 불안감이 들어 뺨을 후려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자, 그럼……. 내일 오전 컨퍼런스부터 들어가야 하니까, 빨리 잘까?”
“아, 네. 제가 교주님 자리 데워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과하다 싶을 만큼의 접대가 튀어나왔다.
수혁은 방금 전까지 안대훈이 데워 놓았다는, 그러니까 그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인간이 아닌 데도 생리적인 불쾌함이 드는데요.]
‘그렇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네, 이건 이럴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러곤 바루다와의 작금의 사태에 대해 짤막한 토론을 마친 후, 대훈을 돌아보았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서 자…….”
“네? 아닙니다, 교수님. 겨울의 뉴욕은 춥습니다.”
“이 방은 따뜻하잖아.”
“저도 교수님과 단둘이 있다 보니 마음에 훈풍이 불기는 합니다만…….”
“너 취했거든? 그러니까 좀 잘래?”
“하하. 교수님.”
별 소용은 없었다.
수혁이 방금 마신 위스키 때문이었다.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사실 수혁이 술이 진짜 약하지 않던가.
소위 말하는 알쓰다 이건데…….
불과 더블, 그러니까 대략 60ML밖에 마시지 않은 주제에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웃차.”
“어어. 천장이 돈다…….”
안대훈은 그런 수혁을 익숙하다는 듯 안아 들고는 방금 자신이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교수님, 이렇게 그냥 주무시면 이가 썩습니다.”
“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안대훈은 자신이 챙겨 온 어린이용 치약을 꺼내 새 칫솔에 짜 놓고는 수혁의 이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어린이용 치약은 따로 뱉을 필요가 없어서 그랬다.
불소가 함유된 것이 아무래도 충치 예방엔 좋겠지만 삼켰을 때 위장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만큼,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가는 이에게는 이런 치약이 딱이었다.
“옳지. 그래요. 그냥 삼켜요.”
“어…….”
“좋은 밤 되십쇼, 교수님. 아까 옷 갈아입으시길 잘했죠?”
“어, 그런가…….”
수혁은 술 취한 것도 있고 또 안대훈이 일부러 수혁이 마음 편안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톤의 목소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대훈은 그렇게 쌔근쌔근 잠에 빠져든 수혁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로 불 끄고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대신 작은 불을 켜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교수님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수혁과의 재능 차이는 인정해야 했다.
언감생심이지 않나?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심지어 수혁이 아직 레지던트일 때부터 보아 온 안대훈이야말로 그러한 사실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수님도…… 사람은 사람이야. 신에 한없이 가까운 사람이니 앞으로 어찌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레지던트 때의 수혁, 혹 감히 바라건대 교수 1년 차의 수혁만큼 우수해질 수 있다면 하는 꿈은 꾸고 있었다.
얼마가 걸릴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제보다 오늘의 대훈이 더 낫다는 점이었다.
아니, 사실 어제보다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1주일 전보다는 나았고, 한 달 전과 비교하자면 훨씬 나았다.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곧 고양감이 되어 안대훈의 내면을 꽉 채웠다.
그 덕분에 대훈은 수혁이 도로롱 도로롱 코를 골며 잠든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교수님.”
아침이 되자 어제 봤던 뉴욕 지사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어제보다도 더 공손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또 아무리 돌이켜 봐도 역시 수혁은 재벌 3세가 맞아 보여서 그랬다.
그걸 딱히 말로 한 적은 없지만 그가 보여 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귀티가 난달까?
“아, 감사합니다.”
이것 봐라.
어설프게 있는 놈들은 감사라는 걸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확실한 교육을 받은, 진짜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만약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걸 수혁이 알게 된다면 참 어이가 없긴 할 터였다.
어설프게가 아니라 아예 그냥 아무것도 없이 살지 않았나.
물론 지금이야 과분할 만큼이나 많이 갖게 되긴 했지만…….
부우웅
아무튼, 수혁과 대훈을 실은 벤테이가는 곧 마운트 사이나 병원 로비에 닿았다.
뉴욕이 아무리 막히는 도시라고 해도 호텔에서 마운트 사이나 병원까지의 거리가 짧다 보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이렇게 찾아오면 된다고 했었는데.”
공항과는 달리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 불러다 놓고 이러는 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실제로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수혁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참에 병원 안이 어떤지, 또 어떤 환자들이 다니는지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나?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놓친 환자가 있으면 더 좋을 거란 생각도 했다.
[아, 제발. 응급실 들러서 가면 안 되나?]
‘근데 응급실 출입이 엄청 까다롭다더라…….’
[아, 아쉽네요.]
‘그래서 진료 볼 수 있겠냐고 한 거야. 그럼 들어갈 수 있겠지.’
[잘했습니다. 이건 정말 잘했네요.]
수혁이 그렇게 오히려 좋다는 듯한 얼굴로 텅 빈 로비를 둘러보고 있자, 그 모습을 본 직원은 또다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인격자시다…….’
그가 아는 흔한 재벌들이었다면, 지금처럼 사람이 없다?
와…….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가슴이 막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어, 그래. 여기로 가면 된다고 했지?”
“네. 제가 사실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여기 지리를 확인해 두었습니다.”
“어……? 여기 아는 사람이 있어?”
“그럼요. 저번 코비드 사태 이후로 교수님 명성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아직은 레지던트 레벨에서만 그렇긴 한데……. 아마 이번 방문 이후로는 콧대 높은 뉴욕의 교수들도 무릎을 꿇지 않겠습니까.”
“딱히 무릎 꿇릴 생각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
“아, 네.”
안대훈은 저번 학회, 그러니까 닥터 스튜어드가 울고 무릎도 꿇고 또 오줌까지 지릴 뻔했던 그 학회를 떠올리면서도 겉으로는 티 안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또 우리 교수님의 매력이지…….’
뻔히 좋아하시면서 아니라고 하는, 츤데레 같은 매력이랄까?
사람이 사람을 한번 좋아하게 되면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대훈은 이번에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역시 교수님들 말씀대로야. 이 자식들…… 초청한 의도가 그리 좋지 못해.’
안대훈은 수혁을 바라보던 때와는 정반대의 눈빛, 그러니까 사람 죽일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병원을 둘러보았다.
수혁도 둘러보고 있긴 했는데 그는 그저 환자만 찾고 있었기 때문에 느낌은 전혀 달랐다.
‘옆에 보디가드가 있나?’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이, 스튜어드의 프락치는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 냈다.
그러고 보니 안대훈의 인상이 심상치가 않았다.
두려움이랄까?
‘아무튼, 선생님께 알려 드려야겠어.’
그는 후 하고 한숨을 쉬다가, 스튜어드에게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스튜어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각오해라……. 동양의 애송이…….’
그러곤 준비해 둔 케이스를 돌아보았다.
곧 케이스 리포트 할 예정인 케이스였다.
그만큼 어려운 케이스란 얘기였다.
물론 케이스 리포트가 될 만한 케이스라고 해서 반드시 어려운 건 또 아니긴 했다.
중요한 케이스거나 교육적인 부분이 있거나 놓쳐서는 안 되는 케이스들 모두가 리포트 감이니까.
하지만 이건…….
‘후후. 진짜 미쳤다, 이건. 이걸 안다면 인정……. 아니, 아니지. 우연이다. 우연!’
스튜어드는 웃다가 한숨 쉬다가 화를 내다가, 거의 뭐 혼자서 모노드라마 찍는 것처럼 난리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역시 소문이, 그러니까 스튜어드가 한국 다녀왔다가 미쳐 버렸다는 소문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지경이었다.
덜커덕
그렇게 각자가 각자의 생각 속에 빠져 있을 때, 수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문을 연 것은 대훈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수혁에 대한 의전은 재벌 회장 그 이하가 되진 않을 터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의 이수혁입니다.”
“저는 펠로우 안대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수혁은 웃었고, 안대훈은 이를 앙다물었다.
스튜어드 또한 허허 웃으면서, 그러나 뱃속에는 칼을 숨긴 채 자리를 권했다.
“잘 왔습니다. 마침 어려운 케이스가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마운트 사이나 사람들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케이스 잡힌 게 벌써 2주 전인데 미루고 미뤄서 오늘에야 발표하는 거 아닌가.
덕분에 나름 어떤 케이스인지 더 가닥이 잡히긴 했지만, 저 말은 순 거짓부렁이었다.
“아, 어려운 게 있어요? 좋죠.”
그러거나 말거나 수혁은 밝은 얼굴이었다.
어렵다는데 잘됐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