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본격적으로 (2)
“가서 볼 수 있을까요?”
수혁의 말에 알버트가 좀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환자 보자는 말을 저렇게 간절한 얼굴로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수치와 별 의미 없어 보였던 기록만 봐도 90% 이상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확실히…… 소아는 어려운 건가? 아니, 아니지. 소아라서 어려운 게 아니라…….’
닥터 알버트는 소아과 의사를 바라보았다.
백발이 눈에 띄는 그는 여느 병원 같았으면 벌써 퇴임해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마운트 사이나 병원은 능력만 있으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병원이었고, 저 사람 또한 그러한 연유로 병원 전체에서 탑 10위 안에 드는 연봉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된 분야는 소아암 중에서도 백혈병이지만 이런 괴질에 가까운 질환에서도 어마어마한 실력을 뽐내고 있기에 그랬다.
‘저 사람도 모를 정도면 뭐…….’
말 다 한 셈 아닌가?
이걸 만약 수혁이 잡아낸다면…….
정말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잡아낸다면…….
‘스튜어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알버트는 여전히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어마어마한 기대를 품은 채 안으로 향하고 있는 스튜어드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진단 못 하기를 원하고 있구만…….’
어떻게 봐도 부적절한 상황이었다.
세상에 의사가 돼서 환자 진단이 안 되기를 바라고 있다니.
“어휴.”
알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며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그에 반해 수혁은 맨 앞에 있었다.
“저, 닥터 리?”
“네.”
“환자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요?”
“아.”
그 바람에 병실을 지나칠 뻔했다가 소아과 의사의 만류로 간신히 제대로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어제 이송되어 왔고…… 아무래도 그, 거기서 너무 험악한 상황을 많이 겪어서 지금 안정 취하고 있습니다. 일단 검사 하나도 안 했어요.”
아니, 바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소아과 의사는 그야말로 소아과 의사가 지을 법한 표정, 그러니까 인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
[뉴스에서 봤습니다.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려고 합니까?]
‘어…….’
그 말에는 수혁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에 불과한 바루다 또한 감정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인생 전체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방향으로 살아온 사람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실리는 법이었다.
다만 수혁은 그러한 면에서 감정 반응이 아주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거기에 더해 방금 바루다가 했던 말이 영화에서 많이 들었던 것이다 보니 잠시 딴생각에 빠져 버렸다.
그 영화가 유토피아를 그렸던 영화였다면 모르겠지만 완전 정반대의 영화는 아니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네?]
‘아니, 아냐. 나도 잘 몰라. 근데 뭐…… 전쟁이 그나마 지금처럼 적은 시절도 없을걸.’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생해야 잘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전쟁은 사라졌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비록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평화라 해도 단 한 명의 미친놈에 의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말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라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하여간,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뭐…… 아.’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어느새 안쪽으로 들어와 시야에 들어온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이였다.
허나 표정은 흔히 보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나마 대학 병원에, 그러니까 정도 이상으로 아픈 아이들이 많은 곳에 근무하던 수혁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눈을 딱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격에 빠졌을 터였다.
그만큼 아이의 얼굴은 생경할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에 비해 아이를 둘러싼 모두는 그런 아이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마저 그랬는데,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물론, 아이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좀 그렇긴 한데…… 일단 몸이라도 고쳐야지.’
[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거죠.]
마음의 상처가 있을 터였다.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솔직히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수혁임에도 불구하고 스쳐 지나가는 뉴스와 유튜브 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안녕? 괜찮니?”
수혁이 그러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백발의 소아과 의사는 고통에 의해 새겨진 주름 속에 인자함을 담아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사이 옆에 있던 상대적으로 젊은 소아과 의사가 속삭였다.
“유니세프나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보내온 환자는 전부 선생님 사비로 치료해요.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아.”
그 말에 수혁은 딱히 쓸 데가 없어 쌓여 가던 잔고를 어디에 써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조금 얻었다.
물론 앞으로 결혼도 하고 싶고 또 집도 사고 싶은 사람이다 보니 전액을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단 몇 퍼센트라도, 이렇게 쓴다면 의미가 있을 거 같았다.
“아…… 네.”
“그래. 기운은 없어 보이는데.”
“아…… 네. 좀 힘들어요.”
“그래.”
놀랍게도 아이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억양이 아무래도 좀 어색하긴 했지만 하여간, 영어를 쓸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적어도 수혁에게는 그랬다.
뭐, 지금 여기서 그러한 내막을 캐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보니 수혁은 애써 다른 생각을 싹 지우고 아이에만 집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의 몸에 집중했다.
다행히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다 보니, 분석은 바루다가 하지 않던가.
[피부, 잇몸, 손바닥, 팔꿈치에 과색소침착이 있습니다.]
[발음의 정확도, 그리고 이중 언어 구사자임을 감안할 때 지능은 정상 또는 그 이상입니다.]
[발육 지표는 아까 들었듯이 정상입니다. 미국 지표 말고 한국 지표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오히려 상위에 속합니다.]
‘그래…… 영양 결핍 기준이 저 위 팔의 둘레로 하지?’
[네. 이기자 교수가 관심이 있죠.]
엄지와 검지 사이에 팔이 잡힌다.
말이 되나 싶을 텐데, 세상엔 그 정도로 굶주린 아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눈이 살짝 건조해 보이는데.’
[네, 저도 확인했습니다. 검안경으로 보면 그로 인한 약간의 시력 저하가 있을 거 같군요.]
‘흐으음…….’
당장 확인한 것에 더해 구토와 설사라는 증상이 있다.
삼킴 장애도 있다고 했고……
‘하지만 구토나 설사는 너무 많은 영양이 들어가게 되면 흔히 발생하는 증상이야.’
[유니세프는 오래된 기관입니다. 구조에 있어서 스페셜리스트일 텐데, 그런 실수를 했을 거 같진 않군요. 게다가 삼킴 장애는 아예 다른 얘기입니다.]
‘하긴, 그렇군.’
수혁이 바루다와 함께 빠르게 분석을 해 나가는 동안, 소아과 의사는 아이를 잘 달래고 거기에 더해 수혁을 소개도 해 주었다.
다행한 것은 수혁이 나름 아이들에게 먹히는 얼굴이란 점이었다.
일단 동안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수혁은 그렇게 애써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 오는 아이를 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과색소침착, 기운 없음, 삼킴 장애, 안구 건조, 구토와 설사.’
[네, 그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능한 원인은……?’
[아직은 너무 많군요. 일단 기운 없음.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문진을 요합니다.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호르몬 영향일 가능성이 큽니다.]
‘역시 그렇지.’
갑상선 기능 저하가 와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갑상선 호르몬은 아이 성장기에 있어 너무 크리티컬한 영향을 미치는 녀석이었다.
그게 없으면 단지 힘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지능 저하나 성장 부진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터였다.
그냥 좀 부족한 수준일 수도 있으니.
“어머님이시죠?”
“아, 네.”
하여간 문진을 위해 가족부터 찾았다.
부모는 아무래도 영어가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통역사가 나섰는데, 지금으로서는 단순 통역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뭐, 잘된 일이었다.
자세한 문진이 가능하다는 얘기였으니.
“아이를 몇 주에 낳았는지 아세요?”
“어…….”
몇 주에 낳았나.
이건 꽤 중요한 정보였다.
주요 선진국이 아니라 의료 인프라가 조금이라도 발달한 나라라면 모를 리가 없었고.
“아, 39주입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엄마가 아니라 옆에 있던 통역사였다.
확실히 단순 통역사는 아닌 듯했다.
‘유니세프 직원인가?’
[그럴 수도요.]
아무튼, 39주라면 미숙아는 아니다.
“당시 문제가 있었나요?”
“아…… 우리 애가 좀 처지는 편이긴 했어요. 특히 2, 3살 때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애들하고 잘 놀지를 못했어요.”
이번 질문에는 엄마가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답하고 통역사가 영어로 전달해 주었지만.
아무튼, 수혁은 ‘기운 없음’이라는 증상이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확인했다.
‘선천성 질환일 가능성이 높아.’
[네. 아니라면 그때부터 이미 만성화된 질환이었거나요. 아무래도 한국이 아니다 보니…… 추론이 어렵군요.]
‘그래. 흠…… 아무래도 영양이 정기적으로 제대로 공급되었으리란 기대는 접어놔야겠지?’
[네, 그렇습니다.]
둘은 부모의 마른 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형 관리 차원에서 다이어트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뭐가 없어서 마른, 그런 몸이었다.
특히 아버지 쪽은 무언가 아주 고된 노동을 했는지 한쪽 어깨가 아예 무너져 있었다.
“잘 못 놀았다는 게, 뛰지 못했다는 거예요?”
“아, 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못 먹었던 건 아닌가요?”
“아, 아뇨. 다 비슷하게 먹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보기에 아이가 눈이 좀 건조해 보이는데…… 눈물이 적어 보여요. 이건 알고 계셨습니까?”
수혁의 말에 부모가 통역사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동그래져서 그랬다.
뿐만 아니라 주변을 지키고 있던 소아과 의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름 현지 병원 또 의사들이 보내온 소견서를 숙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정보는 없어서 그랬다.
“어떻게 아셨죠?”
“잘 보니까…… 눈을 아주 자주 깜박이고, 눈물이 간혹 밖으로 나와서요. 오히려 안구가 건조하면 그렇죠.”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네. 애가 울어도 눈물이 잘 안 나와요. 우는 척하는 건가 했는데 아닌 거 같기도 했는데…… 들어 보니 확실히…….”
눈물은 부족한 게 확실하다.
더 물어보니 인지한 것은 아이가 3살일 때인데, 아마도 더 오래된 증상일 터였다.
이건 영양과는 딱히 관계가 없는 일이다 보니 선천성 질환의 가능성이 좀 더 올라온 셈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 뭐 다른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아주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수혁은 말을 하면서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별거 안 했는데도 지쳐 보였다.
뭐 못 먹은 사람처럼.
병원에 입원했으니 잘 먹었을 테니, 이건 확실히 증상이라고 봐야 했다.
“아…… 우리 애가 두 번인가 발작을 한 적이 있어요.”
“발작……?”
“네. 병원에서는 열나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제가 기억하거든요. 열은 안 났어요. 저절로 좋아져서 그냥 두긴 했지만…….”
“열성경련은 아니다?”
“저는…… 뭐…… 확실한 건…….”
죄지은 것처럼 쭈뼛대는 부모를 보다가, 수혁은 이내 눈을 감았다.
뭔가 감이 왔다.
이건 꽤 중요한 단서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