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39화 (1,139/1,303)

1139화 자선 모임 (2)

[술에 취한 것일까요?]

‘아니, 아냐. 물론……. 샴페인을 나누어 주고 있긴 한데…….’

수혁은 아직 건설사 사장의 딸이란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까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가깝다는 것도 수혁의 기준에서 가깝다는 것이지 다른 이에게는 고작해야 누가 누군지 식별이 가능한 거리였다.

수혁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던 것도 건설사 사장이 손가락으로 딱 가리켜서였다.

아무튼, 수혁과 바루다는 걸어가면서 내내 증례 토의를 시행했다.

딸 소개하는 마음인 건설사 사장이 이러한 것을 알게 되면 땅을 치겠으나, 알 게 뭐란 말인가.

‘잘 봐. 자선 행사라 그런가……. 다른 파티랑은 달라.’

[하긴, 그렇군요. 더군다나 수혁처럼 술 약한 사람이 또 있을 거라 판단하긴 어렵군요.]

‘뭐, 인마?’

[자선 행사가 시작한 시간이 이제 고작해야 15분 정도입니다. 그럼 많이 마셔 봐야 한 잔인데……. 한 잔에 저렇게 보행이 흔들릴 만큼 취하는 사람이 흔합니까? 물론 수혁은 가능합니다. 자료 화면이 필요하면 바로 재생합니다.]

‘아……. 아니, 할 필요 없어. 아무튼, 술 때문은 아닌 거 같아. 애초에 이거 내 생각이었는데 이 새끼가 꼭 나 술 못 마시는 얘기를 하네.’

수혁은 바루다가 못마땅한 나머지 고개를 털다가 눈을 떴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윤이 눈에 띄었는데, 병원에서 보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인지하는 동시에 최근 수혁의 주제가가 된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아침에 출근하면 지난 밤이 궁금해. 오늘은 어떤 케이스가 날 부를까.

안대훈과 하윤 등등이 만들어서 부르는데, 뭔가 딱딱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듣다 보면 흥도 나고.

실제로 어떤 케이스가 날 부를지 너무 궁금하지 않나?

더군다나 다른 의사들이 몰라서 그렇지, 실상 아픈 사람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었다.

오늘도 딱 그렇지 않나?

물론 하윤은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말은 해 줘야만 했다.

“하윤아.”

“네.”

건설사 사장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소 흔들거리는 듯한 딸내미 모습에 놀란 나머지 달리고 있었다.

얌전하던 애가 왜 오늘 저럴까.

술에 취했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였다.

그 때문에 사장은 하윤과 수혁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보행장애가 관찰돼.”

“네? 아. 네.”

근데 아마 들었다고 해도 별 상관없었을 터였다.

앞뒤 다 자르고 훅 들어오는데 이게 누구 얘긴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적절한 타이밍도 아니었다.

뒤로는 여전히 대사 부인을 위시한 여러 귀부인들이 있었고, 앞에는 이제 막 소개받을 참인 사람이 있었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완연한 사교의 현장이었다.

허나 하윤은 이제 수혁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황이지 않나.

거기에 더해 하윤은 이런 수혁이 좋은 사람이었다.

“술 때문은 아닐까요?”

“아무리 한국인이 서양인에 비해 술이 약하다고 해도 저 정도는 아냐. 여기 샴페인……. 아까 마셔 봤는데 취하라고 내놓는 게 아닌 거 같아.”

“아, 교수님이 마신 건 무알코올이에요…….”

“그래? 근데 좀 알딸딸하던데?”

“완전 무알코올은 아닐 거라서.”

“아무튼, 보행장애가 관찰이 돼. 근육 문제는 아냐. 마르긴 했지만……. 나이를 고려할 때 비틀거릴 만한 정도는 아니거든?”

“그렇죠.”

하윤도 그제야 상대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관찰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의사가 환자를 관찰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뭔가가 막 튀어나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하윤은 펠로우 1년 차였으니.

상대가 수혁이라면 100년 차 펠로우라 해도 별 의미가 있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안대훈이나 김성진, 김인수처럼 1년 동안 개같이 구른 애들하고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잔을 쥔 손……. 떨리지?”

“어…… 네.”

수혁이 말을 해 주자 비로소 보였다.

“눈 밑도 까매. 화장을 했지만……. 그것으로도 지우지 못했어. 상당히 피로한 상황이야.”

“어……. 그건 저는 잘. 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 합니다.”

일명 다크서클이라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실제로 의학적인 근거가 있었다.

눈 밑의 정맥에 피가 울혈이 되면서 생기는 현상이기에 그랬다.

울혈이 되는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보통은 코의 점막이 부으면서 압력이 높아져서 그랬다.

점막은 피곤하거나 염증이 있을 때 붓기 마련이었고.

“흐음……. 잠깐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계속 웃고 떠드는데, 대화에 거의 참여하고 있지 못해. 피로감도 있는 거야. 요약하면, 피로, 근력 약화, 보행 곤란이 있군.”

“아.”

하윤은 진짜 미쳤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잠깐, 그것도 병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이렇게까지 깊숙이 알아낼 수 있는 걸까?

‘역시……. 교수님은 멋있어…….’

예전 같았으면 마냥 괴물 같네, 뭐 이랬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척을 좀 하긴 하지만, 실제 수혁의 갈망을 더 잘 들여다보면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제대로 진단하는 데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그랬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진짜’였다.

“아, 이수혁 교수님. 여기가 내 딸. 인사해요. 네가 먼저 해야지. 교수님이셔.”

“아……. 네, 안녕하세요.”

대화를 더 이어 나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연회라고는 해도 호텔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회이다 보니 거리에 한계가 있어서 그랬다.

금세 상대에게 도달한 이상, 이제부터는 상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예의였다.

물론 더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것도 하윤의 입장에서 하는 소리였다.

수혁은 드디어 ‘문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안녕하세요, 이수혁입니다. 소개받은 대로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아, 정말 대단하세요.”

상대는 상당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건설사 사장만 보면 되바라진 딸이 예상되었지만, 저 괄괄한 성미로 가정 교육을 빡세게 시킨 모양이었다.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저럴 수도 있었다.

아무튼, 수혁은 상대를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역시, 눈 밑이 거무죽죽하군.’

[네, 순환이 잘 안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잔을 이미 내려놓아서 그렇긴 한데……. 팔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저린가?]

‘저린가 본데.’

[흐음…….]

늘 그러하듯 아주 면밀히 살폈다.

건설사 사장 아니라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그런 시선이었다.

‘우리 딸이 이쁘긴 하지……? 스타일이 확 다르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다운 딸이었다.

거기에 더해 어릴 때부터 좋은 것만 보고 자라다 보니 안목도 좋았다.

뭘 하나 걸쳐도 딱 태가 나는 걸 걸친다고나 할까?

오늘도 그랬다.

애가 영 비리비리하긴 한데, 그래도 이쁘다.

“성함이?”

이미 마음에 든 거 같은데 끼어드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주책맞다는 말을 듣고도 남을 터였다.

해서 건설사 사장은 눈치 좋게 뒤로 슥 물러났다.

물론 딸에게 살짝 응원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딸은 그에 대한 답을 해 주는 대신 수혁의 말에 답했다.

“네, 박익비라고 해요.”

“네, 박익비 님.”

“님이요?”

씨도 아니고, 님?

님?

니이이임?

‘일부러 이러나? 관심 끌려고?’

딸은 이제 고작해야 이십 대 중반이었다.

건설사 사장을 비롯한 부모가 물어다 주는 사람들은 대개 30대 중반 이후였고.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주선한다고 보면 되었다.

당연히 생각이 없었다.

그에 비해 수혁은 지팡이를 짚고 있긴 하지만 나이는 어려 보였다.

나름 생긴 것도 나쁘진 않았고.

그래도 까려고 했는데, 님이라고 한다.

‘센스가 있는 건가……?’

하여간, 약간 관심이 생겼다.

그래 봐야 이성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애초에 옆에 있는 사람이 너무 이쁘지 않나.

이런 사람하고 잘되고 있다면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만약 잘 안되고 있어?

이런 사람한테도 관심이 없는데 무슨 수로 관심을 끄나?

“요새 피곤하시죠?”

“어……. 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또 의외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멘트라고 해야 할까?

의사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모가 관심 있어 하는 사윗감에 의사도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아직 어리다 보니 숱하게까지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꽤 만났다.

그중에서 피곤하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나?

없었다.

병원 얘기를 약간 자랑하듯 늘어놓거나, 오히려 자기가 피곤하다고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피곤하시지 않아요?”

“어……. 그렇긴 한데 어떻게……?”

“말씀드리기 전에 질문 몇 개만 더 할게요.”

“어……. 네.”

그에 비해 수혁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함부로 물어보는 주제에 이쪽 질문에는 답도 안 해 줘?

약간 나한테 이런 사람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걷는 건 언제부터 불편하셨어요?”

“어……. 그건 또 어떻게…….”

“보면 알죠, 그건. 비틀거리시던데. 힐도 아니잖아요. 술도……. 거의 입만 대셨고. 그리고 무알코올이잖아요.”

“어……. 엄마는 모르죠?”

“모를 겁니다. 저만 알 거예요, 지금은.”

“음.”

나에 대해 자기만 아는 사실이 있다, 이거지?

이걸 로맨틱하다고 봐야 하나?

그런 건가?

근데 태도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느낌이었다.

약간 진료받는 느낌이랄까?

“팔도 저리고요.”

“어……. 그건 또.”

“보면 알죠.”

“아.”

“종합하면……. 박익비 님은 지금 전신 피로감에 근력 약화, 보행 곤란이 있어요.”

“어……. 네.”

느낌이 아니라, 진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하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피곤할 텐데, 여기 앉으시죠.”

“그, 그래도 돼요? 교수님도…….”

“아, 전 이거 익숙해서 괜찮아요. 박익비 님은 최근에 생긴 증상 아닙니까?”

“어…… 어떻게……?”

“이건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아는 건데, 보통 불편한 지 오래된 사람은 신발부터 해서 신경 써서 구비하는 편이거든요. 무엇보다 본능적으로 앉아 있죠. 그럴 수 없는 상황이면 기대거나 최소한 의자가 가까운 곳에 있죠. 근데 박익비 님은…….”

스탠딩석에 있었다.

높은 테이블에 몇 가지 핑거 푸드만 놓여 있는 곳.

물론 자선 행사다 보니 대개 그런 자리긴 했지만, 잘 찾아보면 앉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선이라는 게……. 기부이지 않나?

아주 훌륭한 사람은 처음부터 훌륭하지만, 대개의 경우엔 어느 정도 기반이 닦인 후에 훌륭해지는 법이었다.

소위 자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이가 좀 있는 건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하여간, 그런 이들을 위한 자리는 당연히 마련되어 있었다.

“덩그러니 있었죠. 저쪽으로 가시죠.”

“아, 네. 안 그래도.”

“부축해 드려요?”

“네, 아니 초면에 그건.”

“아니, 우리 우하윤 선생이 해 드릴 겁니다.”

“아, 제가 하는 거군요. 제가 할게요.”

“네, 그럼…….”

그렇게 셋은 의자가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아직 행사 초반이다 보니 그 누구도 없이 비어 있었다.

건설사 사장은 그러한 셋을 보면서 조금 헷갈렸다.

‘뭐지?’

잘되고 있는 거 같기도 한데…….

부축하고 있는 게 같이 온 여자였다.

‘뭐야?’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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