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87화 (1,087/1,303)

1087화 의전 (1)

팬 미팅이 아니, 강연이 끝나고 수혁은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래 봐야 오후 4시경쯤이었다.

수혁과 대훈으로서는 꽤 생경한 느낌이었다.

보통 한국 학회는 일러도 5시, 보통은 6시 이후에 끝나거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고3도 아닌데 뭔 공부를 그렇게까지 하겠나.

원래 한국인들처럼 학회마저 열과 성을 다해 오늘 하루 조져 놔야겠다 하는 사람들은 잘 없는 법이었다.

“어디 갈까.”

“원래는 소생이 생각해 둔 바가 있었습니다만…….”

“다만? 계획이 바뀌었어?”

수혁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한 채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뉴욕은 두 번째라고 해도, 관광을 제대로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던가.

그럼 뭐라도 좀…….

생각을 하고 오는 게 보통의 경우일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그야말로 논문과 임상 등을 빼면 살가죽밖에는 남을 게 없을 사람이다 보니, 딴 것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교수님…… 미슐랭 스타 맛집 말고는 검색해 보신 게 없으시군요. 심지어…… 서울에 있는 거 검색하고 오셨던데.’

안대훈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존경심을 애써 부여잡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래도 되는 사람 아닌가.

당장 오늘 보여 준 모습만 해도 그랬다.

스튜어드가 지금도 좌장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챙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관심은 수혁에게만 쏠려 있었다.

심지어 해당 병원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물론 나중에 들어온, 어쩐지 많이 화가 나 있는 듯 보였던 의사들은 스튜어드에게로 직행하긴 했지만…….

‘괜찮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기깔 나게 준비했을 거야.’

안대훈은 어제 받았던 전화를 떠올렸다.

수혁은 이미 뻗어 있었다.

시차 적응한다고 드러그 스토어에서 멜라토닌을 사 왔는데, 이게 한국에서 처방받아야 먹을 수 있는 용량의 두 배가 넘는 용량이어서 그랬다.

평소 같았으면 용량을 살폈겠지만 워낙에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분야인 데다가 멜라토닌이라는 건 딱히 과용한다고 해도 졸음 말고는 부작용이 없기에 먹은 게 화근이었다.

아니, 거기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위스키를 한잔 안대훈과 기울였던 것이 결정타였을 수도 있겠다.

-이수혁 도련…… 아니, 이수혁 부센터장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저희가 세 가지 안을 짜 봤는데…….

-세 가지 안을요?

-네. 볼거리 위주로 돌아다니는 거 하나랑. 아, 근데 이건 보통 그렇게 선호하진 않으시더라고요. 이미 다 다녀 보셔서. 하나는 공연과 전시회 위주로 다니는 것, 마지막으로는…… 뉴욕이 생각보다 먹거리가 많습니다.

-세 번째요.

-네?

-세 번째. 먹는 거로.

-어…… 먹을 걸 그렇게 좋아하세요?

-네. 정말 좋아하십니다. 아,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미식가시군요.

상대는 어떻게든 좋게 해석한 채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야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는데, 뉴욕으로 사장단 내지는 총수 일가가 올 때 의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에…… 이제야 태화 그룹 전체가 우리 교수님의 진가를 알아보는 건가.’

안대훈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스마트폰 그거 더 만들어서 뭐 하나.

다 있는데.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세상에서 제일 잘 살려 주는 수혁은…….

다분히 안대훈만의 시점이긴 했지만, 하여간, 그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멈춰 선 롤스로이스 차량을 보면서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 바뀌었네?”

수혁도 그랬다.

이미 이런 수준의 의전을 받아 본 경험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딱히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다.

미식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그랬다.

당장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빈말로도 고급 옷이라고는 할 수 없는 중저가 옷이 태반이지 않나.

“네. 왜 바꿨을까요?”

“렌터카가 원래 한 번에 오래 못 빌릴걸.”

“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여간, 두 사제는 아무 말이나 막 하면서 차량에 올랐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택시라도 타는 듯한 몸동작이었다.

‘확실히…… 아니, 왜 미래전략 3팀에서 아무도 모르는 거야?’

다들 호들갑이었다.

뉴욕 지부 전체가 덜컹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뉴욕 의전 팀장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밑바닥부터 천천히 올라온 그가 모르는 VIP는 없다고 여기고 있어서 그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니라고 하기는 좀 그랬는데, 김다현 회장과 의료원 태화 센터장 때문이었다.

혹 VIP인데 자기 때문에 소홀히 했다가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우리나라에서 재벌가 눈 밖에 나는 건…….’

설마하니 그런 작은 일로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긴 하지만.

하여간에 자신의 명줄을 담보로 시험하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니겠나.

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 싶어서 왔더니만 과연 귀티가 좔좔 흐르긴 했다.

단순히 생긴 것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

나름 이쪽에서 일하면서 재벌 판독기가 다 된 마당 아닌가.

‘보통…… 이런 차 타게 되면 아무리 타 봤다 해도 여기저기 눈길을 주기 마련인데…… 아니면 억지로 안 주려고 애를 쓰거나…….’

헌데 수혁은 전자와 후자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타더니, 오늘 어디 가냐고만 묻고 목적지를 듣자마자 거기 맛있냐고 하더니 그렇다고 하니까 하하- 하고 웃더니 밥 먹고 뭐 할지에 대한 대화를 같이 탄 심복과 나누고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은 수행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군……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표정은 노회했어. 아마도 무예를 꽤 익혔을 거야. 아니, 훈련까지 받았을까?’

딱 타자마자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장식품 같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숨겨져 있을 법한 곳만 바라보았다.

‘와…… 차 진짜 좋다…….’

그러더니 창마다 시선을 주었다.

이는 필시 밖에서 누군가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것일 터였다.

‘이거 타는 걸 어디서 찍었으면 이쁘게 나왔을까. 교수님 인생 샷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고 나서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는데, 이 대목에서 팀장은 소름이 돋았다.

밖에서 보고서 작성 목적으로 사진 찍고 있는 직원을 발견했음이 틀림없어서 그랬다.

‘아무튼…… 오늘은 편하겠네. 나도 좀 쉬어야지.’

그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혁의 말에는 아주 자연스레 대꾸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인재는 돈을 준다고 해서 데려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돈보다 더한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명예.

그러고 보니……

저 심복의 얼굴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부심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최고라는.

회장님 모시는 이들이 딱 저랬다.

‘적통은 아닐 텐데…… 숨겨 둔 자식이라 해도……. 하긴 능력이 장난 아니라고 했지?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력자라…… 경영 승계에 관여할 가능성은 없겠지만, 적어도 병원 측…… 아?’

주말 뉴욕 거리는 막힌다는 말을 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막힌다고 보면 되었다.

성수기 비수기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데다가 애초에 현지인들도 몰리는 곳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팀장은 상당히 느긋하게 뒤에 있는 둘을 관찰할 수 있었다.

‘김다현 회장이…… 그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었구만그래…….’

그 결과, 소름 돋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뒤에 타고 있는 사람이 차기 바이오 그룹 회장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래, 좀 부자연스러운 결정이지 않았나.

아무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해도 갑자기 그룹을 따로 분리해서 바이오 그룹의 회장을 둔다는 건…….

‘그 뒤에 배다른 자식이. 회장이 아마도 제일 이뻐하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면 아귀가 딱딱 맞아. 그래…… 이현종 원장의 자식은 아니라잖아?’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수혁이 이현종의 친아들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한 지 오래였다.

뭐 인적 사항을 조진 건 아니었고 다만 김다현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혹 실수가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그런 말을 왜 하나 했더니만, 이래서였다.

-지금 비번인 인원들, 전부 해당 식당으로 와. 셰프 신원 확실한지 다시 확인하고…… 쥐여 준 돈 두 배로 올려서 준다고 해. 오늘 쥐똥만 한 실수라도 있으면 다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해서 팀장은 잠시 선 틈을 이용해 문자를 보냈다.

그때까지도 수혁은 그저 한국에는 환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 하윤이 공부하다가 막히는 지점이 없는지도 물었는데, 답신이 왔다.

시차를 생각하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아, 네. 교수님. 오시면 바로 좀 교습해 주세요. 이번에도 어려울 거란 소문이 있어서…….

이제 내과 전문의 시험은 그냥 말도 안 되게 어렵게 내는 거로 자리 잡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뜬구름 잡는 소문은 아니었다.

태화 그룹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수혁을 스타로 만들고 있지 않나.

심지어 수혁 본인이 내재하고 있는 스타성도 있다 보니 더더욱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의대생 중 내과 지망생이 점점 늘어서 이제 더 이상 비인기과도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레지던트들도 어마어마한 기세로 공부를 해 대면서 대학 병원의 기둥이라는 말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건복지부는 어떤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민간에서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공적 기관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뭐 이런 부담이었다.

-아, 그럴 거야. 나 이번에도 시험 출제 위원으로 뽑혔더라. 돌아가면 너 좀 봐주고 아마 바로 들어갈 거 같아.

-아.

그 일환으로 벌어진 일이 바로 수혁 영입이었다.

-그리고 아빠도 간다는데.

-아…….

거기에 더해 이현종도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 그 나이쯤 되면 귀찮아서라도 고사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최대한 어렵게 내셔도 된다는 말에 이현종이 그만 희희낙락하면서 들어가게 되었다.

뒤늦게 그러한 로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학회 당사자들은 난리가 났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이현종, 이수혁 또라이 부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번에 시니어 교수님들이 많이 온대. 우창윤 교수님도 그렇고…… 조태진 교수님이면 어린 편이라고 하더라.

-하아…….

거기에 어린 교수한테 짬 때리듯 보내면 어떻게 될까.

그냥 뭐 죽으라는 문제만 나올 게 뻔했다.

이현종과 이수혁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교수들이 내는 문제 하나하나에 간섭하는 그림이 모두의 머릿속에 딱 그려졌다.

해서 부랴부랴 문제 출제 위원으로 자원하게 되었는데…….

이거 때문에 지금 보건복지부에서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져 버리게 되고야 말았다.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니까 저 엉덩이 무거운 교수들도 오는구나 하면서.

앞으로는 더더욱 노력해야겠다! 뭐 이런 말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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