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화 우리도 와 줘야지 (2)
미국에서도 통하는 명성이라.
수혁은 절로 으쓱거리는 어깨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려운 환자 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잘난 척 또한 그의 삶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원동력이기에 그랬다.
무엇보다 하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교수님…….’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요새 뭔가 진전되는 느낌이었다.
명확한 증거나 소견은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느낌으로 진단 내리다가는 돌팔이 되기에 십상이지.]
‘뭐, 인마?’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금 급한 건 눈앞의 환자입니다.]
‘잠깐 상상도 못 하나.’
[하하. 이거야 원.]
‘왜.’
[하윤은 환자 잘 보는 수혁의 모습을 멋져합니다. 자, 보시죠.]
‘오…….’
바루다는 그러한 느낌을 데이터화해서 분석하는 데 능한 녀석이지 않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특한 녀석이 이미 지난 2주간 붙어 다녔던 하윤의 표정을 분석해 놨다.
확실히 환자 잘 볼 때의 눈이 좀 달랐다.
중간중간 마찬가지로 따라다니고 있는 안대훈의 표정 분석도 있었는데, 그쪽은 좀 소름이 돋았다.
[수혁과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하지 마, 미친놈아.’
[근데 맞는데요? 그건 연기였지만 얘는 진짜예요.]
‘하지 말라고…….’
말 그대로 수혁의 모든 순간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바루다가 보기에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는지, 그쪽 영상은 금세 꺼 버렸다.
그러곤 하윤을 확대했다가, 이내 환자나 보라고 턱짓을 해 보였다.
수혁도 마침 그럴 참이었기 때문에 별 저항 없이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그에 따라 이기자 교수의 설명이 더해졌다.
“이건 어머니가 기록한 증상 표. 진짜 많지?”
“네, 엄청 많네요? 거의…… 흠. 1년이나 지속이 되고 있는데…… 그전에는 없었던 게 확실하겠죠?”
“진술에 따르면 그런데, 이 정도로 기록할 정도의 보호자라면 신뢰할 만하겠지.”
“하긴, 그렇죠.”
집요함을 넘어 집착이 느껴질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기록이었다.
보호자가 이 정도로 해 주었다면, 의사로서도 뭔가 하는 게 맞았다.
애초에 늘 최선을 다하는 수혁은 기록을 좀 더 면밀히 훑었다.
방대한 기록은 곧 데이터의 방대함을 뜻하지 않겠나.
바루다의 활약이 두드러질 거란 뜻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루다는 좀 지나치게 우쭐대고, 수혁은 그런 바루다에게 틱틱댔겠지만 인제 와서 그러기엔 둘의 인연이 벌써 수년이었다.
‘알아서 해 봐. 나는 다른 기록 볼 테니까. 저장했나?’
[아니, 좀 더. 너무 많아서.]
‘오케이.’
둘은 쿨하게 서로 잘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합의를 봤다.
해서 수혁은 바루다가 분석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좀 더 들여다본 후, 다른 기록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기록이라 함은 대개 미국의 다른 기관에서 이미 시행한 검사 결과들이었다.
“스킨 프릭 테스트에서는 전부 음성이었네요. 생리식염수랑 히스타민에 대한 반응 보면 검사가 잘못된 거 같지는 않고…….”
“그러니까 말야.”
“그렇다고 갑상샘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기생충 감염도 없고. 흠. 만성 자발성 두드러기 의증으로 진단하고 항히스타민제만 쓴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네요.”
“그러니까. 근데 만약 그게 맞다면…… 환자는 너무 증상이 흔하게 나타나. 게다가 그 정도도 심각할 때가 있어. 가령…….”
이기자 교수는 수혁의 말을 들으면서 프린트된 채 들고 왔던 자료 중 하나를 가리켰다.
한국 병원은 스캔을 뜨건 아니면 아예 emr 차원에서 전송을 하건 해서 컴퓨터로 다 볼 수 있게 하는 데 반해 이 자료들은 죄다 종이 뭉치였다.
사실 이기자 교수는 이런 소아의 담당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보기 불편한 걸 다 본 모양이었다.
수혁은 새삼스럽게 이현종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기자 교수의 손가락을 따라 기록을 훑었다.
“호흡곤란……?”
“구토까지 동반되어 있었어. 그래서 에피네프린까지 맞았지.”
“흐음……. 이상한데.”
“이상하지? 그치? 만성 자발성 두드러기도 물론 상당히 넓은 증상 스펙트럼을 갖긴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한 경우는 못 봤어.”
“네, 저도 그래요. 흐음…….”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모르겠어서 그랬다.
사실 수혁이라고 해서 모든 질환을 보자마자 알아낼 수는 없지 않겠나?
어떤 질환 같은 경우에는 입원해서 지켜보든지 아니면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봐야 진단이 가능하기도 했다.
질환이 드물어서 그럴 때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저 질환의 경과 자체가 시간을 요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야, 어떻게 됐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희망을 아예 놓은 건 아니었다.
바루다가 있으니까.
[후후.]
그리고 바루다는 이럴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적이 아주 많았다.
기계이니만큼 천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하여간, 현존하는 최고의 인공지능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딱히 부정할 만한 이유가 없을 터였다.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수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루다를 보면서 재차 물었다.
‘뭐야, 알겠어?’
[패턴이…… 있긴 하군요. 몇 가지 예외가 있어 오래 걸렸습니다만…… 어린 인간의 생활 행태를 감안해 보면 예외도 마냥 예외만으로 보긴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건데?’
[자…… 보시죠.]
바루다는 환자의 기록을 카테고리화해서 보여 주고 있었다.
카테고리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을 터였다.
아니, 단순히 여러 가지라고 표현하는 게 미안할 만큼이나 많은 방식이 있었을 터였다.
그걸 하나하나 다 해 보느라 시간이 걸린 것일 텐데, 최종적으로 이번에 기준점으로 삼은 것은 발생 시각이었다.
‘어…… 몰려 있네.’
[네, 주로 밤 8시 또는 1시에서 2시 사이에 몰려 있습니다.]
‘흐음…… 원래 알레르기라는 게 밤에 더 심해지긴 하지. 하지만, 이건…….’
인간은 주기를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지 않던가.
그 주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중요한 것을 몇 가지만 뽑아 보자면 호르몬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코티졸인데, 강력한 스테로이드 성분으로 이루어진 이 호르몬은 각성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팍 분비가 되었다가 저녁이 되면 떨어지는 식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질환이 일으키는 증상이 아침엔 좀 낫는 것 같다가 저녁부터 심해져서 밤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질환이 스테로이드를 치료제로 쓸 수 있는 알레르기 질환이라면 더더욱 밤에 심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마련이었다.
즉 원래 의심하고 있던 만성 자발성 두드러기 또한 이러한 양상을 띨 수는 있다는 얘기였다.
‘두 개의 시간대로 갈려……?’
[네, 그리고 특기할 점이 있다면 또 하나의 시간대가 있다는 겁니다. 예외 데이터로 치부했다가 다시 돌려 봤는데, 11시쯤에 보시죠. 그리고 낮에도 발병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습니다. 뭐, 이건 거의 없지만.]
‘그럼 총 시간대가 네 개……?’
[그렇죠. 하지만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은 오후 8시 경입니다. 그러던 것이 한국으로 이주하고 나서는 새벽 1시경에 더 많아졌습니다.]
‘단순 생활 리듬의 변화는…… 아니겠군. 미국에서도 아예 없었던 건 아냐.’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불야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나라다.
그중에서도 서울은 더더욱 그랬는데, 특히 미국의 시골과 비교하자면 밤에 할 만한 것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히 서울에 있던 미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서울의 밤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란 얘기.
해서 진단을 할 땐 이러한 점도 반드시 고려를 해야 하는데, 이번에 예외로 두어도 될 듯했다.
[네, 이 시간대끼리의 시간 차를 보십쇼. 무엇과 비슷합니까? 특히 앞서 두 개의 시간대를 보시죠.]
‘4, 5시간…… 식사. 아침 먹고 점심 먹을 때까지 보통 이 정도가 걸리지. 식사와 연관이 있나?’
[네, 그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사 이상? 아냐. 그러기엔 발병 시기가 너무 늦어. 게다가…….’
아이는 이제 만 6세가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다시 말에 내년에 학교 갈 나이가 된다는 건데, 또래 아이들보다 더 컸다.
[네, 선천성질환이라고 하기엔 다른 동반되는 증상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응급실에 내원해야 했을 만큼 심각한 증상을 일으킨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합병증을 남겼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후천적인 이유로 인한…… 식품 알레르기로 보는 것이 좋겠는데.’
[그렇게 따져 보면 몇 개 남지 않죠. 거기에 더해 한국에서와 미국에서 거의 비슷한 빈도로 증상을 일으킬 만한 식품 알레르기라면 더더욱 줄어듭니다.]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지. 다만, 전제 조건이 필요해.’
[동의합니다. 확인할 것을 요청합니다.]
수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바루다와의 대화를 위해서였다.
눈을 떠도 가능하기는 한데, 대화가 길어질 때면 눈알이 이리저리 튀는 것을 완전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이것을 통합진료센터 인간들은 수혁 타임이라 불렀다.
‘뜨셨다…….’
안대훈은 수혁이 눈을 뜨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확인했다.
해서 지팡이를 건네려 했는데, 선수 치는 사람이 있었다.
하윤이었다.
“여기.”
“오, 땡큐. 가 볼까.”
“환자한테 가는 거지? 보호자 있으니까 물어보기 좋을 거야. 애도 똘똘하고.”
이기자 교수는 자연스레 환자가 있는 병실 쪽으로 향하는 수혁을 따라 걸었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는 영문을 모르는 채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현종이야 이기자랑 낮에도 볼 수 있음에 마냥 신난 상황이었고, 나머지는 수혁의 진료를 직관하는 느낌으로 왔기에 그랬다.
“어머니.”
“네.”
대사의 부인은 바른 몸가짐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오래 앓았다면 앓았다 할 수 있는 아이의 보호자였지만 그늘이 져 있진 않았다.
사실 태화에 입원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경한 질환이라서 그랬다.
불편하고, 고생도 하지만 적어도 죽고 사는 병은 아닐 거 같지 않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는 이따금 재발하는 팽진과 급성 알레르기 반응을 제외하면 또래 집단에서 오히려 건강한 편에 속했다.
“아이 혹시 미국에 있을 때 야외 활동을 자주 했나요?”
“네?”
부인은 처음에 수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남편의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한국의 아이들은 밖에서 노는 경우가 적다고 했던 말이었다.
실제로 와서 보니 상당히 잘 꾸며져 있는 놀이터에도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간혹 있다고 해도 노란 버스인지 봉고가 오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가기 일쑤였다.
“네. 자주 했죠. 나가 노는 거 굉장히 좋아해요.”
“벌레에 물린 적도 있었겠네요.”
“있죠.”
“진드기는 혹시……?”
“진드기? 아…… 네. 그때 열나고…… 좀 아팠어요.”
그에 비해 미국 아이들은 어떤가.
집에만 있으려고 하면 부모들부터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연히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진드기 물린 게…… 언제죠?”
“한…… 1년 좀 넘었…….”
“아이 증상 발생 시기와 거의 흡사하네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