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84화 (1,084/1,303)

1084화 집회 (5)

“바로 하겠습니다. 시간도 얼마 안 지나서요.”

수혁은 시계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스튜어드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났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거든.

‘아니?’

그래서 적어도 30분은 지났겠거니 하고 뒤를 돌아보았더니만 글쎄 15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수 없으면 두 번째가 끝이 아니고 세 번째, 네 번째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망할.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닫고 입을 가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전 문화권을 막론하고 욕이란 것은 딱 입 모양만 잠깐 봐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꼬시네…….’

‘평소에 인종차별 오지게 하더니 제일 무시하던 동양인한테 밟히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케이스는 진짜 신기하네. 아니 CPS 1 결핍증? 그건 예후가 극악인데 오히려 그 전 단계에서 결핍이 있는 건 치료가 된다니…….’

‘그러니까. 나 이건 어쩐지 절대 안 까먹을 거 같다.’

‘나도.’

그러다 보니 원래 싸하던 반응이 더 싸해지고 있었다.

반면 수혁에 대한 반응은 좀 더 따스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수혁이 입을 열었다.

“이번 케이스는…… 아, 이건 일본에서 의뢰 온 케이스네요.”

이번에도 역시 한국 데이터는 아니었다.

일부러 그렇게 고르려고 한 건 아닌데, 애초에 선천성 대사 질환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지 않나.

아니, 흔한 질환도 있긴 한데 그건 애초부터 제외 대상이었다.

박살 내려고 온 만큼 그렇게 골랐다.

물론 스튜어드가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고른 건 아니고, 알아 둬서 나쁠 거 없는 케이스들뿐이었다.

조기 진단과 치료가 예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것들이다, 이 말이었다.

“이번에도 소아입니다. 아무래도 선천성 대사 질환의 경우엔 성인이 되어서 발견이 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합니다만, 그런 경우엔 예후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이미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이 다 발생했기 때문이죠. 그런 식으로 진단이 지연되는 이유는 역시 오진이 제일 흔합니다. 아, 기본적인 의료 인프라가 깔린 나라의 경우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수혁은 말을 하다 말고 어제 봤던 소아과 의사를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 소아과 환자는 어려웠지.’

[네. 방치된 케이스는 아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걸 배운 셈입니다.]

‘그래…… 연락 언제든 달라고 했는데, 주겠지?’

[줄 겁니다. 보니까 도움 요청할 만한 곳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더군요.]

‘잘됐군. 이제 우리 센터에서 쭉 보자.’

[좋죠.]

당시 케이스 때문이었다.

확실히 같은 질환이라고 해도 어떤 경과를 밟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귀중한 경험을 안대훈 말고 다른 센터 녀석들에게도 줄 수 있다면 참으로 보람 있는 뉴욕행이 될 터였다.

뭐, 수혁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케이스도 넘치게 해결했고, 엿도 먹였고 또 잘난 척도 한 데다가 뮤지컬에 맛있는 음식까지 다 먹었으니 만족했지만, 센터 전체를 생각하면 그렇다, 이 말이었다.

“아무튼, 환자가 병원에 찾아온 이유는 일단 키가 작아서입니다. 미국 데이터가 아닌 일본 데이터라는 것을 참고해서 들어야 하는데, 아마 미국 데이터로 치면 엄청 작을 겁니다.”

수혁은 그렇게 다시 운을 띄운 후, 화면을 넘겼다.

그랬더니 방금 말한 대로 아주 작은 아이가 떴다.

키만 작은 게 아니라 눈이 약간 창백하고, 복부는 불러 있었다.

상당히 특이한 외양을 지녔다는 말이었는데, 때문에 모든 의사들의 이목이 또다시 집중되었다.

사실 외양에서 신드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서 그랬다.

물론 그래 봐야 딱 보고 알아차린 사람은 전혀 없었다.

“아이는 3년 8개월 된 여자아이고, 재태 연령 38주 6일에 자연분만으로 출생, 당시 체중은 3.38kg이었습니다.”

출생 당시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이 말이었다.

그에 더해 일본도 의료 선진국에 해당하는 나라이니만큼, 당연히 기본적인 산전 검사는 모조리 시행한 상황이었다.

거기에서도 전혀 걸리는 건 없었다.

“보호자 진술에 따르면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원을 요하는 정도로 심각한 질환은 없었고, 단지 장염이나 감기 등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발달력을 돌이켜 보면 14개월에 혼자 걸을 수 있었고, 12개월에 단어를 2, 3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소견이죠?”

수혁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스튜어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스튜어드였기 때문에 바로 답이 돌아왔다.

내과 의사지만 내분비내과 의사고 또 유전 질환에 관심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쪽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답게 소아에 관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려움은 없는 모양이었다.

“정상입니다.”

“네. 환자는 내원 당시에도 운동 및 정신 발달은 정상이었습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또한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부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장은 지연이 있었는데…….”

수혁은 아까의 사진을 좀 더 확대한 후 말을 이었다.

“키는 90cm였습니다. 일본 데이터로 해도 앞에서 2번째 정도에 해당하는 키죠. 체중도 14kg으로 25 백분위 수에 해당합니다. 그에 비해 두위, 즉 머리둘레는 50cm로 50에서 75 백분위 사이에 들어갑니다.”

키는 작고 그에 비해 배는 나왔는데 머리는 큰 편이다 이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확실히 아이의 체형이 좀 더 이상해 보였다.

“그 외에는 결막의 창백함이 관찰됩니다. 하지만 비장 비대는 없었습니다. 자, 이제 혈액검사 결과입니다.”

모두들 결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의사 아닌가.

심지어 그냥 의사도 아니고 나름 최고라 자부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들이었다.

뉴욕에 학회차 온 사람들도 발표를 위해 여기까지 오거나 또는 배우러 왔을 만큼이나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 수혁의 팬이 많다 보니 어떻게든 맞춰서 그의 눈에 들어 볼 요량으로 달려들었다.

수혁은 그런 좌중을 둘러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드물기로 따지면…….’

[이건 진짜 드물죠. 딱 한 나라에서만 호발하는 질환인데…… 거기서도 6만 명당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딱히 거기 나라에서 온 사람은 없어 보이지?’

[네, 그래 보입니다. 물론 아직 서양인 구분에 대한 데이터는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도는 낮습니다.]

‘참고하지.’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환자의 헤모글로빈 수치는 8.9로 나이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외에 백혈구나 혈소판 수치는 정상입니다. 간 효소는 증가해 있었고…… 총 단백과 알부민 수치는 살짝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어떤 검사를 더 해 봐야 할까요?”

말이 말을 이은 것이지 사실상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대상은 아까와 같이 스튜어드였다.

나는 좌장인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또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왔는데 잠깐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유명한 사람들이 되게 많았다.

뉴욕 사교계라고 해 봐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특히 의사들이 낄 수 있는 정도의 사교계라는 건 더더욱 좁았다.

“그…… 일단은 성장호르몬부터 봐야죠.”

“환자는 빈혈도 있고, 간 수치 상승이나 단백질, 알부민이 저하되어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증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다른 검사는요?”

“다른 검사라…….”

다른 검사.

“으으음.”

스튜어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원래 같으면 일단 성장호르몬 날리고 시간 벌고 기다리는 동안 고민하면 될 일 아니던가.

허나 수혁의 질문은 집요하면서 동시에 급하기까지 했다.

“모르시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아니, 다소 악의적이었다.

물론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 학회 자체가 악의적으로 꾸려져 있었으니까.

‘아니…… 그러고 보니까 왜 내 애들은 안 오지?’

곤란한 질문을, 그러니까 한국에서 수혁이 했던 것처럼 싸가지 없는 질문을 던지게 하려고 인력을 끌어왔더랬다.

헌데 지금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비록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오긴 했지만 빈자리가 있었다.

‘뭐냐고…….’

스튜어드는 굳게 닫혀 있는 문 쪽을 노려보았지만, 어쩌겠나.

별 소용은 없었고 시간은 가고 있었다.

“스튜어드?”

“아, 네. 일단…… 그 간 수치가 증가해 있으니 암모니아 수치를 검사해 봐야 합니다.”

“빈혈에 대해서는요?”

“아아. 페리틴이나 혈중 철, TIBC도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죠. 집어 주기 전에는 뭐가 잘 안 나오는데…….”

수혁은 한 번 더 맥이고, 그 맥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다음으로 넘어갔다.

“암모니아는 520uM으로 매우 상승해 있었습니다. 페리틴도 1100 이상으로 증가했고요. LDH도 1231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정상입니다.”

“어…….”

고암모니아 혈증이다.

아까에 이어서 연타석으로.

‘또……? 그럼 이거 또 요소 회로 대사장애인가……?’

스튜어드는 그만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고암모니아 혈증이라면 응당 의심해야 할 질환들이 있는데 아까랑 살짝 겹치는 느낌이라서 그랬다.

혹시 하는 얼굴로 수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타고난 연기자인 데다가 바루다의 도움까지 받고 있는 그는 그저 상대가 순간적으로 열 받을 만한 얼굴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 보니 스튜어드가 얻어 낸 것 또한 열 받음뿐이었다.

‘하…….’

해서 스튜어드는 속으로 욕을 집어삼킨 채, 머리를 굴렸다.

당연하게도 수혁은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스튜어드를 향해 질문을 날렸다.

“자, 고암모니아 혈증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어떤 검사를 해 봐야 할까요?”

그사이 스튜어드의 추론은 조금 전진해 있었다.

‘출혈? 아니…… 아냐. 출혈로 저렇게 오를 순 없어. 게다가 아까 검사 결과를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아이씨…… 요로 감염? 아냐, 아닌데…… 감염은 가능성이 떨어져. 말하는 투로 보면 지금 저 환자의 증상이 모두 연결된 느낌이야.’

스튜어드 입장에서 그랬다는 것이지 수혁의 기준에서 보면 전진은커녕 그냥 제자리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억지스러운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방황하고 있었다.

‘저거 괜찮은 거냐?’

‘모르겠네…….’

‘나이도 많은데, 저러다 풍 오는 거 아니냐?’

‘졸도하는 거 아냐?’

남들이 보기에도 그랬다.

스튜어드는 지나친 긴장과 더불어 너무 머리를 굴린 탓에 얼굴이 창백해져 오고 있었다.

그러한 변화를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정확히 감지한 것은 역시나 수혁이었다.

“아, 이런.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면 됩니다. 졸도하겠어요. 제가 대신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 앉아요. 좌장인데 앉아야지 서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위로를 했더니, 그제야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