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화 접수 (2)
“흐음.”
발표를 맡은 것은 소화기내과 의사였다.
어제 수혁의 말에 따라 대장 내시경을 했고, 그 결과, 맹장 암이 의심되었던 환자에게서 아메바 종을 진단했던 그 사람이었다.
‘스튜어드……. 저 인간이 도움이 되는 날이 있네.’
오늘 컨퍼런스는 원래 있는 컨퍼런스였다.
소화기내과에서 하는, 소화기내과 질환을 다루고 소화기 사람들이 오는 컨퍼런스.
그걸 부득불 우리도 할 수 있네 어쩌네 하면서 다른 분과를 다 불러온 것이 바로 스튜어드였다.
뭔 지랄이지 싶었다.
굳이 과거형을 쓸 필요도 없었다.
‘진짜 지랄이지.’
지랄인데…….
오늘은 예외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어제 바로 수혁의 대단함을 눈앞에서 보지 않았나.
거기에 더해 그 뒤로 있었다는 어마어마한 활약상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모든 일이 몇 달간 걸쳐서 있었다고 해도 대단하단 말이 나올 텐데, 단 하루 만에 그랬다.
‘마침 어려운 케이스가 있기도 하고 말이야.’
이걸 단순히 어려운 케이스라고 해도 좋을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약간 사고 치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런 걸 남들에게 말하면 VIP의 일종이다 보니 네가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다 라는 말만 듣기 일쑤였다.
하지만 싸했다.
환자를 볼 때마다, 또 환자에 대해 토의할 때마다.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관계로……. 서서 들으셔야 하는 분들도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딱 봐도 스튜어드의 강요로 인해 온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꽤 흥미진진해 보이는 얼굴로 와 있는 상대적으로 젊은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말이 좋아 젊은 거지 막상 따지고 보면 다 수혁보다는 위였다.
이제 갓 40대에 접어드는 이들까지도 서 있었다.
그냥 왔을 리는 없었다.
한창 자기 커리어를 키워나가야 할 나이에 할 일 없이 그냥 와?
‘이게 다 이수혁 교수 때문이겠지……?’
듣기론 스튜어드가 이수혁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하는데 어째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한껏 밀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여간, 급한 건 자기 케이스였기 때문에 그는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꽤 뚱뚱해 보이는 한 남성의 사진이 떴다.
“Type II 당뇨병 외에 기저 질환력이 없는 남자입니다. 나이는 47세고……. 가벼운 출혈을 동반하는 설사와 복통, 체중 감소로……. 시에라리온 현지 병원에 내원했습니다.”
시에라리온.
블러드 다이아몬의 배경이 되기도 한 나라로 풍부한 자원이 반드시 한 국가의 복이 되지는 못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뭐……. 이 양반이야 수혜자겠지.’
자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현지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와서는 놀랍도록 얌전히 지내고 있긴 한데 일이 틀어지면 어쩌면 힘쓰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거란 경고를 들었다.
그래 봐야 미국 내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거기서 크론병이 의심된다고 들었고, 세컨 오피니언 및 치료를 위해 본원으로 전원했습니다.”
시에라리온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에 치료차 온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계속 입원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은 호텔에 있었다.
아니, 바로 3주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
오늘은 중환자실에 있다.
“당시 본원에서 재시행한 대장 내시경에서 전반적으로 작은 궤양이 보였고, 일부 자갈길 형태로 염증이 나타나는 곳도 있었습니다. 출혈도 동반되어 있었고 이러한 양상은 대장뿐 아니라 회장 말단부에서도 관찰이 되었습니다.”
말하면서 또 한 번 내시경 소견을 보는데 역시 크론이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크론 병변이었다.
그래,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내시경만으로 보기엔 그랬다.
“사실 당시 증상이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면역 억제제를 쓰지 않고 스테로이드 치료를 했습니다. 환자는 며칠 후 호전이 되었고……. 외래에서 추적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뉴욕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들어 보니 지내기는 주로 중부나 서부에서 지냈던 모양이었다.
하긴 아프리카에서 지내던 사람이 생활하기에 뉴욕은 너무 춥지 않나.
마천루 보고 우와-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지나면 육신의 피로가 더 중요해지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몸이 정상도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환자 사진입니다.”
“어…….”
“아.”
아까 보여 주었던 사진에서 환자는 퍽 뚱뚱한 편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그 소견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마치 혹독한 다이어트라도 겪은 사람 같았다.
아예 다른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극심한 체중 감소가 있었다.
“수치상으로 22kg이 감소했습니다.”
“허어……. 22kg?”
“너무 많이 줄었는데요?”
수혁 아니라 다른 누가 봐도 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좀 이상하다는 의견들이 튀어나왔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그래서 뭐 같냐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저들도 이상하다는 말만 할 뿐, 뭐 같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어디…… 이수혁 교수는?’
화를 낼 때가 아니란 얘기였다.
해서 남은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이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때 수혁은 어디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짚기 어려운 곳을 보고 있었다.
‘뭐지.’
허공?
그래, 허공이다.
거길 보면서 이런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이 그래서 그렇지 정리하면 거의 웃고 있었다.
‘뭐가 보이나……?’
혹시 모른단 생각으로 수혁과 시선을 맞추어 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냥 허공이었다.
더 너머를 본다고 생각을 해 봐도 벽뿐이었다.
수혁의 표정은 도저히 그 벽을 보면서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 어제도 그랬지?’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았다.
오히려 살짝 기대가 되었다.
저러다 귀신같이 또 답을…….
귀신?
‘귀신을 보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뭐 사탄 들린 수준인데, 그걸 안대훈이 알아보았다.
‘좋아, 알버트랑 저 사람.’
그렇게 이 자리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에게 눈도장이 찍힌 줄도 모르고 소화기내과 의사는 말을 이었다.
“복통도 상당히 심하게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바로 나간 혈액검사에서 다행히 빈혈 소견이 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CRP가 무려 44로 크게 증가해 있었습니다.”
CRP 44.
급성 염증을 시사하는 소견이었다.
꽤 중요한 정보였는데, 수혁은 그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소견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혹시 감염 질환일 가능성도 있어 대변검사를 해 보았지만 세균이나 기생충 모두 음성이었습니다. 이건 CT영상입니다.”
“흐음.”
그제야 수혁이 관심을 보였다.
영상.
수혁도 여기서는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던가.
딱 영상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영상의학과 중에서도 복부를 전공한 사람들이 더 낫기야 하겠지만, 수혁은 늘 임상적인 고려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더 정확할 수도 있단 말이었다.
“회장 말단부와 맹장에서 염증이 있습니다.”
해서 수혁은 소화기내과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심한데.’
[네, 대장 내시경을 다시 해 보면 어마어마한 소견이 보일 거 같습니다.]
‘설령 스테로이드 단독 치료 요법이 크론병 치료에 있어 모자란 용량 혹은 용법이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해.’
[고작 한 달이죠. 한 달 만에 이 정도가 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서……. 대변검사를 한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경우에 따라, 특히 기생충 감염일 경우 생애 주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대변에 뭐가 안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그럴 수 있지.’
수혁은 크론 외에 다른 질환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양상은 완전히 크론이야. 좀 진행이 빠르긴 한데……. 완전히 불가능한 건 또 아니지. 결핵이라면 차라리 더 설명이 되겠지만…….’
[해당 검사는 나갔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래.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았네.’
결핵이라는 병이 워낙에 골 때리는 병이지 않나.
경과가 다양한 것도 다양한 건데 감염 위치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임상 증상도 다양하다 보니 일선에 있는 의사로서는 진짜 최악의 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 잘하다가 결핵 하나 놓쳐서 환자를 잃게 되는 경우가 베테랑 의사들 사이에서조차 왕왕 있을 지경이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당장 어제도 그러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소화기내과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위의 상황을 종합해서 염증성 장 질환 다학제 팀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염증성 장 질환 다학제 팀이라는 말에는 수혁도 좀 놀랐다.
확실히 시스템이 선진화되어 있긴 했다.
이렇게 질환군 하나를 두고 다학제팀을 운영할 수 있다니.
아직 인력이나 여러 설비 그리고 시간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방법이었다.
“크론의 재발이 가장 설득력 있는 진단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구로 섭취하던 스테로이드를 정맥주사로 변경하고 거기에 더해 INFLIXIMAB 요법을 더했습니다.”
보다 강력한 면역억제를 사용했다, 이 말이었다.
‘이제 슬슬 판가름이 나겠군그래.’
[네. 근데 저 정도면 수술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아마 조직 검사 결과가…….]
수혁은 이제 완전히 케이스에 빠져들어 있었다.
자세가 바뀔 정도였다.
허공도 보지 않고 있었다.
바루다가 떠드는 말은 말대로 들으면서 발표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랬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다행이라 여기며 말을 이었다.
“비경구영양법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증상 호전이 없어 대장 절제술 및 장루 형성술을 권유했으나 환자가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입니다.”
상태는 어떻게 봐도 악화된 상황이었다.
환자는 중환자실에 있었다.
“오늘 이 컨퍼런스 결과를 보고 수술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크론병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지금으로서는 다른 질환을 찾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검사에서 꽝이 나왔습니다.”
다시 시행한 검사 결과도 떴다.
수혁은 혹시 모른단 생각으로 면밀히 살폈고, 그 결과 대변검사는 다시 시행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하긴, 전신 감염병의 가능성이 더 높으니 피 검사를 통해 배양 검사를 하는 것이 더 정확하긴 했을 터였다.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그러니까.
“잠깐…….”
그 말은 곧 어떤 경우에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해서 수혁은 손을 들었다.
이미 알버트의 얘기를 듣고 온 이들과 소화기내과 의사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튜어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발표는 즉시 중단되었다.
“네, 말씀하시죠.”
“모든 검사에서 꽝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대변검사를 나가지 않았네요?”
“어, 네. 전에 나가서. 이번에는 굳이……. 혈액 배양 검사는 나갔습니다.”
“흐음. 지금 다시 나가는 것이 좋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수혁의 설명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