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화 우리 학회도 준비해야지 (2)
“안대훈, 김성진 선생님.”
“네.”
“네, 수간호사님.”
수간호사.
간호사 직군의 정점.
물론 본관, 별관, 암센터, 수술실, 중환실을 각각 대표하는 간호부장들이 있고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간호 차장, 즉 부원장급의 인사가 있긴 하지만…….
이 둘은 사실 밑에서는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통합진료센터가 특이한 거지 원랜 같은 직군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의사라 해도 원장이나 부원장을 언제 보겠나.
자기가 속한 병동의 수장인 수간호사 정도의 위엄이 저 둘보다 오히려 더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티타임?”
“네? 교수님 화장실 갔다 금방 오실 텐데.”
“오전에 회진 도시고…… 오후에 입원 예정도 없어요. 그리고 병동 일로 선생님들하고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아.”
그런 사람이 상의를 논한다…….
‘시발, 누가 사고 쳤나?’
‘어떤…… 새끼지?’
안대훈과 김성진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통합진료센터는 의사 직군과 간호사 직군 사이가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는 곳이긴 했다.
센터장인 이현종부터가 수간호사랑 친하게 지내는 데다가…….
이수혁이나 김성진, 안대훈, 김인수 등 소속 인원들의 성격이 일단 부드러운 편이지 않나.
뭐 좀 이상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욱이 통합진료센터에서 보는 환자들은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처럼 당장 넘어갈 환자들은 아니더라도 어려운 케이스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우애도 싹트기 마련이었다.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우리…… 레지던트 진짜 많이 배정받았잖아. 있겠냐.’
‘하긴……. 배우기도 바쁜데 가르치기까지……. 환자도 많고요. 정신이 없긴 해요?’
‘아마 우리만큼 근무시간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펠로우, 임상강사도 없을걸.’
김성진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진짜 근무 시간만큼은 아마 태화 의료원에서도 제일 힘들 터였다.
물론 그 외의 시간은 철저히 보장되고 있었다.
이 둘은 그 시간에 따로 공부하고 모임도 갖고 하지만…….
적어도 환자를 봐야 하거나 교수 뒤치다꺼리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오늘도 운전을 수혁이 하지 않았나.
아무튼, 워낙에 바쁘다 보니 레지던트 관리가 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누구야,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우릴 불러?’
아무튼, 레지던트는 힘든 직업이지 않던가.
힘들다고 해서 밑바닥을 꼭 내보여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지간한 경우엔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레지던트 할 때는 지랄의 빈도가 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안대훈이나 우하윤도 한 번쯤은 평소라면 절대 내지 않았을 화를 낸 적이 있었을 정도이니 어쩌겠나.
성격이 더럽거나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 빈도와 정도가 심해질 터였다.
달깍.
둘은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먼저 탕비실 겸 회의실에 들어간 수간호사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고 들어서자, 수간호사가 작은 서류철을 둘에게 쥐여다 주었다.
딱 보니, 다행히 뭔 갈등이 있던 것 같진 않았다.
‘그것보단 작은데…….’
‘그렇다고 작다고 하긴 뭐하네.’
신규 간호사들의 이직 신청서였다.
“일단 제가 설득해서 막고는 있어요. 뭐 빈도가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비할 정도는 아니에요. 외래보다도 낮고.”
“그래도…… 일반 병동 보다는 높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여기도 중증도가 꽤 높고 어려운 환자들이 많으니까요. 근데 잘 보세요, 밑에.”
“밑에? 아.”
수간호사가 벌써 경력이 몇 년인가.
‘쌓아 뒀지, 후후.’
안 그래도 교수 아랫급 인사들하고 상의를 좀 해 볼 참이었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래도 더 많겠지만…….
밑에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어서 그랬다.
“거기 보면, 간호사들 불만 중에 친해지기 어렵다가 있어요.”
“교에 들어오면 되는데.”
“그러니까…….”
수간호사는 한숨을 쉬었다.
교라니.
처음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어? 어어. 나보고 대부래. 신을 낳았다나 뭐라나. 하하.
이현종, 그 인간이 농담처럼 말해서 더 그랬다.
알고 보니…….
진짜 센터 일부는 수혁을 신처럼 모시고 있었다.
이현종을 신의 아버지, 갓파더로 모시고 있었고.
그 덕에 센터가 적어도 의사 직군 사이에서는 잡음 없이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 교에 들어가진 못하겠는데 친하게는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놀라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아요.”
“불충한…….”
“하하, 그렇긴 하죠. 매일 기적을 보는데 감히.”
“어? 수간호사님도?”
“속으로는 따르고 있습니다.”
뭐 어쩌겠나.
광신도 새끼들한테는 맞춰 줘야지.
내칠 수 있으면 내치는 게 맞겠지만, 눈앞에 있는 두 놈은 메인이었다.
아니, 김인수에 우하윤 등등 센터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은 다 비슷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현종이 원장 하던 시절, 해외 연수 간 시절, 그리고 이현종이 아직 짬이 덜 찼던 시절에 같이 일했던 과장들 중에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밖에 나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더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여기 굳이 남은 인간들이지 않나.
명예와 학구열 그리고 어렵고 복잡한 환자 보는 게 좋아서.
이 세 개를 돈과 여가보다 더 좋아한다는 거…….
그런 점이 멀리서 보면 마냥 좋아 보이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좀 이상하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얘들은 순수하지 뭐.’
뭔가 다른 동기가 있거나 아니면 사람이 좀 꼬였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었다.
이현종처럼 그냥 그게 너무 좋은 사람도 있긴 한데 드물었다.
아무튼, 수간호사는 한패라는 착각에 빠져 신나서 떠들기 시작한 두 방해꾼, 안대훈, 김성진을 묶어 둔 채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윤처럼 벌게진 채 돌아온 수혁이 보였다.
-마침 학회니까 발표나 좀 봐주세요. 안대훈, 김성진은 최소 1시간 길게는 2시간 없어요. 저녁도 따로 회식 잡을 거니까, 아예 따로 가시고.
문자를 보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수혁이 귀여웠다.
말이 교수지, 애 아닌가.
이제 갓 서른 좀 넘은.
거기에 원래도 동안이다 보니 더 어려 보였다.
‘왜…… 이현종 교수님이 어화둥둥 하는지는 알겠어. 하윤 선생하고도 잘 어울리고. 인물이야 좀 처져도……. 뭐 얼굴 뜯어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수간호사는 몰래 응원을 보내고는 방해꾼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현태의 응원 아니, 작전처럼 하늘에서 뚝 연속으로 떨어지는 종류의 응원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 그런 게 또 필요할 정도면 애초에 잘되겠나.
그냥 혼자 사는 게 나을 터였다.
“하유…… 운아…….”
“아, 네.”
“둘은…….”
“수간호사…….”
“어어.”
“네.”
아마 대화를 들었다면, 수간호사는 포기했을 터였다.
이 새끼는 혼자 살아야겠구나.
멍석 깔아 줬는데 말이나 더듬고 있고.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윤도 똑같았다.
“그…… 그래. 학회…….”
“네네.”
“준비는 잘되어 가?”
“어…… 그. 모르겠어요. 펠로우는 처음이라.”
좀 슬픈 얘긴데, 맨날 하던 게 병원 일이라 그런가…….
학회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대화가 편해지는 것을 둘 다 느꼈다.
“하긴, 그렇지. 레지던트 때랑은 아무래도 좀 다를 거야.”
“네, 진짜……. 게다가 저 전에 발표했던 게 기후 변화와 팬데믹이라. 그거보다 잘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비슷한 수준으로는 해야 되거든요.”
“그것도 그렇네. 으음……. 그때 그거…… 네이처에 냈지?”
“네. 아직 심사 중이에요.”
“마이너 교정만 나올 거 같은데. 그 급이라……. 쉽진 않네.”
수혁의 별명 중 하나가 논문 기계 또는 논문 자판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이처 급을 막 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 부담 갖진 마시고요.”
“아니, 아냐. 하나 안 그래도 좀 생각하던 게 있긴 있어.”
바루다가 없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가 있지 않나.
바루다가 이런저런 데이터를 만지고 또 분석하는 데 도가 트다 못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놈이다 보니, 임상에서뿐만 아니라 논문 쓸 때도 당연히 괴물과도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떤 거요?”
“응, 일단…… 연구실로 갈까?”
“아, 네.”
“그래, 그럼 가자. 몸은 좀 어때? 아까보단…….”
수혁은 논문 생각을 떠올리자 머리가 좀 식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마냥 들뜬 채로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수혁은 이제 더 이상 10대도 아니지 않나.
[아픈 것도 아니었으니 괜찮겠죠.]
‘근데 너무 괜찮아지면 감정이 식어 버리는 거 아닐까?’
[수혁……. 계속 신체가 그 상태면 죽어요.]
‘아, 하긴.’
[정말 이렇게 굴 겁니까? 멍청이처럼?]
‘멍청이 맞아. 연애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 버렸군……. 다행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바루다도 노력하긴 했다.
나름 기계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셈이었다.
달깍.
하여간, 수혁은 하윤과 함께 연구실에 들어왔다.
부센터장이다 보니 연구실은 제법 좋았다.
우선 넓고, 안에 넣어 둔 가구들도 하나같이 좋았다.
김다현이나 왕자님 또는 싱가포르에서 보내온 가구들은 좋다기보다는 사치품의 영역에 닿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걸 그냥 널어놨다면 졸부 느낌이 났겠지만 비싼 가구 사이사이를 이기자 교수가 새엄마의 책임감으로 채워 두어서 대단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좋아졌어요. 따뜻한 물 먹어서 그런가.”
“다행이네. 자, 이거. 차야.”
아무튼, 수혁은 따뜻한 차를 한 번 더 건네주고는 논문거리를 뒤적거렸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깄네. 맞춤 의료. 이거 전에 우리가 했던 거랑 좀 연관도 있어.”
“맞춤 의료……. 요새 많이들 얘기하던데요.”
하윤의 머리도 아까보다는 좀 식은 상태였다.
논문도 논문이지만, 한번 내가 이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더 나아진 느낌이었다.
아니, 그 느낌을 지나 이젠 어떡하면 이 인간을 꼬실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더니 그랬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랄까…….
슬픈 일인데 원래 의사들은 대개 이랬다.
“어, 그렇지. 근데 말만 그렇게 하지, 잘 들어 보면 공허한 주장이 훨씬 많아. 유전자 검사를 해서 각 개인의 유전자에 맞춰서 치료를 한다……. 말은 좋지. 언젠가는 이렇게 돼야 할 거고. 근데 그게 가능하겠어? 미국의 극소수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의료는 그런 게 아냐.”
“그렇긴 하죠. 맞네요. 진짜.”
수혁이 무슨 모든 사람은 의료 서비스를 평등하게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의대는 사회 의학이라는 과목이 따로 있는 만큼, 의료라는 게 일정 부분 사회주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걸 배우게 되니 아예 영향이 없진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훨씬 가볍게 접근하려고 하거든. 이거 봐 봐.”
“으응…….”
수혁이 내민 것은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뭐지, 이거. 무슨 뜻이야.’
하윤은 그렇지 않아도 연애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폰을 보면서 좀 헷갈렸다.
물론 말을 들어 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걸음 수 보여 주잖아, 태화 전자 폰은.”
“어, 네.”
“이런 정보를 보면, 같은 체중이나 식단에서도 약 처방이 좀 달라질 수 있겠지. 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 휴대폰을 통해서 얻을 수 있어.”
“오……?”
“이걸 논문으로 활용해 보려고 해. 잘 들어 봐.”
“네에.”