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69화 (1,069/1,303)

1069화 아직 학회 아닌데요 (1)

“저, 그럼…….”

발표를 맡았던 의사, 끝끝내 이름을 알버트라고 밝혔던 이가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 9시 10분.

사실 수혁은 내일 있을 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할 예정일 뿐, 오늘 온 것은 엑스트라로 온 것이지 않나.

‘저……. 저 망할……. 새끼…….’

닥터 알버트는 스튜어드를 노려보았다.

저 병신이 이상한 컨퍼런스 만들 때부터 알아보고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아니, 아닌가? 덕분에 환자 살았다고 봐야 하나……?’

그렇게 노려보고 있으려니 잠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수혁을 안 불렀으면 이 환자 지금쯤 수술장에서 전화가 왔을 터였다.

안에 들어갔더니 암은 아닌 거 같고 뭔가 좀 이상한 거 같다고.

그랬으면 식은땀이 쭉 났겠지?

복강경 탐색술이니만큼 뭐……. 어마어마한 의료사고까지는 아니긴 했다.

그래, 유선결핵인데 냅다 째고 본 거에 비하면 훨씬 나은데, 그렇다 해도 사고 칠 뻔했다.

‘그래……. 좋게좋게 여기자. 오늘 잘 오셨지.’

알버트는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간신히 정리했다.

물론 짧다는 건 그의 생각이었을 뿐 수혁과 바루다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알 이리저리 굴러가는 거 보니까 생각이 많은 거 같지?’

[네. 어차피 우리 안내해야 할 텐데……. 무슨 생각을 이렇게 할까요?]

‘그러니까 말이지.’

속생각이라고 하면 수혁이 전 세계 탑티어 아니겠나.

한 번에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듣긴 들어야 하다 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보단 수혁의 예의 레벨이 꽤 올라 있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그……. 이제 시간이 다 되어서요. 뉴욕에 오신 적이 있으시던가요?”

“전에 한 번.”

“아……. 관광은요?”

“관광?”

수혁은 이 새끼가 뭔 소리 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관광이라니?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서울보다 좀 더 크고, 본 적 없던 건물이 있고, 소호 거리에 가면 각 브랜드의 편집숍이 있고, 브로드웨이에 가면 세계 최고 수준의 뮤지컬이 매일 여러 편 열리고,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음식점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즐비하게 자리한 거 말고 뭐가 있나?

그에 비해 이곳 마운트 사이나 병원에는 서울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희귀 질환들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전자와 후자.

단연컨대 수혁에게 있어 매력적인 건 후자였다.

“네……. 관광. 그. 제 입으로 이런 말 드리기엔 좀 그런데 뉴욕이 관광 도시 아닙니까?”

알버트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딱 관광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떨떠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못마땅해하는 거 같았다.

대체 왜 이러나 싶다가 이내 스튜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하긴. 이거 컨퍼런스 억지로 보여 준답시고 하루 먼저 불렀지……. 그것도 새벽부터 사람을…….’

무례하다.

말 그대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아마 해외에 초청 연자로 갔는데 이따위 대접을 받았다면, 당장 알버트부터가 불같이 화를 냈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단 사과부터.”

그래서 사과했다.

스튜어드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만한 짓인데, 알버트는 이미 마음속 깊이 수혁이라는 의사에게 감복한 참이다 보니 그렇게 했다.

“아, 그래요. 의사가 병원을 앞에 두고 관광이라니. 실언도 그런 실언이 없지?”

“네?”

그때 알버트는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잡혀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당최 뭔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대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수혁의 영어는 발음이나 단어 선택, 악센트 등등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영어 쓰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것도 모자라 고등 교육까지 받은 지식이 구사할 법한 영어 그 자체였다.

무수한 명연설을 남긴 정치인들에게 개인 교습이라도 받았나 싶을 정도로.

‘뭔 소리야?’

그럼에도 알버트는 혼란스러웠다.

알버트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면서, 수혁은 말을 이었다.

“관광은 전에 왔을 때 했어요. 지나오면서 자유의 여신상도 봤고, 타임스 스퀘어도 봤고.”

“어…….”

“소호 거리도 유명하다는데 전 뭐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이건 그런 거 같았다.

명색이 교수고 또 부센터장이고, 그중에서도 명성 있는 사람인데 구두가 이게 뭐란 말인가.

특정 브랜드를 폄훼하고자 함은 아니었지만 발 편한 것을 제외하면 실로 아무것도 없는 브랜드의 구두를 앞코가 닳도록 신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좀 궁금하긴 한데, 아직 공연 시간이 아니죠?”

이번 말에는 옆에 있던 안대훈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히 뻗어 있는 그의 촉수 같은 인맥을 이용해 다소 갑작스레 결정된 뉴욕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표들을 구할 수 있었기에 그랬다.

‘교수님……. 알라딘입니다.’

수혁이 실사화된 디즈니 애니 중에 알라딘을 제일 좋아한다는 사실은 사실상 홈마을 맡고 있는 안대훈이나 조태진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름 필살기처럼 예매한 표를 떠올리고 또 그로 인해 행복해할 수혁을 떠올리자 안대훈은 더할 나위 없는 감정을 느꼈다.

‘뭐야…….’

정수리가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붉게 달아올랐다.

내면과는 관계없이 보고 있던 사람에게는 불쾌함과 두려움 사이 어디엔가 놓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알버트의 정신이 온통 거기에 팔릴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아직 수혁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저는 의사예요. 환자를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환자 볼 수 있게 서류도 만들어 줬잖아요?”

수혁은 품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종이로 이루어진 임시 면허증을 꺼냈다.

이렇게만 보면 대단히 없어 보일지 몰라도, 나름 미국 보건복지부에서 인증하고 마운트 사이나 병원 이사회에서도 직인을 찍어 준 면허증이었다.

저걸 들어 보이면, 적어도 이 병원 내에서는 못 갈 곳이 없고 또 못 볼 환자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었다.

서류를 떼 준 사람도 그걸 지켜본 사람도 절대 그렇게 일이 굴러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스, 스튜어드?”

그냥 컨퍼런스 때……. 그러니까 방금과 같은 대장 내시경 정도 참관이나 하겠거니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어차피 환자 볼 생각도 못 하고 뻗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뻗은 것은 알버트가 돌아본, 이 모든 일을 계획했던 이 스튜어드였다.

“어디 봐요?”

“아, 아니, 그게.”

“이 서류 가짜는 아닐 거 아닙니까?”

수혁도 서류 받아 보자마자 태화 법무팀에 의뢰해 자문을 구했던 참이었다.

-아니……. 이런 게 발부 가능하군요? 명문화되어 있긴 한데 실제 쓰인 적은 없어서 저희도 한참 알아봤습니다.

-결론은요?

-환자 보셔도 됩니다. 마운트 사이나……. 아, 시온이구나. 아무튼, 여기서는 제한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잔뜩 들뜬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 말이었다.

“아, 아니죠. 진짜입니다.”

“제가 아까 슬쩍 들어 보니까 닥터 알버트는 오전에 일정이 없던데요.”

“연, 연구 일정입니다.”

연구라.

수혁은 잠시 인상을 썼다.

이 새끼가 안내 안 해 주려고 수 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수혁, 미국에서는 연구도 아주 중요한 일정입니다.]

‘아, 맞지.’

한국에서 연구 일정이 대개 유명무실하게 돌아간다는 걸 생각해서 그랬는데, 바루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미국은 사정이 좀 다르긴 했다.

해서,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불쌍한 중생에게 한 가지 은혜를 내려 주기로 작정했다.

‘내 역량이면……. 도움이 되겠지?’

[수혁, 그 메사추세츠 병원에서도 벌써 결정적인 힌트를 우리 덕에 열 개도 넘게 얻어 갔습니다.]

‘그 덕에 나도 2저자로 엄청 이름 올리고 있고.’

[네, 윈윈이죠.]

자아도취에 의한 생각은 아니었다.

실적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뭐 막힌 부분 있어요?”

“네?”

“내가 잠깐 보면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연구 중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오전 시간에 할 일은 그걸로 퉁 치고, 환자 보러 가죠.”

“네, 아니, 그건……. 이게 대체 무슨.”

적어도 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건방진 말도, 교만함의 발로도 아니라고.

데이터에 기반한, 지극히 합리적인 말이라고 여겼다.

허나 그러한 내막을 전혀 알 리 없는 알버트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스튜어드에게 들은 정보밖에 없었을 때라면, 그러니까 방금의 이 위업을 보지 못했더라면 화를 냈을 터였다.

‘혹……. 혹시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알버트의 머릿속에 자리한 수혁의 이미지는 규격 외 의학 천재였다.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발표했지만 태화에서 도왔을 거라 여겨졌던 모든 것이 수혁 홀로 이루어 낸 업적일지도 모른다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해서 망설이자, 수혁이 틈을 찌르고 들어왔다.

“뭘 그렇게 고민합니까. 가죠.”

“가요?”

“연구실로.”

“아니……. 그……. 거참.”

당황한 사람은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수혁이야말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는 이현종이 이 분야 원톱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슬슬 수혁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있었다.

‘역시 교수님……. 못 말리신다니까?’

대훈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알버트와 함께 복도를 거닐고 있는 수혁을 보면서 또다시 웃었다.

맨날 남들보고 미쳤네 어쩌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어떤가.

어느 누구보다 미친 사람이 바로 수혁이었다.

보통은 그걸 몰라서 진짜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겠지만, 안대훈이 볼 때는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영원히 그렇게 맑은 눈의 광인으로 계셔 주십쇼.’

해서 안대훈은 아무 데나 붙잡고 기도했다.

기세에 비하면 그리 간절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럴 거 같아서 그랬다.

지금까지의 수혁을 보면 앞으로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 같진 않았다.

“연구실 좋네.”

“그……. 얼떨결에 같이 오긴 했는데 제가 하는 연구라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A.I.를 이용해서 기존에 있던 NASH에 대한 진단 기준과 예후 판정을 조정하려고 하는…… 어어. 그거 그렇게. 아니, 저 아직 이거 발표도 안 한.”

수혁은 연구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예의상 좋다는 말을 하고는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서류를 뒤적거린단 얘기는 아니었다.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알버트는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뒤늦게 말리려 들었는데, 안대훈이 제지했다.

“좀만 기다려 보세요.”

“아니! 내 아이디어가!”

“우리 교수님이 댁의 하찮은 아이디어를 탐낼 사람으로 보입니까?”

“어? 뭐라고요? 아니. 어……. 그런가? 하찮…… 하찮은가?”

맑은 눈의 광인이란 말이 비단 수혁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누구보다 미친 사람이지만 본인은 부정하는 사람이 여기 한 사람 더 있었다.

안대훈.

그리고 이수혁.

두 희대의 의학 천재 또라이에게 둘러싸인 알버트는 이게 꿈인가 싶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있으려니, 수혁이 입을 열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더 수월할 거 같은데.”

별거 아니라는 투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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