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34화 (1,134/1,303)

1134화 우리도 와 줘야지 (1)

춘계 학회는 말마따나 봄의 중간 즈음에 열리기 마련이었다.

간혹 성질 급한 유관 학회들이 3월에 열기도 하지만, 대개는 4월 중순 또는 그 이후에나 열렸다.

외과 학회 또한 그래서 4월 중순에 예정이 되어 있었다.

이제 3월 중순이니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만약 수혁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별로 없었을 터였다.

원래 학회 초록 접수는 늦어도 2월 초에 끝나니까.

물론 초록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발표 자료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초록 내용과 완전히 다른 발표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네? 벌써요?”

학회 비서는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뭘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옆에서 다 지켜보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병원 교수라는 사람들도 발표에 얼마나 부담을 갖는지 알고 있었다.

헌데 이 이수혁이라는 사람은 어제 학회 발표를 부탁받은 주제에 오늘 자료를 보내왔다.

-네, 간단한 강의라서요.

간단……?

비서는 자기도 모르게 학술 이사가 있는 방 쪽을 돌아보았다.

학회 전에만 파견되어 오느라 급히 만든 자리다 보니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해서 고개만 돌려도 보였다.

‘어제…… 우리 이사님이 부탁한 강의가 간단한 건가……?’

암과 혼동될 수 있는 케이스에 대한 강의와 더불어 수술 시 육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강의를 부탁했다.

전자는…….

그래, 백번 양보해서 상대가 똑똑한 내과 의사니 가능하겠다고 쳐도 후자는…….

그걸 왜 내과 의사가 해야 하고 또 가능하기는 한 건지가 의문이었다.

“아…… 네. 확인…… 확인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그리고 강의 시간은, 제가 휴가를 못 쓰고 갈 거 같아서 연구 시간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두 시간가량 학회장에서 체류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2시간이면 좋죠.”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일은 학회 교수님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해서 학회 비서는 그냥 그런 갑다 하면서 다른 교수들에게 자료를 포워딩했다.

그러곤 미국 어디로 가서 태권도 사범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생에 있어 워낙 중요한 고민이다 보니 수혁에 대해 잊는 건 순간이었다.

“좋아. 이건 됐고.”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외과 학회야 곁가지이지 않겠나.

아예 계열이 다른 학회에서 부른 것이다 보니 기분은 좋았지만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갖지 않았다.

“됐어? 그럼 빨리 가자. 기자가 또 찾아.”

의미가 아주 크게 있는 일이라 해도 시간을 들여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터였다.

수혁은 말 그대로 부산을 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뒤로는 이번에 그에게 배정된 인원들, 곧 김인수, 장종우, 이태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런데, 얼굴이 다들 죽어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현종의 교습은…….

워낙에 빡세기로 유명하니까.

“엄마, 이제 은퇴 아니에요?”

아무튼, 수혁은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순전히 궁금해서였고, 이현종도 오해하거나 하진 않았다.

머리 돌아가는 구조 자체가 그런 쪽으로 생겨 먹질 않은 데다가 둘의 사이가 오해하고 자시고 할 만큼 어설프지 않아서였다.

“어, 그렇지. 근데 뭐…… 기자도 나처럼 사실상 거기 자기가 만든 거나 다름없잖아. 애착이 있을 수밖에 없지. 어쩌면 미숙아 센터에 더 있을 수도 있어.”

“어, 정말요? 석좌로?”

“아…… 아니. 이 개새끼들.”

수혁도 마찬가지다 보니 이현종이 갑자기 욕을 해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머지 인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현종이 이상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그럴 때마다 놀라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왜요. 위에서 안 된대요?”

“어, 안 된대. 그럴 만한 학문적 성취가 없대. 미쳤나 봐. 미숙아…… 우리나라 아예 불모지였다가 이젠 아시아 기록도 세우고 있는데…….”

“거참, 이상하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수혁은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이현종을 보면서 속으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삼촌 석좌 교수 여부 거론될 때는 앞에서 비웃으셨으면서…….’

NEJM에 제1 저자로 논문 하나 못 넣은 놈이 무슨 석좌냐고 했더랬다.

따지고 보면 이번 코비드 사태 동안 란셋에만 서너 개를 넣은 데다가 네이처지에도 간이 섹션이긴 하지만 넣은 사람이 바로 신현태라는 걸 감안하면 지나친 비난이었다.

그걸 아는 신현태 또한 난리를 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위에서 중시하고 있는 건 김승규, 이현종의 위신이었기에 그랬다.

적어도 둘의 위명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람만이 석좌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기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처사일 수도 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의학은 미친 듯이 발전하고 있었고, 이젠 그 둘처럼 입지전적인 업적을 남기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마! 난 인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한 거니까 더 대단하지!

이현종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때문에 항간에서는 차기 석좌는 이수혁뿐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30년도 더 남았다는 얘기니만큼 진심이라기보다는 반쯤 위쪽을 비꼬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가서 기자한테 석좌니 뭐니 하면 안 돼. 계약직으로 일하게 생겼어…… 본인은 별생각 없는 거 같은데, 나 원.”

“계약이요? 촉탁의, 설마?”

“어, 그렇지.”

“와…… 우리 병원 의리가 없네.”

“보는 눈도 없지. 아무튼, 내색은 안 해도 기분이 나쁠 건 분명하니까 말하지 말라고. 여름쯤에 정식으로 석좌 교수 임명장 받을 텐데 그날 어째야 할지 벌써 앞길이 깜깜하다…….”

이현종은 마누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놓는 넋두리마다 족족 이기자 얘기뿐이었다.

자기 자랑이나 수혁 자랑이 아니었기에 다들 뭐지 하는 눈으로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인간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는 걸 다들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이제 소아과 병동에 와 있었다.

“어, 왔어?”

이기자 교수는 수술복 차림이었다.

수술에 들어가서가 아니라 미숙아들이 있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랬다.

“아, 네. 엄마.”

“억지로 안 해도 되는데. 아무튼…… 근데 당신은 왜 왔어?”

“보고 싶어서.”

“여기 병원이야. 미쳤어?”

“미쳤지. 기자한테.”

“고만해…….”

“기자 사랑하는 거 그만하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평생 모르겠어.”

“하…….”

이기자 교수는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현종보다는 아무래도 주변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닌 게 아니라 이현종처럼 막무가내로 저 하고 싶은 말 눈치 안 보고 떠들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 담긴 따스함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아.’

그 주접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묘해졌다.

김인수는 어딘지 모르게 피곤해 보일 지경이었다.

인제 보니 공부하고 환자 보는 것만 힘들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아빠가…… 통화도 좀 그렇지.’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살짝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수혁은 자기 옆에서 명치 주변을 꾹꾹 쓸어내리고 있는, 그러니까 구역질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하윤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러지 못할 거 같은데.’

물론 하윤이 이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은 맞지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그.”

지속되는 정적만큼 민망함이 빠르게 쌓여 가고 있었다.

더 견디지 못할 수준이 되기 전에 이기자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일단 환자부터 볼까? 그리고 이현종 교수님은…….”

“안 갈 건데.”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아니, 팔짱은 안 되지. 주책이야. 이따 퇴근할 때 껴.”

“오키.”

그런 말에도 이현종은 퇴행성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딱 이 모습만 녹화해서 정신과로 보내면 치매를 걱정할 터였다.

굳이 정신과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이들, 특히 소아과 사람들도 걱정이었다.

치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 방해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음.”

당연한 말인데, 그러한 것들은 모조리 기우였다.

이현종은 환자를 눈앞에 두자마자 눈빛부터 바뀌었다.

아직 이기자 교수가 누가 의뢰할 환자인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저기 문틈에 보이지?”

통합진료센터에 있는 인물 모두가 다 비슷하긴 했다.

애초에 그런 인간들을 모아 놓기도 했거니와 가장 영향을 강하게 주는 인물들이 이현종, 수혁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방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모습은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진중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미 대사 아들이야. 이번에 새로 온 사람, 알지?”

그런 일행을 보며, 이기자는 역시 통합진료센터다 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어지는 반응은 좀 실망스러웠다.

“몰라?”

“대사가 바뀌었어? 이제 크리스토퍼 힐 아냐?”

“여보, 그분은……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지금 누구지, 미국 대통령이.”

아니, 너무 통합진료센터다웠다.

오직 환자와 의학만 아는 새끼들이지 않나.

너무 그게 심하다 보니 놈들이란 단어 대신 새끼들이란 단어가 튀어 나가긴 했는데…….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튼, 이기자는 꾹 참고 말을 이었다.

“바뀌었어. 이름은 의미 없을 거 같고. 아무튼, 애가 어린데…… 5살이야. 미국에서도 종종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원인을 찾지 못한 채로 발령받아 왔대. 주된 호소 증상은 재발성 팽진이야.”

“팽진이면…… 두드러기인데, 재발이라는 게 얼마나 자주 있다는 거예요?”

상식에서 벗어나 의학의 영역으로 넘어오자 수혁이 입을 열었다.

[모를 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갑니다.]

‘나도 알지. 우리 아빠가 늘 보여 주잖아.’

[그렇죠.]

바루다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물론 중간을 가고 있진 못했다.

이미 표정으로 대사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 정도는 다 보여 주어서였다.

그래도 되긴 했다.

진료하라고 불렀지 토론하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거의 열흘?”

“열흘……? 너무 잦은데. 환경 요인일 가능성이 높을 거 같은데…… 흠. 미국에서 여기 온 다음에 변화는 없대요?”

“거의 없대. 오히려 잦아졌다고 생각해. 그거 때문에 기러기 되게 생겼다고 걱정하던데.”

“아, 기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기러기 아빠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단 기러기 아빠가 되려면 아빠가 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보통은 결혼을 해야 할 텐데…….

통합진료센터 사람들에게 결혼이란 유니콘과도 같은 존재이지 않나.

그럼에도 인식은 좋지 못했다.

간혹 방치된 채 오는 환자들 중에 기러기 아빠들이 있어서 그랬다.

“그럼 꼭 진단을 해 줘야겠네요. 미국에서도 진료를 했다면, 거기서 생각하는 진단명은 뭐였어요?”

“만성 자발성 두드러기. 이것도 신빙성은 있지. 근데 항히스타민만 주야장천 쓰고 있으니 답답한가 봐.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이수혁 교수 얘기를 했더니, 건너건너 알더라고? 이제 미국에서도 유명한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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