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의전 (2)
“어떻게 입맛에는 좀 맞으시는지요.”
정작 식당에서 메인 접객에 나선 것은 팀장급이 아니라 뉴욕 지부장이었다.
말이 지부장이지 뉴욕이라는 도시의 상징성을 감안해 보면 차기 미국 지사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라도 쓰임새가 생기게 되면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가 커다란 자리 하나쯤 꿰차도 별말이 안 나올 만큼이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해 무엇 합니까.]
‘그러니까…… 가격 생각하면 떨려서 못 먹을 맛이지만…….’
물론 수혁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눈앞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여기 놓인 음식이 중요했다.
사실 이제 겨우 아뮤즈부시가 다 끝나고 첫 스프가 나왔을 따름이었다.
허나 이미 수혁의 뇌는 어느 정도 만족을 해 가고 있었다.
고작해야 핑거 푸드에 불과할 수 있는 아뮤즈부시마저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자랑했기에 그랬다.
숙련되어 보이는 직원의 설명 또한 좋았다.
당장 지금 스프에서 뭔 퓨레에 어떤 소스를 뿌려서 눈밭에서 뛰노는 추억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만 기억나기는 했지만…….
“아주 좋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하여간, 수혁은 그 덕에 진심이 담긴 답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진짜 이런 데 처음 오는 대학생 신입생이나 할 법한 그런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안을 두루 채우고 있는 인원들에게 수혁은 재벌집 막내아들 그 자체였다.
그렇다 보니 지부장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정 교육을 진짜 제대로 받은 모양인데…… 뭐? 보육원 출신……? 태화 정보부 새끼들은 월급을 어디로 받아먹고 있는 거야? 아니, 아니지…… 그놈들까지 속일 정도로 조작을 했다면 역시나 뒷배는 회장님이야. 그 양반…… 평생 아내 하나만 보고 살았다더니 알고 보니 이런 비밀이 있었구만그래.’
미친 사람 아닌가 싶겠지만 지부장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또 그런 게 아니었다.
‘보육원 출신이 어떻게 자기 본관을 알고 있겠어. 뭐…… 드물게 애 갖다 주면서 쪽지에 쓰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한산 이씨.
이씨는 흔한 성이지만 한산이씨만 놓고 보면 그렇게 흔한 성씨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태화의 일가가 바로 한산이가라는 점이었다.
‘그래, 회장님의 막내다…… 여기서 더 들쑤시는 건 위험해.’
어쩌면 벌써 보고가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건, 그저 상대가 착해서는 아닐 터였다.
그저 수없이 많은 나날 동안 충성을 다해 온 부하에게 넌지시 보내오는 제스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거대한 태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게 지부장의 생각이었다.
일가 사람들보다도 어찌 보면 더 태화에 충성하는 지부장이어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여기가 뉴욕에서 최근 가장 핫한 식당이기는 한데…… 입맛에 안 맞으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아, 아뇨. 이런 게 입맛에 안 맞으면 입맛을 고쳐야죠.”
“하하, 과찬입니다!”
수혁의 답에 이번에는 오늘의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하도 사람들이 나와서 인사를 드리라 해서 찌뿌둥한 얼굴로 나와 있던 셰프가 껄껄 웃었다.
재벌집 도련님이라고 해서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아주 괜찮은 놈이었다.
일단 음식 먹는 태도가 좋았다.
[수혁, 덥석 삼키지 말고. 최대한 제게 데이터 쌓을 기회를 주세요.]
‘너 어차피 시각적 자료 말고는 좀 약하잖아? 특히 미각은…… 너 그거 재현 가능했으면 인마 우리는 병원 밥도 미슐랭처럼 먹을 수 있었어.’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다른 종류의 데이터였으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아요. 최대한 기회를 주십쇼.]
‘알았어. 아…… 근데 그동안 식으면…….’
[누가 보면 한 시간씩 들여다보는 줄 알겠네.]
본래 하이 엔드 음식이라는 건 맛으로만 평하는 것이 아닌 법이었다.
우선 보는 즐거움을 충족해야 했다.
플레이팅을 대체 왜 하겠나.
당연하지만 무작정 알록달록하게 한다고 능사도 아니었다.
그날의 코스에 맞게 톤을 맞추어야 했고 또 식당의 인테리어와도 합이 맞아야 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꾸민답시고 쓴 재료가 맛을 해쳐서도 안 되었다.
‘나는 거기에 냄새와 씹을 때의 식감과 소리도 신경을 써서 만드는데…… 이 사람은…….’
솔직히 나이를 빼고, 음식을 대하는 태도만 본다면 미슐랭 감별사가 따로 없었다.
셰프는 분명히 봤다.
그가 음식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살피는 것을.
보통은 그러고 나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쉐프의 마음을 짜게 식게 하기 마련이지만, 수혁은 그러기는커녕 군침을 다시면서도 끈덕진 인내심을 발휘해 냄새부터 맡았다.
‘이런 곳에 보통 많이 와 본 솜씨가 아냐…… 아까 와인도…….’
테이스팅해 보라고 하면 진짜 그냥 한 모금 먹어 보고 대강 말하는 놈들이 태반이지 않나.
물론 이 식당은 뉴욕 아니라 세계 최고의 식당이라 자부하는 곳이니만큼, 와인 상태가 완벽하리란 보장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까 수혁이 보여 주었던 음미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삼킨 후 넘어오는 냄새와 입안에 남아 있는 잔향까지 모두 다 더해 평가했던 건, 진짜 노회한 소믈리에라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마지막까지 훌륭하네요.”
하여간, 셰프는 오늘 진짜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말 그대로 몸을 갈아 넣어 볼 참이었다.
그러면서도 힐끔 밖을 내다보았다.
저 진지하면서도 풍부한 경험을 지닌 미식가가 자신의 음식에 단 하나라도 실망하는 구석이 있으면 한동안 칼을 손에 쥐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랬다.
‘후후.’
그런 일은 없었다.
‘뒤졌다, 진짜.’
오히려 표정은 점점 더 풀어져만 가고 있었다.
취해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요. 확실히…… 세계의 중심은 다르군요.]
‘마지막에는 아빠 생각도 나더라. 아빠 왔으면 진짜 좋아했을 거 같아.’
[그렇죠. 이현종이 먹는 데 진짜 진심이니까. 이런 데 왔으면 기절했을 겁니다.]
아빠가 하는 말이 떠올랐다.
이런 식당에 올 때마다 이제 우리나라가 정말 잘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고.
식재료부터 해서 이만한 가격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선진국의 증거라고.
확실히 그런 거 같았다.
아무래도 미국이 아직까지는 한 수 위였으니.
“오늘 정말 좋군요!”
하여간, 수혁은 마지막까지도 셰프의 얼굴에 한 자락 미소를 남겨 준 후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지부장은 크나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음으로 어디로 모시지? 호텔? 아니면…….’
파인 다이닝이라는 건 말 그대로 파인 다이닝이다 보니 다 먹고 나면 배가 꽉 차기 마련이었다.
2차로 술 먹으러 가거나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말이었다.
뭐 가려면야 갈 수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면 다른 목적이 끼어들기 마련이었다.
-네? 저희 교수님이요? 유흥을…… 그런 무엄한 말을 하다니! 갈!
순수하게는 라이브 재즈 공연이 있겠고 그렇지 않다면 지저분한 곳이 있을 터였다.
놀랍게도 뉴욕에도 그런 업소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보니 살짝 떠올려 봤으나, 아까 화장실 가는 길에 안대훈에게 물었다가 두들겨 맞을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이 나이도 있고 지위도 있고…….
나름 그런데 가는 걸 꺼리는데 어렵게 얘기를 꺼낸 마당에 그렇게 당하니 기분이 상하기보다도 좀 황당했다.
‘그래…… 어떻게 봐도 그런 데 갈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바르게 자랐다는 말로도 표현이 어려웠다.
이건…….
그래, 좀 다르다.
-공부할 시간을 더 빼앗으려 하지 마시오!
아까 안대훈에게 들었던 지엄한 경고도 있지 않던가.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이미 동 나이대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교수라는데 오늘 같은 날도 공부를 한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또 그렇게 살았으니까 오늘날 저만한 성취를 하게 된 거 아니겠나?
해서 지부장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럼 교수님, 호텔로 모실까요?”
“네, 교수님. 쉬러 가시죠.”
거기에 안대훈도 가세하는 걸 보면서 안심했는데 놀랍게도 수혁의 얼굴이 좀 일그러졌다.
뭔가 크나큰 결례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방금 눈길이 저도 모르게 지팡이로 향한 거 같았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런 사소한 눈짓 하나에도 기분이 상할 수 있지 않겠나.
“병원 가야지.”
허나 수혁의 입에서 나온 건 너무 의외의 말이었다.
지부장만 아니라 안대훈으로서도 그랬다.
“네?”
수혁의 취미가 환자 보는 게 맞기는 했다.
허나 오늘은 이미 충분히 했다.
먹는 것도 잘 먹었고.
이제 가서 자야 할 거 같은데…….
“비행기에서 본 환자 잊었어? 그 사람 이제 검사 결과 떴을 거야.”
“아!”
허나 안대훈은 금세 반성해야만 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래서 그랬다.
자신들이야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 사람은 지금 거의 최악의 시간이지 않겠나.
출장 목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놀러 가다가, 그것도 큰마음 먹고 비즈니스석 끊고 가는데 갑자기 암을 진단받았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저 관광객들이었다면야 잊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진단을 내린 의사들이라면 이래선 안 되었다.
“뉴욕 센터로 가죠.”
“아…… 네.”
안대훈도 놀랐는데, 지부장은 어땠겠나.
‘이 사람은 그냥 사람이 훌륭하구나! 부끄럽도다…….’
이런 사람에게 유흥을 제시하려 했다니.
지부장은 한동안 벌게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수행하러 왔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벌 일가들을 모셔 오면서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그랬다.
사실 대개의 재벌 일가 사람들은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기본적인 매너도 있고 한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훌륭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부웅
덕분에 어딘지 모르게 엔진 소리도 더 가벼워진 느낌이 일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더니 환자와 센터장 등이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말이 환자지 아직 환자복을 입지는 않았다.
그냥 옷을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너무 환자 그 자체다 보니 딱히 외출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픈 기색이 완연한 사람을 뒤로하고 센터장이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행히…… 초기긴 한데…… 아직 약제 반응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검사가 남아 있습니다.’
‘뭐…… 예상은 했죠. 다행히 태화에서 여러 치료가 가능하니…… 우리 쪽에서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조태진 교수님 아시죠?’
‘알죠. 요새 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름 태화에서 밀어주고 있으니까요. 하여간, 날개를 다셔서…… 요새 진짜 열심이세요.’
‘네, 그럼…….’
‘설명은 제가 하죠.’
수혁은 그렇게 속삭임을 멈추고 환자에게 다가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암이라고.
“아.”
환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 있던 안대훈이 아니었다면 그냥 주저앉는 것으로 끝나진 않았을 터였다.
지부장은 좀 너무 차갑게 말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다 보니 수혁이 왜 저렇게 나오는지도 알 거 같았다.
“장거리 마라톤이 될 겁니다. 혼자 뛰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페이스메이커가 있고, 코치도 있습니다. 이제 백혈병은……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니에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환자분께서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놓지 않는 거, 그거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