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5화 집회 (6)
‘아이구.’
수혁은 의자가 없었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바닥에 엉덩방아 찍고 응급실로 갔을 것이 뻔한 스튜어드를 바라보았다.
별 의미는 없었다.
스튜어드의 눈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닥터 스튜어드는 이제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곧…… 날아갈 거 같습니다. 급히 채우긴 할 텐데 그 전까지는 제가 과장 대리를 맡을 거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태화와 공조 시스템 만들어 두겠습니다.
알버트의 말이 떠올랐다.
어딘지 모르게 안대훈의 말과 좀 겹쳐 들려서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이게 또 곱씹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말이기도 하지 않나.
태화와 공조 시스템이라니…….
따로 뭐 마련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애초에 태화 의료원의 뉴욕 센터에 관련 시스템이 전부 마련되어 있으니까.
‘심지어 포터블로 준비했다고 했지?’
[네. 앰뷸런스 형태로…… 돈 엄청 썼을 겁니다. 실제로 미군에서 운용 중인 시스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근데 진짜 놀랍지 않냐? 우리나라는 군 시설이 제일 후진데, 미국은 정반대야.’
[대통령도 쓰러지면 미군 병원으로 우선 이송되게끔 되어 있으니 말 다 한 셈이죠.]
원칙적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도 삼청동에 있는 군 병원으로 이송되게끔 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던가?
심지어 외래 진료도 대통령 주치의를 각 민간 대학 병원에서 뽑아 쓸 정도로 군 병원에 대한 신뢰는 그리 높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대우를 그만큼 안 해 주는데 어찌 남을 수 있을까.
징병제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에서, 그것도 주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지도 이미 한참 된 나라에서 군 의료에 이렇게까지 무심한 나라도 극히 드물 터였다.
‘아무튼…… 의지만 있게 만들어 두면 바로바로 된다, 이거 아냐.’
[그렇죠. 연락만 하면 바로 와서 연결할 수 있게 할걸요?]
수혁과 바루다는 그렇게 잠시 넋을 놓은 스튜어드를 바라보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실제로도 시간이 수초 이상 흘렀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청중들 또한 그러고 있어서 그랬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입을 열어야 하는 만큼 조금 웅성웅성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잠시 시간을 죽인 수혁은 입을 열었다.
“자, 환자로 돌아가죠. 아마 혼자서 추스르실 수 있을 겁니다. 기저 질환이 있으시거나 한 사람은 아니니.”
그 말과 함께 청중들의 관심도 스튜어드에서 수혁에게로 훅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모르는 거로만 따지면 모두가 스튜어드와 마찬가지여서 그랬다.
아니, 알버트와 같은 일부 내분비내과 의사들을 제외하면 오히려 더 모른다고 보면 되었다.
난이도가 있다, 이건데 그럼에도 집중도가 그리 흐트러지지 않는 건 아까 수혁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몰라서 진단을 못 하면 환자의 예후는 극악으로 치닫지만, 알아서 진단만 하면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선천성질환도 있다.
비록 현대 의학이 이제는 제법 많은 질환을 정복해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선천성질환에서만큼은 별 힘을 못 쓰고 있지 않던가.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도전해야 하는 분야라서 그런데…….
그럼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여러 의학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환자의 검사 결과를 잘 보면 빈혈도 있지만, 용혈성 빈혈 소견은 아닙니다. 동시에 LDH도 올랐죠. 암모니아도 높고…… 그렇다면 간을 좀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간 기능이 떨어질 때도 암모니아가 올라가지 않습니까?”
실제 간경화 환자에서 간성 뇌증이라는 것이 발생할 때, 고암모니아 혈증이 주원인이 되지 않던가.
이건 적어도 내과 의사들 사이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얘기다 보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간 초음파를 시행했습니다. 그랬더니 간과 비장의 비대가 관찰이 되었습니다. 다만 보시면 아시겠지만 간 내부에 어떤 병변이 관찰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관찰된 소견은 간과 비장의 비대라는 것이죠.”
“간장의 비대라…….”
누군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기 어려운 비감이 느껴졌다.
방금 들었던 소견에 간과 비장의 종대라는 소견을 더했지만 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랬다.
비단 방금 한숨같이 중얼거린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머릿속도 죄 하얗기만 한 상황이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 힌트를 얻고 환자 보호자에게 문진을 시행했습니다.”
“아.”
거기에 더해 수혁은 힌트를 얻었다고 하니까 자책이 담긴 탄식까지 새어 나왔다.
주로는 내분비내과 쪽과 수혁이 진료해 준 덕에 관심이 생겨 참석한 여러 소아과 의사들 사이에서 그랬다.
나머지 인원들은 그런 저 분야의 전문가들을 보면서 다소 안심했다.
쟤들도 모르면 내가 모르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물론 남들이 어쩌거나 말거나 열의에 불타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이때 제가 곁에 있었지요…….’
안대훈이었다.
‘그때는 오히려 너무 놀라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다시 보니 정말 기적과도 같은 과정이었구나…….’
감흥이 없었다고 하기엔 늘 그러하듯 소리도 지르고 감탄도 하고 했지만 하여간, 대훈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기에 지금 오히려 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딴 데 볼게.’
[네, 그게 좋겠습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서는 열정만이 아닌 광기도 느껴졌다.
그래서 수혁은 살짝 시선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환자 어머니에게 모유 수유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걸 왜 물었을까요?”
“어…….”
“모유는 분유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적습니다. 때문에 모유만 먹으면 적어도 생후 1세까지는 증상이 거의 없는 편입니다. 암모니아 등이 단백질의 분해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실 당연한 것이죠. 물론 증상이 아주 심한 형태의 장애라면 별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이 질문만으로도 감별 가능한 질환들이 꽤 있습니다.”
“아…….”
이제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게 의미가 없지 않겠나.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감을 못 잡고 있는데 질문해서 뭐하나.
괴롭히기 위한 질문밖에 되지 못할 텐데 수혁은 딱히 원한도 없는데 그럴 만큼 못된 인간은 아니었다.
물론 발표자에 대해서라면 좀 다르긴 할 터였다.
발표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수혁과 바루다의 생각이라 그랬다.
“아무튼, 환자는 모유 수유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분유 수유를 병행하려 했지만,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모유 수유로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장 곡선을 보면 1세까지는 정상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또래보다 큰 편이었습니다.”
“오.”
“경미한 장애를 동반하는 질환이라는 얘기가 되겠죠? 뭐, 여기서 저는 어느 정도 진단을 내렸습니다만…… 배경지식이 없다면 더 문진을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수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감탄했다가 탄식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수준인데, 안대훈에게는 여상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수혁에게 감동 감화된 알버트는 점점 더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미쳤다……. 내 평생 이런 강의를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볼 수는 있나?’
이런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다른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생각을 품게 된 가운데, 수혁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이는 딱 1세를 넘어가면서…… 그러니까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점점 또래에 비해 성장이 지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간비대도 시작이 되었을 거 같은데 안타깝게도 당시 진료했던 병원에서는 딱히 그러한 사실을 캐치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신경학적 발달은 정상이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의 식습관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비단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고단백 식이를 하지 않지 않나.
오히려 대부분의 에너지를 탄수화물을 통해 섭취하는 문화권인데, 이 때문에 노인에서 근육량 저하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대사 질환에서 비교적 경미한 손상을 야기하는 장점도 있었다.
“아……?”
“미국이었다면 아마 이 아이, 지능 장애에 더해 골절 및 탈모 등 대단히 심한 증상이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구토나 두통 더 나아가 혼수상태로 진행했을 수도 있죠. 만약 일부 지역에서 횡행하는 백신 거부 운동에 휩쓸려서 수두에라도 걸렸다면 사망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이 아이의 경우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예방 주사도 맞았고, 단백질도 꾸준히 저 단백 식이를 의도치 않게 한 셈입니다.”
“아…… 하긴. 저희는 고기를 많이 먹죠.”
“거의 고기만 먹지 않나요?”
“아니, 그건 또 아닌데…… 감자도 먹습니다.”
수혁은 누군가 억울하다는 투로 그러나 조금은 부끄럽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것을 무시하고는 원래 하려던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아이의 경우 덕분에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채, 그러나 상당히 심한 성장 장애로 대학 병원에 내원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병원에 의뢰가 되었죠. 자 여기서 한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꿀꺽
수혁의 말에 다들 마른침만 삼켰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는데 그걸 모르겠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느끼고 있는 건 이미 수혁의 화술에 홀려서 그것만 따라가고 있게 된 지 오래라 그랬다.
아무튼, 수혁은 뭔가 대단한 것을 풀어놓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백질 얘기를 계속하고 있죠? 이게 과연 간 기능과 연관이 되어 있는 걸까요? 아니겠죠. 단백질을 많이 먹으면 심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좀 덜한 양상을 보이는 질환군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질환은 단백질 대사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건 사실 배경지식 하나도 없이 그냥 문진만 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아.”
문진이 중요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만, 다른 진단 검사 장치들이 발전하면서 실제 임상에서의 문진은 무시된 지 오래되었다.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된 것인데…….
수혁은 달랐다.
그는 늘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히려 문진의 기술이나 의의에 대한 개선을 쭉 이루어 왔다.
“즉 아이는 단백질 대사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혈장 및 소변의 아미노산을 검사해 봐야 합니다.”
“아.”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한번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주로 어떤 아미노산들에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까?”
“어…….”
그렇게 툭 화두를 던진 후, 검사표도 같이 던졌다.
아주 복잡한 표였다.
사실 아미노산이라는 게 종류가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
알라닌, 아르기닌, 시트루린, 글루타민, 글라이신, 라이신, 오르티닌 등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 대부분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정상이 거의 없다, 이건데…….
‘뭐가 문제가 있냐고 하는 것으로 봐서…… 저것 중에 핵심이 되는 놈이 있다는 건데……?’
모든 의사들이 골치를 싸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