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5화 이거 그럼 그때 그거 맞죠? (2)
“하아아…….”
대사 부인은 녹초가 된 몸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 그대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힘들었다.
원래 행사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막상 해 보면 주최 측에서는 힘들 수밖에 없지 않던가.
마음 같아서는 냅다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보고…… 내일 들으실는지요?”
“아니, 바로 해 줘. 내일이라고 시간이 남는 게 아니라.”
“그렇긴 하죠. 네, 그럼 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하루를 정리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나갈 수 있으니.
게다가 오늘 행사는 역대 대사 부인들이 다 해 왔던 행사였던 만큼 중요하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아예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미 우호의 상징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청와대에도 보고되는 행사이지 않나.
백악관?
당연했다.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에서도 주요 기관이지 않나.
“일단 참석자는 총 238명입니다. 모인 후원금은 300억이고요.”
“많네?”
“네. 전직 골프선수랑…… 연예인들도 있어서요.”
“아…… 맞아, 기업보다 개인 기부가 많다고 했지, 여기는. 문화적 차이인가?”
“그럴 겁니다. 유니세프 개인 기부액이 전 세계 1등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단하네. 원조받았던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가 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닌데.”
몇 명이 왔고, 누가 왔는지, 얼마를 냈는지는 기본이었다.
그 외에 와서 분위기가 어땠는지, 누구누구가 특히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거기서 오간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나 오는 자리가 아니지 않나.
설령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여기 올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내 정치, 즉 대한민국 내의 정치에만 영향을 끼칠 사안이라면 파악은 해 두되 딱히 정리까지는 안 해도 되겠지만 한미 관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안이라면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아, 그래. 맞아. 이수혁 교수님은 어디 갔지?”
그렇게 대강 머리 깨질 만한 일을 다 정리하고 나서, 개인적인 궁금증을 털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직원들은 수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사 부인이 데려온 사람 아닌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들 고쳐 준 것 때문에 원래는 대사 본인이 와서 직접 인사도 하려고 했다.
하필 오늘 청와대에서 일이 생겨서 좀 늦는 바람에, 수혁이 이미 떠난 후에 와서 못 한 것일 뿐이었다.
“아…… 그게. 저희도 지금 정보를 맞춰 보고 있습니다.”
“정보는 맞춰?”
“보고는 사실 간단한데……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요.”
“이상해……?”
“네. 박익비 님과 같이 이동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오늘 박익비 님이 수술을 받았습니다.”
“응?”
이상하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상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헌데 이 정도라고?
대사 부인은 그녀로서는 실로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직원은 그런 그녀를 십분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뭐 양호한 반응이지 않나?
어떤 직원은 CIA에 의뢰해야 하는 거 아니냔 말까지 했더랬다.
“수술? 사고가 난 건가?”
“아뇨. 교통사고는 없었습니다. 그냥…… 천천히 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간에 속도가 났지만, 그래도 느렸다고.”
“미행한 거야?”
“둘이 갑자기 나가서요. 주요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대사 부인은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소문까지 있던 수혁을 떠올렸다.
정보기관 협조받아서 알아보고 나니 실제로는 재벌집은커녕 고아였다.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이 어찌 그런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는지가 의문일 지경이었다.
아무튼,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신격화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숫제 단체가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예의 주시해서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가서 진단을 했고, 그 결과 수술을 받았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게 아무래도 좀?”
“음. 그래.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그렇지. 이게 말하자면 여기서 진단을 해서 병원 데려가서 검사하고 수술시켰다는 건데. 이런 경우는…….”
“네,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아, 피곤하네. 이제 자야겠어.”
“네, 쉬십쇼.”
대사 부인은 직원을 무르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대사는 여전히 장성들과 여러 국회의원들과 술 먹느라 아직 돌아오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시간이 좀만 더 흐르면 훨씬 낫겠지만, 지금은 일단 대한민국의 유력 정치가들과 안면을 다져야만 한다는 걸 이해하기에 뭐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잠을 방해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진짜…… 감사합니다. 사모님!
“응?”
-저희 딸, 이수혁 교수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대요. 심하면 부정맥도 올 수 있었다고…….
건설사 사장, 박익비의 어머니에게 온 전화였다.
찬찬히 들어 보자니 과연 수혁은 괴물이었다.
아들보다 더 신기한 경로로 진단을 해낸 모양이었다.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다음에도 모임이 있거나 하면, 특히 평균 연령대가 더 높은 모임이 있으면 불러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고혈압이 있네요……?”
“네, 그렇게 들었어요.”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토요일에 수혁 때문에 복강경 하 부신 선종 절제술을 진행했던 외과 교수는 외래에 있었다.
내분비내과에서 의뢰해 온 환자였는데, 혈압이 높았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조절이 아예 안 되고 있었다.
약을 쓰건 뭘 하건 마찬가지였다.
“흐음. 잠시만요.”
“네…….”
교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이내 환자를 돌아보았다.
나이는 이제 고작해야 24살.
피부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자연히 주말에 봤던, 지금도 병실에 입원 중인 박익비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거의 흡사한 질환인 거 같았다.
‘그 환자는 혈압이 정상이라서 헷갈렸지만…… 이 환자는 혈압이 180에 120…….’
1차로 진단한 병원에서 어찌나 놀랐는지 바로 의뢰서를 써서 보내 버렸다.
원래 그 병원에 간 거는 예방주사 맞으러 간 거였는데, 그 전에 혈압 재다가 너무 높으니까 보낸 건데…….
히스토리를 보니 좀 복잡하긴 했다.
“잠시만요. 제가 이거 다 읽어 봐야 해서. 당일 접수라 사전에 제가 환자분 정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어요.”
“네, 괜찮아요.”
벌써 대학 병원에서 근무한 지도 20년이 다 되어 가는, 말하자면 의학 빠꼼이가 다 되어 가는 교수의 눈으로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꽤 긴 기록들이 있었다.
다행한 것은 환자가 무난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예민한 사람들은 이쯤 되면 짜증도 내고 하는데, 그저 앉아서 기다려 주었다.
‘월경이 만 14세까지 없었군……. 이차 성징도 없었고, 그래서 시행한 염색체 검사에서 XY가 나왔고…… 고환 여성화 증후군으로 진단받았어.’
이 기록을 읽고서 봐도 상대는 여성이었다.
염색체상으로만 남성일 뿐, 이미 당시에 복강 내 잠복 고환에 대해 성선 절제술을 시행받은 후 에스트로겐을 투약받아 온 덕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다가 고혈압…… 흠.’
전에 받았던 수술과 고혈압이 연관이 있을까?
에스트로겐이 혈압을 올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그때 문제는 그때 끝났다고 보는 게 옳아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 질환은 알도스테론 분비 선종입니다. 수술하면 돼요.
돌연 주말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당연히 수혁이 해 준 말이었다.
어찌나 당당하게 말했던지, 어쩌면 김승규에 대한 언질이 없었다고 해도 미쳤다 하고 수술을 해 줬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는 걸 확인했던 순간, 외과 교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수술마저 평소보다 훨씬 잘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뽕에 가득 차 있었다.
‘그거네, 이거. 아주 전형적이네. 혈압까지 높고. 이거.’
옳거니 싶었던 외과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수혁의 표정을 따라 했다.
살짝 눈을 감고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는 말이었다.
중간중간 중얼거리는 척도 했다.
무난한 편인 환자가 보기에도 좀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외래에서 뛰쳐나갈 만큼은 또 아니어서 일단 있었다.
“환자는 분 혈압이 높은데…… 그 외에 말입니다.”
“네.”
“팔다리에 힘 빠지는 증상이 있거나 하진 않았어요?”
“어? 그걸 어떻게…… 전보다 좀 힘이 없어요.”
“하핫.”
의사가 환자 앞에서, 아직 치료도 안 받은 환자 앞에서 진짜 웃어 버리는 건 그리 적절치 않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외과 교수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수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마치 의학의 절대자가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몇 가지 검사를 해 봐야 할 텐데…… 수술받으면 좋아질 겁니다.”
“아…… 정말요? 혈압 높은 게 수술로…….”
“그렇죠. 사실 혈압이 높을 만한 체형이나 나이가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요. 저도 그래서 전혀…… 혈압 쪽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거든요.”
키가 167에 몸무게는 47.
통통하기는커녕 말랐다.
아니, 늘씬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고혈압이 생길 만한 요소는 알도스테론 혈증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 바로 입원하실까요? 마침 병실 하나가 빌 겁니다.”
태화에 남는 병실이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응급실로 와도 하루 이틀 기다리는 게 허다한 병원이지 않나.
물론 이제 그런 일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응급 의학 병동도 운영하고 있긴 한데…….
오늘은 진짜 우연히 수술이 취소되면서 빈 병실이 하나 있었다.
좀 있으면 바로 다른 환자에게로 돌아가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 네. 그럼 부탁드려요.”
환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병실이 배정되었다.
“오후에 올라갈 때까지 제가 여기서 낸 처방들을 시행할 거예요. CT까지 찍을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뭐 밤에라도 찍겠습니다. 보호자분들 저녁엔 오실 수 있을까요?”
“네? 아…… 저녁은 좀 그렇고. 8시? 9시?”
“뭐 좋습니다. 그때 퇴근 안 하니까요.”
“아, 저 때문이면…….”
“아뇨, 원래 안 해요.”
8, 9시에 집에 갈 수 있는 외과계 교수가 어딨나.
외과 교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처방을 쭉 때렸다.
수혁이 했던 거 따라 하면 될 일이다 보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혈중 레닌, 알도스레톤 농도에 식염수 정주 후에 억제되는지 여부까지 보도록 했다.
환자는 처방과는 별개로 병실이 비워지는 대로 입원하게 되었고, 병동 간호사에게 혈액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거의 바로 이루어져서, 저녁쯤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하핫.”
외과 교수는 예측이 맞았단 생각에 껄껄 웃었다.
딱 주말에 봤던 환자랑 같았다.
CT?
CT도 찍었다.
부신 선종이 이쁘게 자라 있었다.
“하하하핫!”
이 정도면 잘난 척 좀 해도 되지 않을까?
외과 교수는 환자에게 가기 전에 깔깔 웃었다.
마침 박익비 환자를 보러 왔던 수혁은 안대훈, 하윤, 김성진을 뒤로하고 호기심을 띄웠다.
‘뭔 환자를 봤길래 저러지?’
[가 보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나머지는 그저 그런 수혁을 따랐다.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기다릴까를 흥얼거리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