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화 진짜 발전한다 (4)
바루다 덕에 수혁은 나름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이걸 공부해서 그래. 우연이지.”
물론 표정과는 딱히 매칭이 되질 않았기 때문에, 또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수혁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우연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재 운운하는 것보다는 절망감이 덜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김성진과 안대훈은 그렇지 않아도 이거 검사를…….
그중에서도 증후군에 관련한 검사를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수혁이 검사 운운하기 전에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안도하고 있었다.
“아무튼……. 니먼-픽 병의 예후는 사실 별로 좋지 않아. 다행히 아이는 저항성이 좋지만……. 앞 뼈 통증이나 폐 질환……. 무엇보다 간 질환에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해. 선천성질환이지만 대사 질환의 일종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합병증이 심해지거든.”
“성인을 넘길 수 있을까?”
대강 이 질환에 대해 알고 있는 이기자 교수의 말에 수혁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모습만 보면 성인 아니라 정상 수명까지도 살 수 있을 거 같아 보였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태학적인 이상이 있진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당장 떠올릴 수 있는 합병증만 해도 간부전, 호흡부전, 치매, 발작, 신경 변성……으로 인한 조현병, 출혈 성향 같은 게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최근 들어 유전 질환에 대한 치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는 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끄는 것일 겁니다.]
‘하긴, 그렇지.’
이럴 때면 연구에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바루다는 애초에 연구 목적이 아니라 임상 진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A.I.이지 않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수혁의 성향에 있었다.
그는 케이스 추론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었다.
연구 쪽에서도 뭐 당연히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기는 하겠지만…….
그게 임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해 봐야죠. 다행히 지금까지는……. 이게 니먼-픽 질환이 맞다면 임상 지연이 확연하게 관찰이 됩니다. 이런 경우엔 성인을 넘기는 경우도 있죠. 30살도 넘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30살이라.”
이기자 교수는 본인이 살아온 세월을 떠올렸다.
6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30년은 턱없이 짧다.
하지만…….
‘세상엔 그보다 짧은 삶도 많지…….’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와 이런 죽음에 무너지기엔 너무 많은 죽음을 목도해 온 삶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엔 희망도 있었다.
지난 20년 전까지 이루어졌던 의학 발전보다 최근 20년이 훨씬 더 가파르지 않나.
앞으로?
더 가팔라지면 가팔라졌지 이 기울기가 줄어드는 일은 없을 터였다.
‘어쩌면 이 아이 생전에 치료법이 나올는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기자 교수는 처방을 내렸다.
그러곤 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결과 나오면 알려 줄게.”
“네.”
“아, 그리고.”
수혁은 늘 그러하듯 병실을 빠져나가려 했고, 그 전에 이기자 교수가 불렀다.
환자가 또 있나 싶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곳이지 않나.
세상 모든 비극이 존재하는 곳이 대학 병원일진대, 그중에서도 이곳 소아 중환자실은 그 비극들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네?”
“주말에 한번 오라고. 맨날 아빠랑만 보지 말고.”
“아, 네. 그…… 엄마.”
“그래, 그래.”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수혁은 당황한 얼굴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김성진이나 안대훈에게 있어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교수님……. 확실히 이럴 때 좀 약하구나.’
하윤이 볼 때야 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약간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실제로 최근 데이트인지 뭔지 모를 일련의 일들을 같이하면서, 보다 호감이 들기도 했더랬다.
아마 수혁이 교수가 아니라 펠로우 정도만 되었어도 진전이 더 빨랐을 텐데 교수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감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둘 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수혁은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눈치가 좀 없는 편이었다.
“아, 하윤아.”
“네?”
“한 번 더 돌릴까? 아직도 환자 안 오는 거 같은데.”
“아……. 네. 그래야죠!”
지금도 그렇지 않나?
‘교수님…….’
안대훈은 자신도 뻔히 알 것 같은 뭔가 알콩달콩한 분위기 속에서 저딴 얘기나 꺼내고 있는 교수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불충한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회개했다.
‘아니, 아니지! 인간이 아니지 않나!’
인간이 아닌데 어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수혁의 입장에서 보면 저러한 것이 당연한 것일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띠리리리
그사이에 하윤이 꺼낸 돌림판이 돌아가며 인위적인, 평화로운 BGM을 흘렸다.
지나던 사람들이 이게 뭔 소린가 해서 주변을 돌아보는 가운데 돌림판이 멎었다.
일반외과 외래
그리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실제 아나운서가 녹음을 해 줘서 그런가 딱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물렁하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넌 정말 대단하다.”
들을 때마다 감동이 있달까?
하윤은 수혁의 진심 어린 칭찬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외래 쪽으로 향했다.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서였다.
“말은 외과 외래긴 한데……. 외래가 다 붙어 있으니까요. 대기 환자 중에 찾아보는 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넣어 보았습니다.”
“좋지. 외래……. 입원 환자나 응급실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지.”
수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리나케 하윤의 뒤를 쫓으면서였다.
김성진은 이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안대훈은 앞에 살짝 떨어져 있던 소독약인지 모를 자국을 지웠다.
VVIP도 감히 상상도 못 해 봤을 만큼 대단한 의전을 받아가면서, 수혁은 외래로 향했다.
“김기웅 환자분!”
“네에! 아유, 기다리다 아주 그냥 늙어 돌아가시는 줄 알었네.”
“여보. 여기서 그런 농담이 적절해?”
“미안미안.”
대학 병원 외래란 곳은 언제나 밀리는 법이었다.
애초에 3분, 5분마다 환자를 예약받는 게 잘못이었다.
감기를 포함하는 간단한 환자라면 모를까…….
대학 병원 외래에 오는 환자들을 고작 그만한 시간에 보는 건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니까.
설령 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 해도 보통은 그게 잘 안 되었다.
오는 환자들도 고작 5분 만에 돌아간다는 게 납득이 안 되니.
“여전하구나.”
“그렇죠, 여긴.”
그렇다 보니 20, 30분 늦어지는 건 예사였다.
2시간 넘게 지연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 보니 11시가 가까워진 이 시각, 외래는 가장 붐볐다.
대기 의자가 꽉 찬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으로도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수혁은 벽에 기대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김성진, 안대훈, 우하윤도 마찬가지였다.
매의 눈으로 외래 환자들을 살피고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화, 환자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곤 어떤 여자 환자가 나왔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표정만은 다들 익숙한 그런 표정이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이 뒤섞인 얼굴.
“수술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면.”
환자는 그런 얼굴을 한 채 당황한 얼굴의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았다.
‘수술이 의미가 없는 상황인가 본데…….’
[그럴 겁니다. 아직 암이라면 그럴 수 있죠.]
말기 암에서 수술은 의미가 없다는 말.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 않겠나.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조직 검사 목적으로라도…… 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분.”
“영상만 봐도 확실하다고, 그랬어요. 그 병원에서……. 교수님도 보니까 그래 보인다고 했잖아요.”
사람은 쉽사리 희망을 버리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수혁은 환자의 휴대폰에 달린 키링, 보다 정확히는 키링에 부착된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저 환자는 다른 의견을 구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라고.
허나 현대 의학에서, 또 대한민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전문의를 딴 사람들끼리 어마어마한 실력 차이가 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상을 이용한 진단 부분에서는 그러했다.
‘에휴.’
[안타깝군요.]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곳을 지나쳐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안됐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건 수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라서 그랬다.
[그래도 영상이나 한번 보죠.]
‘이 분위기에서 들어가자고?’
[아니, 밖에서 틈으로. 지금 보이잖아요.]
‘아. 근데 컷만 보일 텐데?’
[보시죠.]
수혁의 뜻 아니, 바루다의 뜻마저 읽어 낸 안대훈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담당 의사는 환자와 실랑이 중이었기에 안에는 직원뿐이었다.
“어? 누구세요?”
“잠시.”
“네?”
그리고 안대훈은 직원 정도 선에서 뭐라 할 만한 인상의 소유자가 아니다.
번뜩이는 머리통과 광기 어린 눈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까지 어느 것 하나 서로 어울리는 것 없이 붙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드르륵
게다가 안대훈이 와서 뭔가 이상한 걸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우스 스크롤만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으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미친.’
[역시 안대훈이다, 이 말입니다.]
덕분에 수혁은 환자의 영상을 슥 볼 수 있었다.
‘흐음.’
[으으음.]
처음엔 의사와 의견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복막에 파종성 종양이 마구 번져 있었다.
보아하니 자궁 절제술이 이미 시행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CT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것이 암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환자는 이제 곧 사망할 터였다.
‘이상한데…….’
[이상하죠? 나이가 젊긴 합니다만…….]
‘복막에 저렇게 전이가 많이 있는 상황에……. 심지어 골반에도 종양들이 있어.’
[대체 뭔 암이 저렇게 공격적일까요?]
‘그래서 조직 검사라도 해 보자고 하는 거 같은데…….’
[환자는 그러느니 그냥 얌전히 죽겠다, 이런 얘기로군요.]
수혁은 여전히 문가 근처에 서 있었다.
가운 입은 사람이, 그것도 원내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의사가 뭐라 하겠나.
심지어 외과에서 수혁은 일종의 부적이나 우상 단지화되어 있었다.
장준혁도 장준혁이지만 김승규부터가 그렇게 취급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 하시는 거지.’
때문에 의사는 뭐라 말은 못 하고, 환자의 눈치를 보면서 잘 달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일단은 앉아서 차분히 얘기해 봅시다. 아이 생각도 하셔야죠.”
“복막 전이면 치료될 가능성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달래기 위함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쩔쩔매고 있는 가운데, 수혁이 나섰다.
“잠깐. 살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면 받으시겠죠?”
뭔가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의사라면 하면 안 될 거 같은 말을 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