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화 과발모 (2)
우우웅
영화는 썩 괜찮았다.
색감도 좋고 이런저런 소품들도 좋고 무엇보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주는 그런 영화였다.
색이 너무 강한 감독이다 보니 기존의 이야기와 인물이 존재하는 시리즈에 편입되는 건 좀 위험할 수 있는 양반이지만, 이렇게 홀로 오롯이 만들어 내는 영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새로운 맛을 줄 수 있었다.
우우웅
첫 장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딱히 한 장면이라도 버릴 만한 장면 없이 쫀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 교수님. 전화 받으시죠.’
‘옆 사람 모르는 사람인데…….’
‘그래도. 아니, 그럼 끊든가.’
‘혹시 중요한 전화면 어쩌나.’
그 와중에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그나마 매너 모드라서 다행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웅거리는 것이 상당히 거슬렸다.
특히 우창윤에게 그랬다.
간만에 재미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이게 뭔가.
게다가 방금의 대화는 또 뭐고?
‘태화에서는 사람 열 받게 하는 대화법을 배우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름 가깝게 지내는 태화 인물이라고 하면 이현종, 신현태, 이수혁 정도가 있는데, 셋 다 사람 어지간히 열 받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신현태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럼 실례합니다.”
“아이.”
“죄송합니다.”
“거…… 아 왜 이렇게 몸은 커 또.”
“죄송합니다. 지나갑니다…….”
하여간, 신현태는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으음?’
‘왜요?’
‘아니…… 삼촌 목소리가 들린 거 같아서.’
‘신현태 원장님이요?’
‘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럼요. 원장단이 얼마나 바쁜데요. 저희 아버지도…… 기조 실장인데도 엄청 바빠요.’
소란에 고개를 잠시 돌려 보았던 수혁은 하윤과 짤막한 대화를 마치곤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신현태?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상영관에서 빠져나오자마자였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그럼에도 받기를 잘했단 생각이 드는 건 딱 봐도 정부 기관이라서 그랬다.
“네, 신현태입니다.”
“아, 원장님. 저 최우식 서기관입니다.”
“아아아아. 서기관님. 어쩐 일로?”
“전화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괜찮아.”
신현태는 손사래를 쳤다.
내일이 전문의 시험 결과 정식 발표날 아닌가.
헌데 오늘 밤에 하필이면 그쪽 서기관한테 전화가 왔다?
큰 거 온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안 괜찮은 건 그쪽 아닌가?’
정식으로 말이 나온 건 아니라지만, 최소 근신 처분은 받을 거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문제를…….
물론 신현태 본인도 가서 내고 오기는 했는데, 나중에 다 받아 보니까 완전 정신 나간 시험 아니었던가.
그나마 충북대 교수들 갈아서 열화판을 내고 또 충남대 교수들 갈아서 열화판 해설판도 내고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전국에서 곡소리 크게 한번 날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작년부터 예년 같았으면 안 떨어졌어도 됐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장수생화 되고 있지 않나.
군의관으로 간 친구들을 대상으로는 군에서 그냥 내과 의사인 셈 치고 쓰고 있다고도 들었다.
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편법 정도는 될 터였다.
“그렇군요. 예상하셨겠지만 결과가 나와서요.”
“네네. 듣고 있습니다.”
“우하윤…… 선생님.”
“네!”
하여간, 우하윤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씨름 경력이 있는 오컬트 광인 조태진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체격이 좋은 그 아니던가.
이현종과 있으면 훨씬 건장한 체격이다 보니 거의 두 배로 보일 지경인데, 그 체격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으니…….
가뜩이나 동굴 같은 형태를 띤 영화관 복도에서는 쾅쾅 울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뭐 하는 거야.’
혼자 남은 우창윤 교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남 눈치를 살피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도 아닌데 이러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쳤나…….”
“뭐야? 뒤에 확성기야?”
웅성대고 있었다.
“일행 아니에요? 가서 좀 뭐라고 해 봐요. 술 취한 거 같은데.”
급기야 옆에 있던 사람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하아.’
우창윤 교수는 하마터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라고 외칠 뻔했다.
물론 그렇게 외쳐 봤자 상황은 악화일로만 걷게 된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이젠 시비가 붙으면 상대적으로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더 잃을 게 많았다.
더더군다나 옆에 사람이 누군지는 자신도 모르지 않나?
“네, 네.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선을 넘은 건 신현태였다.
‘태화 새끼들…….’
대체 왜 하윤이는 태화에 가서 거기 교수랑 만나기 시작한 걸까?
거기보다는 아선에 훨씬 더 상식적인 애들이 많은데.
우창윤은 한숨을 푹 쉬며 밖으로 나갔다.
“아! 뜸 들이지 말고 좀 빨리 말씀해 주십쇼!”
“저, 저. 교수님. 좀 조용히. 안에 다 울려요.”
그러자 대뜸 소리치는 신현태를 곧장 발견할 수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말렸다.
“아아! 하하! 내가 흥분을.”
“그러니까 좀 조용히. 이러다 취객으로 몰려서 쫓겨나겠어. 대체 뭔 전화를 이렇게 받아요?”
그랬더니 신현태는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최우식. 최우식 서기관!”
“아? 아, 그럼!”
듣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최우식이라면 이번 시험 담당 서기관 아닌가.
물론 시험 문제 들고 간 날 바로 차관한테 까이고 뒷방에 갇혔지만…….
아무튼, 그가 하필 지금 전화를 했다는 건…….
“우리 딸! 우리 딸 점수! 등수!”
“아, 그러니까! 내가 물어보고 있다니까, 그러네!”
사실 모든 사람은 제정신이 아닐 때가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우창윤에게는 딸을 비롯한 가족이 엮일 때가 그때였다.
생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날 중엔 거의 소시오패스지만, 원래 그런 류의 사람들이 결혼과 육아를 통해 많이 나아진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창윤에게 더 가족이 보석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
“말씀하십쇼!”
“거기 어딘데…… 이렇게 소리를. 잠시만요. 아니, 등수가 아니라 점수까지 보려면 시간이 걸린다니까요.”
“등수부터 말하라고!”
“그럼 재미없잖아요.”
“이 사람이 진짜!”
“하하. 아 여깄다, 찾았습니다.”
해서 둘은 서로의 억제기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흥분제가 되어서 소리치고 있었다.
“저기, 저깁니다.”
“미친놈들인가? 나이도 많네?”
일단 급한 대로 직원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자초지종을 설명하거나 그 전에 사과부터 했을 텐데…….
잡히면 당장 못 들을 거란 생각에 둘은 일단 뛰었다.
“저, 저 새끼들 잡아!”
“뭐냐고!”
“아, 1등입니다. 이건 알고 계셨죠?”
“몰랐지!”
“아, 네네. 그리고 점수는…… 총 다 해서 8개 틀렸네요. 2등이 20개 넘어가니까…… 올해도 압도적입니다. 장관상 받으시겠어요. 3년 연속 수석 배출, 그것도 압도적…… TV 한번 타실 수도 있겠는데요? 원장님. 원장님? 왜 전화가…… 끊겼나?”
근데 뭐 둘이 뛰어 봐야 얼마나 잘 뛰겠나.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사람들이고 또 아까 밥도 먹은 데다가 와인도 살짝 곁들였다.
뭔가 좀 움직였다면 나았을 텐데 그러고 바로 영화관 들어와서 착석했으니…….
이제야 술기운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인근 소란죄로 처벌 대상입니다, 두 분.”
“그…… 할 말 없습니다.”
직원들에게 잡히는 과정에서 경찰도 왔다.
그렇지 않아도 근처에 유흥가가 딱 붙어 있다 보니 경찰에서 늘 예의 주시하는 곳이어서 그랬다.
그렇게 찾아온 경찰 앞에 두 점잖은 교수는 얌전히 섰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이거 그냥 넘어가고 싶어도…… 문자 신고가 열 건이 넘어요. 일단 서로 가겠습니다.”
“네? 아니, 서로 가는 건.”
“경찰서요? 소리 좀 질렀다고?”
“그냥 지른 게 아니라 영화관에서 지르지 않았습니까…… 마약 신고까지 들어왔어요.”
“아…….”
“거…….”
“참고로 지금부터는 도망가시면 더 이상 경범죄도 아닙니다?”
경찰은 둘이었다.
하나는 나이가 좀 있는, 다른 하나는 젊은.
주로 말을 이어 나가는 건 나이가 좀 있는 순경이었다.
옆에 선 젊은 순경은 둘이 혹 도망갈까 봐 살피고 있었다.
“아니, 도망은 안 가죠.”
“아까는 도망쳤다면서요.”
아닌 게 아니라 우창윤, 신현태가 서 있는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마지막 영화 상영관이 있는 곳이었는데, 하필 도망을 쳐도 여기로 쳤다.
“그…….”
“아무튼, 가십시다.”
“어…….”
“갑시다! 자꾸 이러면 업무 집행 방해죄 추가됩니다?”
“아, 네네. 가요, 갑니다.”
그렇게 둘은 수갑까지 차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경찰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당연히 머릿속에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뉴스 나오는 거 아닌가……?’
말이 오만 생각이지, 둘의 생각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사실 사정이 거의 비슷해서 그랬다.
뉴스 헤드라인이 둥둥 떠 있었다.
‘태화 의료원 원장 영화관 고성방가로 입건, 대한민국 의료계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나.’
‘아선 의료원 기조실장 알고 보니 대머리. 아니, 아니! 기조실장 소란죄로 입건. 아선 그룹의 도덕성 해이 논란…….’
신현태는 어쩐지 얼굴이 빨개진 우창윤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일단 가면…… 어,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긴요. 잘못한 건 한 거지. 아…… 내가 너무 흥분을 해서…….”
“내가 들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
“뭐요.”
“정수리 보이면 안 된다.”
“네?”
“아아. 우 교수 놀리는 건 아니고.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이현종 교수님스러운 말인데…….”
“어, 그 형 말이지.”
이현종.
불세출의 기인.
관계에 있어서는 개판이라는 평이 있지만 때론 놀라울 정도의 정치력을 보여 주지 않았나?
실제로 수액 감염 사건 때, 모든 공작을 역이용해서 태화의 이름값을 높인 것은 이현종이었다.
“일단 사과하지 맙시다.”
“잘못을 했는데요?”
“그건 맞는데…… 그래도 둘러대자고.”
“뭐라고요……?”
“그…… 우연히 안으로 들어갔다고.”
“표도 있는데 뭐가 우연이에요…….”
“아니면 착각?”
“진짜 약 한 줄 알지.”
“하씨. 어쩌지? 나 이거 딴 거보다 이현종 그 인간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할지가 너무 걱정되는데.”
우창윤은 그제야 좀 심각해졌다.
이현종이 알게 된다?
그럼 이건 평생 놀림감이다.
의사 집단 중에서도 미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당연히 태화에서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사람이 나오긴 할 터였다.
그렇다면 누가 될까.
이현종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신현태야?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뭔 위로야. 댁도 마찬가지지.”
“네? 저요? 전 별로 안 친한데요?”
“사돈. 사돈이잖아.”
“아. 아! 아, 시발.”
“두 분 조용히 하세요. 진짜 수갑 채웁니다?”
이제 둘 다 조용해졌다.
수갑 때문인지 이현종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