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화 개인 과외 (3)
그 후로도 수혁은 몇 가지 주요 화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단순히 떠들었다고 하기 미안할 만큼이나 대단한 내용들이 터져 나왔더랬다.
하윤도 나중엔 시험공부할 생각을 버리고 순수 공부할 생각으로 듣게 되었을 정도로 그랬다.
“아, 시간이…….”
하여간, 그렇게 배우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수혁은 습관처럼 안대훈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 후였다.
[피곤하죠, 안대훈도.]
‘하긴, 걔도 사람이지.’
수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안대훈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하는 이해이긴 했다.
“으아아.”
“새꺄. 눈치 좋게 빠져야지. 지금 딱 둘만 있잖아, 병동에.”
“근데 저만큼 잘 모시겠습니까?”
“미친 소리를 하네?”
그는 끌려간 상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현태에게 그랬다.
“그…… 네?”
“조태진. 이거 네 탓도 있는 거 알지?”
“그…… 잘 모르겠습니다.”
“아후.”
거기엔 조태진도 끌려와 있었다.
손에는 환영 팻말이 들려 있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밥이라도 먹자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현종?
“왜 그러냐. 우리 수혁이는 의학과 결혼…… 아아. 야야. 귀…… 형 귀를 당겨?”
이 사람도 뭐 도긴개긴이었다.
지는 이기자 교수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아주 그냥 깨가 쏟아지는 주제에 수혁이는 의학?
엘리자베스도 아니고…….
이 망할 놈의 새끼라는 말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신현태는 욕을 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이시여…… 이 자리에서 수혁이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건 나뿐입니까?’
그는 그렇게 하늘을 보고 중얼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사이 참을 인 자를 이미 여러 번 그린 참이었기 때문에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이해를 바라진 않아…….”
물론 아까보다 차분해져 있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차분한 건 아니었다.
이를 꽉 깨물고 말하고 있었다.
신현태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보니 다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방금 귀를 잡혔던 바 있는 이현종이 그랬다.
“어어.”
“그냥 들어.”
“어.”
“수혁이 장가보내야지. 쟤가 그걸 원한다니까? 의학이랑 결혼이네 뭐네 하는 소리 하지 말고.”
“어…… 그래.”
“그러니까 잘 들어. 오늘 하윤이 보낸 거 나야. 다른 놈들도 보내긴 했는데 덕분에 잘됐지. 핑계가 되니까. 아무튼. 이건 내가 참 은밀하게 입수한 정보야.”
“뭐지.”
다 컸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늙은 아저씨들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맞대었다.
은밀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특히나 프락치 좋아하는 양반들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우창윤 교수한테서 들은 거라는데…….”
“뭐지. 약만 팔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귀 한 번 더 당겨 줘?”
“아, 아니.”
“이게 참. 어찌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은데. 나는 둘이 천생연분 같아.”
“너 이번에도 뜸 들이면 내가 당긴다.”
“하윤이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만남이 부딪치는 거래.”
“응?”
신현태는 원장이다.
아무리 대학 병원 원장이라는 존재가 돌아가면서 맡는 직책이라고 하지만 무수히 많은 교수 중에 그만한 영예를 얻게 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말의 존중을 표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었다.
더욱이 여기 모인 이들 중엔 이현종을 제외하면 다 신현태보다 연배도 어리지 않나?
허나 부딪친다는 얘기를 하자마자 다들 좀 눈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았다.
“뭔 소리를…….”
“그런 놈이 세상에 또 있습니까?”
“아무리 원장님이라 해도…….”
심지어 안대훈은 머리를 켰다 껐다 했다.
비상등 대신인데, 빨리 정정하라는 투로 말할 때 이랬다.
신현태는 그런 기이한 반응에도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자신도 딱 그랬으니까.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머리통 쥐어박다가 하마터면 가발을 벗길 뻔했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빗나가게 만들었는데 모른 척하고 집에 후다닥 와 버렸다.
아무리 아선 사람이라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데 넘었다, 이 말이었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세상에 그런 미친 사람이 하나 더 있을 줄이야?
“교차 검증을 해 봤는데 맞아. 확실히…… 우하윤은 늘 부딪치는 인연을 기다리고 있다.”
“오…….”
“그럼……?”
“그래도 한 번으로는 안 될 거 같아. 수혁이 봐서 알겠지만 한 번에 될 거 같진 않잖아.”
“그건 그렇지.”
“그건 맞지.”
“으읏.”
수혁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차마 직접 할 수 없던 안대훈을 제외하고는 다들 인정했다.
하여간, 그런 인원을 둘러보면서 신현태는 작전을 짰다.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지…… 한국인들은 숫자 3을 좋아하고. 그래서 세 번 부딪치게 만든다.”
“오…… 어떻게?”
“다 수가 있지.”
아니, 짜는 게 아니라 이미 짜 온 작전을 하달했다.
‘또…… 또 이러네.’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 하나가 머리에 손가락을 돌려 가면서 떠났다.
병원의 미래를 걱정하면서였는데 정작 그 장본인들은 그런 의심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 작전을 듣고 싶어 하는 시점에서 이미 맛탱이가 가 있어서 그랬다.
“오늘 저녁은 일단 저 둘이 먹는 거야. 그 전에 우연을 만든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모두 해산했다가 다시 모이자고. 성공하길.”
신현태는 아주 비장한 얼굴로 중얼거리곤 모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아빠. 안 그래도 찾았는데 어딨어요? 어? 아…… 그래요? 두 자리?”
“어어. 기자랑 가려고 진짜 끝내주는 식당 예약해 뒀는데 이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
“그거 네가 가라.”
“누구랑요?”
이현종은 답답했다.
이러니까 의학과 결혼하기 원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 아닌가?
하윤이랑 같이 있고 배가 고플 만한 시간인 데다가 딱히 하윤이도 뭔가 달리 할 만한 일이 없는 상황이라는 걸 신현태가 다 확인을 해 줬는데 저게 대체 무슨 반응이란 말인가.
‘아직 안 부딪쳐서 그래. 아직…….’
하지만 아까 들은 말이 있다 보니 성급히 화를 내는 대신에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 글쎄? 옆에 있는 아무나랑 가야 할 거 같은데? 대훈이랑 조태진 등등 다 안 돼.”
물론 이현종 기준에서 차분한 것이지 절대적으로는 아니었다.
다행한 것은 수혁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콜이지! 거기 엄청 유명한…… 지인 없으면 예약받지도 않는 곳이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비록 뉴욕에서 온갖 맛집을 섭렵하고 왔다지만, 원래 배는 꺼지고 나면 배고파지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지 않던가.
“하윤아, 저녁 먹을 수 있어?”
“어…… 네.”
마침 하윤도 오늘 수혁에게서 지식을 받아 내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둔 참이었다.
무엇보다 집에 어차피 아무도 없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금슬 좋은 중년 부부는 데이트를 나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놀랍게도 신현태가 캐치했는데, 결국, 둘은 원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갈게요.”
“아싸.”
“네?”
“아니, 싸게 잘 예약했다고.”
“아…….”
“그래, 다녀와라. 아쉽네. 거기 예약 진짜 어려운데…….”
하여간 이현종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또 전화기가 울렸다.
“어, 수혁아.”
신현태였다.
“잠깐 카페 올래? 줄 게 있는데.”
“아, 그래요? 음…… 네.”
절묘하게 식사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카페에 갈 시간이 있다, 이 말이었다.
“어, 하윤아.”
이쪽은 안대훈이었다.
“잠깐 카페 올래? 줄 게 있는데.”
“아, 그래요? 음…… 네.”
그렇게 둘은 비슷한 전화를 받고 지하 1층 카페로 향했다.
딱 가니 안대훈은 우측에 신현태는 좌측에 앉아 있었다.
“이따 봐.”
“네, 교수님.”
갔더니 뭔가 책을 한아름 주었다.
수혁에게는 최신 의학 동향에 관한 것들을, 하윤에게는 시험에 관한 것들을 주었다.
“이거 진짜 어렵게 구한 거니까…… 잘 챙겨.”
“네.”
둘은 정확히 같은 시간에 책을 들고 일어섰다.
“이건…….”
“어, 그거 입에 물어.”
컵은 입에 물고서였다.
그러니 앞이 제대로 보이겠나?
그렇게 수혁과 하윤은 정반대 편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 매복이 힘을 발휘했다.
툭티나지 않게 수혁과 하윤을 뒤에서 밀었다.
“어어.”
“아이고.”
그렇게 둘이 부딪쳤다.
책이 쏟아지고…….
“아이고, 미안합…… 어?”
“죄송합…… 어?”
서로의 책을 주워 주려던 둘의 손이 잠시 닿았다.
“어디서 저런 애들은 구했냐?”
그사이 매복해 있던 사내들은 사라졌다.
이현종은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신현태에게 물었고, 신현태는 후후 웃었다.
‘두바이 왕자한테 말해서 구했다는 말을 하면 너무 또라이 같아 보이겠지……?’
사막의 민족은 유구한 전통을 지닌 암살자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암살자라기보다는 경호원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지만, 하여간 그들이 어떤 일을 공작하는 데 있어서 최고 중 하나라는 사실엔 이견이 없을 터였다.
“뭐야. 병원 사람들인가? 그러기엔 발이 너무 빠른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
“하긴. 지금 손 닿았지?”
“어.”
“묘한데……?”
“그러니까.”
묘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이런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단은 거기서 끝이었다.
공교롭긴 하지만 둘은 원래 알던 사이였으니까.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서로가 서로를 뭔가 다르게 바라보기엔 이미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 미안.”
“아뇨, 제가.”
“일단 이거 두고…… 로비에서 볼까?”
“네네.”
해서 둘은 일단 서로 갈 길을 향해 떠났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다.
“어…….”
교수 연구실로 가려던 수혁은 엘리베이터 고장이라는 말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냥 딴 데 두려고 했으나, 어쩐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차에 두시죠. 오늘 안에 안 끝날 거 같으니.’라는 말을 들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기선 어떻게 부딪치게 해? 차로 쳐?”
“형…… 쟤 형 아들이야.”
“그럼?”
“잘 봐 봐.”
하윤은 이미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지던트 3년 차인 데다가 집도 좀 사는 편이다 보니 자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그래 봐야 둘이 주차 위치가 다르니 사실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상관이 있어졌다.
“야…… 미쳤어?”
“뭐.”
“아니…… 저거 저 차가 어제.”
이현종조차도 할 말을 잊었다.
수혁의 차가 박살이 나 있어서 그랬다.
그 앞에는 역시나 신현태가 고용한 사람이 있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 주차장에서 이걸 어떻게…… 차로 친 거 맞아요?”
“죄송합니다!”
“망치로…… 망치로 친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이수혁 교수님! 차를 망가뜨려서!”
그 사람은 연신 죄송하다고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상당히 떨어져 있던 하윤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교, 교수님. 일단 여기 실어 두세요. 무겁잖아요.”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