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화 진짜 발전한다 (3)
이기자 교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중이었다.
“그럼 이게 정말……. 뭘 못 먹었나? 아니면 대사의 문제……? 그렇다고 하기엔 생김새에 큰 이상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소견은 뭔가 하나라도 두드러지는 게 없었다.
학대를 의심하기엔 성장 외에 다른 소견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다시 말해 크고 작은, 특히 반복적인 신체 상해로 인한 상처 따위가 전혀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때리지 않는다고 해서 학대가 없었다고 단언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학대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까.
‘아냐, 아닌데.’
허나 이기자 교수는 평소 아이의 모습을 아주 잘 안다고까지 하기는 뭣해도 알긴 알았다.
교회에서 오며 가며 마주쳤던 아이의 모습은 밝디밝았다.
옷도 깨끗하게 잘 입었고.
우선 표정에 구김살이라곤 없었다.
부모와의 유대도 아주 좋아 보였다.
“대사일까?”
해서 생각을 정리한 이기자 교수가 수혁을 돌아보았다.
“그럴 가능성이 있죠. 효소 결핍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뭐……. 단언은 어렵죠.”
“그렇긴 한데…….”
“혹시 아이 영상 같은 게 있나요? 평상시 활동하는 모습이 잘 담긴 영상이면 좋겠는데.”
“아. 그건……. 잠깐만.”
이기자 교수는 간호사에게 물어 환자 보호자의 번호를 알아냈다.
그러곤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연하다고 하면 좀 뭣하겠지만 금세 영상이 왔다.
아이 진단에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단 말을 했는데 미적거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나.
오히려 당장 와야겠다는 걸 면회 시간이 아니니 오지 말라고 말리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아무튼, 수혁을 비롯한 일행은 곧 아이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 속 아이는 어린이집인지 놀이 학굔지 모르겠는 공간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있었다.
‘음.’
‘으으음.’
김성진, 안대훈은 아이를 길러 본 적도 없고 또 소아의 발달 과정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었다.
하윤?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기자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주로 미숙아를 보긴 하지만 레지던트 시절 혹독하게 배운 지식이 어디 가겠나.
원래 돌에 새긴 지식은 세월이 지나도 잘 흩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좀 느리네.”
“네. 아이가 작아서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보면 손가락 움직임 같은 것들이 확실히 아이 나이에 비해서 느려요.”
“그래, 그래 보여. 대략…….”
“평균적인 발달에 1년 정도 못 미칩니다. 그에 비해서 말은 그냥 평균이에요. 다른 아이들과 딱히 소통이 안 되는 거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흐음……. 그럼 운동 기능이 좀 떨어져 있다는 건데…….”
수혁은 이기자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이를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드문 질환이긴 한데…….’
수혁처럼 예외적인 질환을 많이 보는 사람에게 지나칠 정도로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정말로 드문 질환이라는 얘기였다.
탐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흥미로운 케이스가 될 수 있겠지만 임상에서는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하필 그 드문 질환이 지금 딱 눈앞에 나타날 확률은 극히 적었으니.
[하지만 수혁. 아이 증상을 다 종합해 봤을 때……. 그 질환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조차 비정형적인 소견이잖아?’
[문제긴 하죠. 추론만으로 진단이 가능한 영역은 아닙니다. 검사를 더 해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 검사가…….’
[침습적이죠. 아이는……. 음.]
바루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혁의 시선을 따라 바루다 또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망막에 비친 아이는 벤틸레이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침습적인 검사라……
고민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하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원래 진단은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후에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돌아오는 법이니.
“일단 아이에게 있는 문제를 종합해 보면……. 성장 지연과 운동 기능 장애, 간비 종대, 만성적인 영양실조가 있네요, 그죠?”
“아, 그렇네.”
“네, 교수님.”
생각도 정리할 겸, 자신이 도달해 있는 추론의 지점에 다른 이들도 끌고 올 겸 해서 수혁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각각의 소견을 따로 떼 놓고 보면 비정형적인 소견입니다. 딱히 어떤 질환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려워요.”
“그렇지.”
“네, 교수님. 확실히…….”
수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나머지 인원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심지어 바루다를 탑재한 자신조차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이니까.
광오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지금의 수혁에게 있어 이런 상황은 이제 드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엄청 어렵게 느껴지겠는데. 내가 이럴 정도면.’
[건방지긴 한데, 아마 그럴 겁니다.]
수혁은 바루다와 함께 자신의 우수성을 확인하면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해서 반복되는 폐렴 소견이 있죠. 영상을 보면……. 여기 지난 폐렴으로 인한 흉터로 생각될 수 있는 병변이 있습니다. 실제로 판독도 그렇게 나간 거 같은데…….”
“아, 응. 우리가 준 정보가 그러니까 그렇게 줬을 거야. 그나마 CT를 찍었으니까 망정이지 X-ray에서는 보이지도 않아.”
“그럴 거 같아요. 아주 작고 미세한 변화니까요. 자, 이걸 폐렴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폐렴의 원인으로 가져와 보죠.”
“원인으로……?”
“간질성 패턴이 보인다고 생각해 보는 거죠.”
“폐의 간질성 패턴이라……?”
이기자 교수의 얼굴이 이제 알 듯 말 듯 하게 변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치열하게 쌓아 올린 경험과 지식이 그녀의 뇌를 간지럽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 저런 표정을 짓게 된다는 것을 이제 수혁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됐고. 나머지는……?’
[아직 멀었죠. 아니, 여기는 다 말해 줘도 모를 겁니다. 이걸 소아과 전문의가 아닌 상황에서 알 거라고 기대하는 게 문제예요.]
‘그렇다면 검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추론하고 의심하는 건?’
[그건 가능하겠죠. 저인망 어선처럼 긁는 식의 검사가 되겠지만, 다행히 태화 정도 되는 대형 병원이라면 그런 식의 검사가 어려운 건 아닙니다.]
‘좋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거 같아.’
김성진?
간절한 얼굴이다.
안대훈은 숫제 아이의 골반 쪽을 보고 있었다.
골수 검사라도 하고 싶다는 뜻일 터였다.
하윤은 아직 멍한 얼굴이었지만, 괜찮았다.
연차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지 않겠나.
타고난 재능에 따라 갈리는 것보다는 교육의 결과로 갈리는 것이 교수가 볼 때는 훨씬 희망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질환군은 역시 선천성질환 중에서도 대사 질환에 속할 겁니다.”
“대사 질환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류일지는 아직 모르겠지?”
“의심되는 질환이 있긴 합니다.”
“있어? 있다고?”
수혁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그쯤 어딘가에 범인이 있겠다 하고 있던 이기자 교수가 크게 놀랐다.
이제 본인도 여기까지 추적해 왔다손 쳐도 수혁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참 더 걸렸을 것이 뻔하지 않나.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커다란 도움이었다.
헌데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 있다고?
‘이게 말이 한 발자국이지……. 이제부터는 검사가 필요한 영역일 텐데……?’
사람의 힘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인데 거기에?
-우리 아들은 진짜 천재라니까.
이현종이 말버릇처럼 하는 말이 다시금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천재라고 대충 퉁 칠 만한 사안인가……?’
만약 지금부터 수혁이 하는 말이 맞다면, 지금도 물론 수혁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지만, 그보다 더 높여야 할 터였다.
‘나 퇴임식 겸 학회 할 때……. 수혁이를 부를까……?’
듣자니 아직까지 다른 과 학회에 가서 강의한 적은 없는 듯하지 않던가.
그 첫 번째를 소아과에서 그것도 자신이 끌어 줄 수 있다면 새어머니 된 입장에서 꽤 보람이 있을 거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했을 때 특혜니 뭐니 하면서 욕먹을 일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네. 니만-픽병의 임상 소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복부팽만, 간비 종대, 운동 기능 실조, 성장 지연이죠. 물론 다른 이상도 주로 동반되기는 하지만……. 이 질환의 원인이 되는 스핑고미엘린 포스포디에스테라아제-1(SMPD1)의 변이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저항 능력이 다 달라서 임상 소견이 아주 다양합니다.”
“니만-픽병……. 국내에서는 극히 드문 질환인데. 그게 맞다면 아이는 B형이겠지?”
“네. A형이면 이미 사망했거나 이번 입원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크죠. 아이 상태를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B형 중에서도 저항 능력이 아주 강한 아이로 보여요.”
“예후가 좋은 니만-픽병 B형일 가능성이 있다?”
“네. 뭐……. 아닐 수도 있고요. 증상이 비정형적이다 보니. 근데 다른 질환에서는 이 증상들을 모두 보이면서 동시에 다른 증상에 대해서는 음성일 가능성이 더 드물어요.”
이기자 교수는 수혁의 담담히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면서 머리통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가 싶어졌다.
뭔가 선천성질환 표가 머리 안에 있고 증상을 넣으면 하나하나 떠오르는 느낌이지 않나.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빨리, 이렇게 정확하게 추론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수혁이 읽어 낼 수 있었다면 소름이 돋았을 터였다.
실제로 지금 그런 식으로 질환군을 거르고 있었으니.
“문제는 니먼-픽병의 확진을 위해서는 골수 생검과 간 생검이 필요하다는 건데…….”
수혁은 경악에 찬 이기자 교수를, 딱히 그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이기자 교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이기자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가 아직은 그런 걸 견딜 수 있는 상태는 아닌데……. 하려면 적어도 48시간은 기다려야 해. 상태에 비해 예민하게 보고 있는 건 맞아. 아까 이 교수 말대로……. 간질성 변화가 있어서 보는 건데, 그렇다 해도 지금 폐렴이 아주 가벼운 건 결코 아니거든.”
“그렇겠죠? 그렇다면……. 먼저 유전자 검사를 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아니라면 수가 삭감이겠지만 제 생각에는 거의 맞을 거예요.”
“삭감? 아, 그거야 뭐……. 안 되면 내 돈으로 막든지 하지, 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인데. 게다가 이 교수 추론이 괜히 나왔겠나.”
그러곤 유전자 검사부터 하기로 했다.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는데, 그래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뽑혀 나가는 피를 보다가 수혁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 우리 김성진 선생님이나 대훈이, 하윤이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예상대로 다들 약간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1년 더 배우게 된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수혁처럼 할 수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아서였다.
“그냥 검사가 필요하다. 이 생각까지만 오면 돼. 어차피 확진은 검사 결과를 보고 내려도 되는 거잖아? 그 전에 내리는 건…….”
여기서 더 뭐라고 해야 할까.
‘천재만 가능하지?’
[생각이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