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1화 자선 모임 (4)
병원 간다는 말에 하윤은 군인처럼 절도 있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꺼내 놨던 혈압계를 부리나케 챙겨서 커다란 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신기하게 안에 넣자마자 혈압계가 들어 있을 거란 생각은 금세 사라지게 만드는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가방 안에 넣는 방법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자…… 갈까요?”
그사이에 수혁도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를 짚으면서였는데, 아무래도 하윤만큼 빠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여태 앉아 있던 박익비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진짜…… 진짜 가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가.
워커힐…….
미군 장성이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것을 기념해 설립한 호텔이었다.
말하자면 한미 우호의 역사가 담긴 유서 깊은 곳이란 얘기였다.
괜히 주한 미 대사 부인이 주최하는 모임이 여기서 열리는 게 아니었다.
말이 후원자들이지, 주변을 둘러보면 미군 장교들도 득실득실했다.
특히 오산에 있는 주한 미군 사령관도 눈에 띄었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자리란 얘기였다.
“가야죠. 아픈데.”
처음 오는 사람들은 주변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는 게 보통이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면 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사방에 즐비한 거물들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박익비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어머니도 여기서 성사한 사업이 한둘은 아닐 거라 여기고 있었다.
원래 좋은 일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만큼 흉금을 터놓기 좋은 이들도 별로 없는 법이지 않나.
한데 지금 일어난 이 젊은 의사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팔…….’
로맨틱하게 들렸다면 정정해야 할 터였다.
이성으로서의 눈이 아니라 의사의 눈만 하고 있었으니까.
‘미쳤나.’
그래서 더 이상했다.
만약 상대에게서 자신과 잘해 보려는 뜻이 아주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기분이야 어떨지 몰라도 합리적이란 생각은 들었을 텐데…….
이건 그것도 아니지 않나.
말 그대로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어…….”
정신을 차려 보니 호텔 로비 밖이었다.
‘화장실 가나? 근데 왜 저렇게 몰려가지?’
건설사 사장은 그렇게 나가는 이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들고 있던 가방을 비롯한 모든 짐을 들고 나가긴 했지만, 설마 지금 나가는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해서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상대와의 대화에 조금 더 집중했다.
“발레파킹 차량이요? 아…… 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 수혁과 하윤은 몰상식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진짜로 나가고 있었다.
호텔 직원은 모임에서 뭔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여기서 뭘 묻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나.
해서 묵묵히 차만 가져왔다.
수혁이 앞자리에 타고, 하윤과 박익비는 뒤에 탔다.
부우웅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막히지도, 그렇다고 해서 뻥 뚫리지도 않았다.
워커힐이 서울에 있다지만 동쪽 끝자락에 있다 보니 병원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었다.
대략 20, 30분?
다른 사람 같으면 또 모르겠지만…….
수혁과 하윤은 자선 행사하다가 나와서 병원으로 갈 정도로 이상한 인간들이지 않나.
진료에 있어서 시간 낭비할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흐음.”
“왜, 왜요?”
“제가 하니까 흥분이 안 되시나 봐요. 혈압이…….”
“아니, 이건 언제 재고 있었어요. 그리고 흥분이라니…….”
“흥분이란 단어에 흥분이 되시나 봐요. 혈압이 다시 오르네. 흐음.”
“진지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에 비해 박익비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뭔가 부스럭거리긴 했지만, 쳐다볼 기운도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겨울 방학을 이용해 미국에 다녀온 이래 계속 힘이 없었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세상에, 뭔 놈의 시차 적응이 한 달을 가나.
게다가 이코노미를 타고 왔으면 또 모르겠는데, 박익비는 비즈니스를 타고 움직였다.
이코노미 탈 때 보면 알지 않나.
어지간한 숙소보다 아늑해 보이는 것이 비즈니스였다.
하여간, 그냥 있었더니 옆에서 몰래 혈압을 재고 있었다.
“혈압이 원래 어땠는데?”
그것도 모자라, 운전하고 있던 수혁이 질문을 걸어왔다.
답이야 당연히 하윤의 몫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박익비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정상이었어요. 뭐…… 매뉴얼이고 또 차 안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보통 그러면 높게 나온다는 걸 감안하면 정상이라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거의 정상이라는 게…… 정확히 얼마였는데?”
“130에 85요. 최신 지견에 따르면 일부에서는 이것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애매하네. 흐음…… 알도스테론 혈증이 있을 거 같은데, 혈압이 거의 정상이다?”
“가능할까요?”
“가능은 하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사실 저칼륨혈증이 아주 심했다면 저렇게 나다니지도 못했을 테니.
아직 초기에 해당한다면, 저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추론은 늘 위험합니다.]
‘그렇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는데…… 뭐, 그렇다고 해도 검사는 필요한 상황이야. 절대 정상은 아닐 거거든.’
[그렇죠. 혹 더 큰 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알도스테론 증가가 아니라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젊죠?]
‘어린 거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면 악성질환일 가능성이 있었다.
암은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전신증상을 일으켜 버리지 않나.
젊은 사람에게 그런 건 너무 커다란 시련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대학 병원에 있다 보면 그보다 더한 것도 많이 보기 마련이었다.
소아암 병동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면 대체 이 병은 어떤 섭리인가.
뭐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는 뜻이었다.
부우웅
아무튼, 자신이 생각했던 질환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든 마당이지 않나.
자신도 모르게 액셀을 꾹 밟아 버렸다.
그러자 속도가 더 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차도 그냥 얌전한 차고 또 도로가 빈 것도 아니다 보니 드라마틱한 속도 변화가 있지 않았지만…….
‘뭐야, 뭔가 이상한데.’
박익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기엔 충분한 변화였다.
“자, 바로 응급실로.”
“으, 응급실이요?”
“네. 주말인데, 다른 곳에서 검사가 되겠어요?”
“아니…… 저…… 진짜로요? 저 그냥 피곤한 거 같은데…….”
뭔가 더 큰 병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법이었다.
미리 매를 맞는 게 낫다는 사람은 즉시 검사를 원했다.
허나 일단 부정하고 회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 나이가 어리면 후자에 속하는 법이었다.
덜컥 겁이 나서 그랬다.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리고 20대 중반에 체형이 이런데 그냥 피곤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에요. 이참에 검진받아야 합니다.”
“아니, 그래도.”
해서 뒤로 빼려고 했지만 상대가 수혁이고 또 하윤인데 그게 되겠나.
이전의 하윤이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이제 엄연히 통합진료센터의 우하윤이었다.
“어허. 이수혁 교수님께서 뭔가 의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에? 저 혼나요?”
“혼나야지, 그럼. 주말에 따로 시간 내서 병원까지 오셨는데. 이런 일이 어디 흔…… 흔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어…….”
혼을 빼놓는 화법.
이현종, 안대훈 등의 이상한 사람들에게 배우다 보니 오히려 비논리적일 때 상대를 더더욱 효과적으로 흔들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해서 박익비는 엉겁결에 의자에 앉게 되었다.
아무리 수혁과 동행했다고 해도, 딱 봐서 트리아지 상에 레드는 아니지 않나?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특별 대우를 받으려면 걸어 들어오면 안 되었다.
쓰러져서 오거나 의식이 없어야 했다.
“혈액검사부터요.”
“아, 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깔겨 두는 일은 없었다.
상대가 이수혁이지 않나.
VVIP였다.
딱히 항간에 도는 재벌집 막내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혁이 응급실에서 베푼 은혜와 이적만 해도 벌써 수백 건인데 소홀히 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금수 새끼지.
“어떤 거 나갈까요?”
“일단 ABGA도 해야 해요. 전해질도 보고…… 마그네슘이나 갑상선 기능 검사도 하고. 알도스테론 수치도 보고요. 자극 검사도 시행하겠습니다. 그 외에는 루틴으로 긁죠. 아, 소변검사도. 소변에서 칼륨 수치를 좀 봅시다.”
“아…… 네. 이해했습니다.”
해서 인턴이 아니라 응급의학과 펠로우가 직접 왔다.
교수가 와도 되지만 태화 의료원 응급실이 어디 만만한 곳인가.
언제나 죽어 가는 사람이 한둘은 누워 있다고 봐야 했다.
내과가 아닌 응급실이기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교수들은 그런 환자들이 있는 처치실에 몰려 있었다.
“따끔합니다.”
“동맥혈 검사는 제가 직접 할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라인을 잡으면서 정맥혈을 뽑아 갔다.
동맥혈 검사는 의사가 해야 하는데, 인턴한테 맡기는 건 좀 그런 상황이었다.
뭐가 되었건 자신이 직접 끌고 오지 않았나.
해서 수혁은 간만에 헤파린 처리가 된 주사기로 동맥혈을 뽑았다.
“앗.”
원래 이게 더럽게 아프기로 유명한 검사라는 걸 감안하면, 방금 박익비의 반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골수 검사인 줄 아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물론 박익비는 의료인이 아니다 보니 방금의 통증만으로도 깜짝 놀랐다.
어딘지 모르게 원망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는 박익비를 뒤로하고, 수혁은 방금 뽑은 동맥혈을 분석기에 넣고 돌렸다.
동맥혈 검사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검사로만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것에 더해 결과가 즉시 나왔다.
드드드드
출력된 값을 보니, 칼륨이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대사성알칼리증도 있었다.
“역시 저칼륨혈증이네. 일단 생리식염수로 보충 좀 할까.”
“네. 근데 저칼륨혈증의 원인은 뭘까요?”
“여전히…… 알도스테론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우선 수치 보면서 정하지 뭐.”
“아, 네.”
“그동안에는 일단 증상 조절만 하고.”
“네.”
수혁은 그 수치를 보며 하윤과 함께 토의를 하고서 환자에게로 돌아왔다.
침대는 아직 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박익비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좌석 여러 개가 나란히 놓인, 빈말로도 편하다고는 못할 의자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텔에 앉아 있었다 보니 현실감이 막 사라질 지경이었다.
‘나는…… 이게…….’
그렇게 멍하니 있으려니 알아서 착착 식염수가 연결되었다.
“어…….”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뭔가 몸이 편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수액의 힘인가 하고 있으려니, 박익비의 눈만 보고도 뭔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은 수혁이 입을 열었다.
“칼륨이 부족했다가 이제 들어가서 그래요.”
“아, 그럼 저 이제 다 나은 거예요?”
“아뇨. 알도스테론이 높아요.”
“네? 뭐요?”
“이게 왜 높은지 봐야 합니다. 팔 내밀어 봐요. 피 더 뽑아야 하니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