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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닥터-1092화 (1,092/1,303)

1092화 개인 과외 (4)

“아, 그럴까? 뒷자리에 둬?”

“네. 근데 잠시만요! 제가 이게.”

“어…… 어.”

수혁은 의외로 상당히 지저분한 뒷좌석을 보며 뒤로 물러섰다.

지저분하다고 해서 사람 곁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 있다는 얘긴 아니었다.

그저 으레 레지던트들이 그러하듯 갈아입은 옷가지 등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얼마나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반팔 티가 있네.’

[뭐…… 집이 코앞이라고 해도 왔다 갔다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1년 차 때 5월에 파카 입고 나왔다가 더워서 깜짝 놀랐다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건 좀 정신없는 경우 아닐까요?]

바루다는 약간 비난하는 투를 숨기지 못했지만, 워낙에 대학 병원 레지던트라는 존재들은 고생하는 이들이다 보니 수혁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수혁은 1년 차 때부터 이미 교수들의 어화둥둥 세례를 받은 데다가 원장 아들이라는, 당시로써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의해 특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진 않았지만.

꼭 직접 겪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옆에서 지켜만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네, 여기 두시면 돼요.”

“어, 그래.”

하여간, 하윤은 부리나케 움직여 대강의 옷가지들을 한편에 밀어 넣고는 수혁의 책을 놓게 했다.

“그나저나…….”

객관적으로 보면 아주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수혁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하기에 잠시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반파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비싼 차인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자가 벤츠로 해 준다고 할 때 부담된다고 국산 차로 해 달라고 한 점 같았다.

그래 봐야 공짜로 받은 차라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눈앞에서 벤츠가 박살 나 있으면 지금보다는 더 속이 상할 거 같았다.

“운전은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요. 어쩐대요?”

“알아서 한다는데…… 명함 받아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어…… 그래서 그냥 이렇게 보낸다고요? 차로 부순 거 같지도 않은데……?”

“거짓말할 이유가 있겠어?”

“어…….”

당연한 말인데,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차가 뭐가 되었건 간에 어마어마한 상실감에 빠지지 않겠나?

하지만 수혁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점이 하윤에게는 퍽 놀랍게 다가가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순수할 수가 있나……?’

샌님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하면 하윤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까.

단순한 교수 딸도 아니지 않나.

어머니 덕에 돈도 모자람 없이 살았다.

허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갈 때 같이 가야겠네.”

“아…… 네. 제가 운전할게요. 사실 식당 주차장에 두 명 가는데 차 두 대 대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

“네. 가시죠. 좀 이른 시간이긴 한데…… 어차피 뭐.”

하여간, 둘은 차량에 탑승했다.

좋기로만 따지면 하윤의 차량도 꽤 좋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현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까 한번 부딪쳤고 이제 같은 차를 타고 가서 분위기 진짜 좋은 식당에서 밥 먹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녹색불이 세게 켜졌다고 보면 되었다.

‘내 아들은…….’

하지만 수혁도 그럴까?

젊은 시절 이현종도 연애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젬병이었지만 저놈은 어째 더한 거 같았다.

이현종이야 이기자한테 꽂혀서 고백도 해 보지 않았나?

이미 한참 때가 늦은 때 해서 꽝이긴 했지만…….

만약 이기자가 하윤 정도의 호감도만 품고 있었더라면 30년은 일찍 결혼했을 터였다.

이기자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는데 이현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알아.”

신현태는 이현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방불케 할 만큼의 공작은 해 놨지만 부족하다는 데에 십분 동의했다.

우리 수혁이는 연애 바보니까.

“식당. 거기 내가 왜 예약을 해 놨겠어.”

“오…… 설마?”

“주차장에서 또 부딪친다.”

“호오. 그럼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행히 우하윤의 운전 습관은 진짜 안전 운전 그 자체야. 엄청 느려.”

“오오. 너 진짜…….”

“형. 나 진짜 노력한다. 와이프도 도와주고 있어. 좋은 사람 같은데 저렇게만 사는 게 안쓰럽다고 해서.”

신현태는 그렇게 말한 후, 차량에 탑승했다.

원래 몰고 다니던 차량이 아니라 문짝이 두 개 달린 스포츠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

“만전을 기해야지.”

“뭐…….”

이현종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신현태는 진지했다.

와이프 차량이지만 가끔 몰고 다니긴 하는지 나름 능숙하게 수동 기어를 넣고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유, 저저.”

“젊은 놈이 엄빠 돈으로 몰고 다니네.”

마침 하윤이 이제 막 자기 차에는 불필요한 예열을 마치고 나가려던 참이어서 휙 하고 추월할 수 있었다.

하윤과 수혁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었고 나름 둘 사이에 공감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야. 위험하게…… 거기서 박았으면 인마 산통 다 깨지는데.”

“이것도 계획이야. 형, 하윤이 별명이 뭔지 알아?”

“모르지.”

“젊꼰이야. 젊은 꼰대.”

“아…… 그럴 거 같긴 하다.”

“우리 수혁이도 그래. 그 앞에 이렇게 요란한 차가 지랄을 하면 뭐라고 하겠지?”

“허어.”

이현종은 여러모로 오늘의 신현태는 다르다고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굼벵이처럼 뒤따라오고 있는 하윤의 차가 보였다.

말이 따라오는 것이지 금세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저건 안전 운전이 아니라…… 그냥 액셀을 안 밟는 거 아냐?”

“뭐…… 이게 좀 빠르긴 해서. 성향이 워낙에 안전주의잖아. 그러니 내과를 왔지.”

“나는 모험심이 미쳤는데?”

“형은…… 형은 그래, 인정.”

덕분에 둘은 식당 근처에 도착하고서도 꽤 오래도록 기다려야만 했다.

날씨가 추워서 차 안에 들어가 있을까도 싶었지만 그러다 혹 중요 장면을 놓칠까 두려워서 밖에 나와 있었다.

“형, 이거.”

“오…….”

핫팩도 구비되어 있었으니 별걱정은 없었다.

끼이익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하윤의 차량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갈까?”

“네. 근데…….”

“나도 화장실 갔다가 가려고.”

“네, 저도.”

그러곤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장실로 향했다.

이현종의 의심 어린 시선이 신현태에게 꽂혔다.

“맞아. 아까 쟤들이 마신 커피에 이뇨제 살짝 탔지.”

“이 미친놈이?”

“소량인데 뭐.”

“그게 내과 의사가 할 소리냐?”

“신장내과 협진 보고한 거야.”

“아니, 이번 일에 대체 어디까지 연루가 되어 있는 거야?”

이뇨제라니?

심지어 처방은 신장내과가 했어?

말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했지만 솔직히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따라와.”

“어어.”

해서 이현종은 마치 애완견이라도 된 듯, 오늘따라 카리스마가 미쳐 날뛰는 신현태를 뒤따랐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둘 다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둘 사이를 가로막아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나타난 두 인영이 양측에서 하윤과 수혁을 툭 하고 밀었다.

동시에 가운데에서 둘을 가리고 있던 사람이 슥 하고 빠져나왔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무빙이었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들 병원 사람 아니다.

“너 뭐 국정원이라도 불렀냐?”

“비슷해.”

“아니…… 이 미친놈이…….”

“일단 보기나 해. 두 번째야, 이제.”

현대판 어쌔신들이 공작을 해 대고 있는데 수혁이나 하윤 같은 일반인이 뭐 어쩌겠나.

속절없이 부딪쳤다.

나름 좋은 곳이다 보니 손에는 다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원래는 세면대 있는 곳에 쓴 손수건 놓는 곳이 있기 마련인데 오늘만은 예외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

“어어.”

하여간, 둘 다 매너가 나름 좋은 편이다 보니 자기가 흘린 것보다는 남이 흘린 것을 주우려 했다.

그러다 보니 손이 좀 닿았다.

“어, 여기.”

“아, 네.”

“그…….”

“자, 자리로 갈까요?”

두 번이다.

남들 같았으면 오늘 참 재수 없는 날이네 싶겠지만 둘은 부딪침에 대해 특별히 여기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뭐지…… 운명인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자리로 가죠.]

그나마 수혁에게는 바루다라는 억제기가 있지만 하윤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네, 오늘……?’

그녀는 평생 품고 있었던 환상이 오늘 조금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마 상대가 수혁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확신을 가졌을 정도의 사건이지 않나?

‘흐음…….’

그렇게 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리로 향했다.

홀도 있는 식당이었는데 둘이 안내받은 곳은 룸이었다.

널찍한 데다가 바깥으로는 한강이 보이는, 말 그대로 데이트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너, 너무 좋은 곳 같은데요?”

안 그래도 좀 이상하다 여기고 있던 하윤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반면 수혁은 바루다 덕에 설레발을 최대한 늦출 수 있었다.

방금 바루다가 뺨 맞았던 사건을 촉각까지 동원해 상기시켜 준 덕에 늦췄다기보다는 조기에 사장해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어. 원래 아빠가 새어머니랑 오려고 했었대. 둘이 알콩달콩 장난 아니거든.”

“아…… 약간 우리 엄빠 같으시구나.”

“거기도 그러셔?”

“아, 네. 아빠가 가발 쓰고 있을 때만요. 아니면 좀 그런 감정이 들진 않나 봐요.”

“아…… 그렇구나.”

그런 수혁 덕에 둘은 쭈뼛대는 대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좋아. 수혁이 잘하는데? 긴장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왜 형이 긴장을 하고 그래. 손은 왜 떨어? 심장 만질 때도 안 그러면서.”

“긴장되지. 일찌감치 결혼한 놈은 몰라.”

“아무튼…… 다음은 식사 후야. 우리도 먹자고 일단.”

“왜 빨리 휘몰아치지 않고?”

“여기 음식 몰라? 먹으면 무조건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 있다고.”

“아, 하긴. 그렇지.”

그리고 이현종과 신현태는 옆 방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때아닌 횡재를 하게 된 조태진, 안대훈도 있었다.

“너네는 내가…… 정보를 많이 줘서 사 주는 거야.”

“각골난망 하겠습니다.”

“이상한…… 이상하게 정중한 말 쓰지 말고.”

“네. 명심하겠나이다.”

“말투…… 아니다.”

신현태로서는 잘해 주는 게 당연한 놈들이었다.

조카의 심복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놈들이지 않나.

특히 안대훈은 아마 수혁 대신 죽을 수 있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내어 줄 터였다.

“이번 요리는 부드럽게 찐 전복과 전복 내장 소스를 곁들였습니다. 위에 장미는 식용이니 같이 푹 찍어서 드시면 됩니다.”

“아, 네. 와…… 이게 무슨.”

“진짜 부드럽네요…….”

아무튼, 수혁과 하윤은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작정하고 로맨틱하게 꾸며 놓은 룸에서 마찬가지로 오늘의 코스 테마도 로맨틱이었다.

음악도 끈적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는 데다가 곁들임으로 먹으라고 나온 와인도 음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니 둘의 분위기도 지금까지 알아 온 이래 제일 좋았다.

과연 수백 단위가 깨진 작전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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